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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노마 Dec 30. 2020

그럼.. 조금만 천천히 깨어나죠

넷플릭스, <에밀리, 파리에 가다; Emily in Paris> 리뷰

<하노마의 시선, 혹은 그 속의 이야기>는 우리가 웃고 떠들며 즐겼던 영화나 드라마 속의 순간, 혹은 대사를 다루고자 하는 리뷰이다. 재밌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웃고, 울고, 화내며 지나가던 순간들 속에서 미처 우리가 곱씹어보지 못했던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인상적인 대사, 혹은 순간들을 기억하기 마련이다. 2020년을 강타한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부터 시작해서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를", "오겐키데쓰카- 와타시와 겐키데스" 와 같은 대사들이 그렇다. 또는 용광로 속에 빠지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장면, 눈 밭에 누워 천사를 그려내는 장면 등 우리는 작품 속에서 저마다의 순간과 대사를 기억한다.

이 리뷰를 통해서 당신이 보지 못했던 순간과 대사를 곱씹어보며 작품을 보다 다양하게 즐길 수 있기를 빈다.
Emily In Paris 공식 포스터
<Emily in Paris; 에밀리, 파리에 가다>는 2020년 10월부터 방영된 미국 드라마다. 파리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한 여주인공 에밀리가 파리 회사에 파견되어 겪는 다양한 스토리를 풀어낸 이야기다. 프랑스인에 대한 이미지, 프랑스인들의 생각, 우리가 상상하는 파리의 모습과는 다른 순간들, 그리고 파리에서 한 번쯤은 겪게 될 당혹스러운 순간 등을 재미나게 담아낸 드라마이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리뷰입니다.]
"You Live to work, We Work to Live" - 1화(에밀리, 파리에 가다)

상사를 대신해 파리에 도착하고 첫 출근을 한 에밀리. 하지만 프랑스어 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하고 파리에 오게 된 에밀리는 그녀의 상상과 달리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일에 대한 의욕은 가득하지만, 프랑스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La Plouc(라 쁠룩, 촌뜨기)이라고 무시받고, 프랑스 회사 대표로부터 미국의 방식은 프랑스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직원들이 함께 점심 먹는 것을 피해 혼자 점심을 먹게 된 그녀, 하지만 이러한 고독은 퇴근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카페에 혼자 앉아있는 그녀를 우연히 마주친 같은 회사 직원 '뤼크(Luc)'는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해준다.


뤼크(Luc) : 있죠, 사실 우린 에밀리가 좀 무서워요.

에밀리(Emily) : 네? 내가 무섭다고요? 왜죠?

뤼크 : 당신 아이디어 때문이죠, 참신하잖아요 더 좋을지도 모르고요. 이렇게 당신이 왔으니 더 열심히 일해서 수익을 올려야 할까 봐 무서운 거예요.
에밀리 : 워라밸 문제군요?
뤼크 : 맞아요, 워라밸이죠. 미국인들은 균형 감각이 잘못됐어요. 일하기 위해 살잖아요, 우린 살기 위해 일해요(You live to work, we work to live). 돈을 버는 것도 좋지만 그쪽 기준의 성공이 우리 기준으론 고문이에요.

에밀리 : 난 일이 좋은걸요, 성취감도 좋고요 행복해지거든요.

뤼크 : 일을 하면 행복하다고요?

에밀리 : 네 그래서 여기까지 왔잖아요? 일하러요. 일 덕분에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에도 와 보고요.

뤼크 : 행복이 뭔지 모르는 거 아닐까요?

에밀리 : 그건 조금 오만한 소리 아닐까요?

뤼크 : 파리에 와서 프랑스어도 안 쓰는 게 오만한 거죠.

....



이 부분은 비단 영화 속 미국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에게도 해당되지 않을까?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에서 멕시코에 이어 두 번째로 일을 많이 하는 나라이다. 동시에 OECD 연평균 노동시간보다 278시간이나 더 일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떠올리면 밤늦게 퇴근해 씻고 잠들고, 다시 이른 아침 출근하는 모습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80년대 후반 세대, 더 나아가 Generation Z가 사회에 진출하며 워라밸 등이 중요시되었다. 다양한 논쟁거리들이 나오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Live to work 한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부터인지 퇴사, 워라밸, 삶에 대한 책들이 늘어나는 것은 물론 브런치에도 퇴사 후의 삶, 나를 찾아가는 글쓰기와 같이 삶을 다시 재조명하고 고민해보는 글이 늘어나고 있다. 드라마 속 짧은 대사지만 '일'에 대한 의미를 다시 한번 고민해볼 수 있는 대사이다. 그런 나도 뤼크처럼 당신에게 묻고 싶다.


"Are you work to live or live to work?"


"You beileve in happy endings?" - 7화(프랑스식 엔딩)

에밀리의 상사인 실비(Sylvie)는 향수회사 메종 라보의 대표 앙투안(Antoine)의 내연녀이다. 여름휴가를 맞아 앙투안은 실비와의 상바흐텔레미(Saint-Barthélemy) 휴가를 계획했다. 하지만 그의 비서가 앙투안의 와이프 카트린(Catrine)에게 호텔 예약 메일을 보내고 카트린은 앙투안에게 깜짝 선물을 받았다며 모두가 모인 파티 자리에서 앙투안을 칭찬한다. 졸지에 기대하던 여름휴가를 취소당한 실비는 슬퍼할 새도 없이 회사일로 시간을 보낸다. 회사일을 잘 마무리한 두 여자, 에밀리와 실비의 엘리베이터 씬에서는 이러한 대화가 오고 간다.



에밀리(Emily) : 앙투안이랑 행복하세요?

실비(Sylvie) : 사람이 언제나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그렇겠죠
에밀리 : 글쎄요, 저는 그냥 실비가 아까워서요.. 차라리 다른 누군가를 소유하는 게..
실비 : 남을 온전히 소유할 생각도, 남에게 온전히 소유될 생각도 없어요. 어차피 연애도 결혼도 그걸 보장하진 않으니까, 그런 건 동화에 불과해요, 못 만든 영화죠

에밀리 :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실비 : 당신은 해피엔딩을 믿으세요?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나 전부 해결해 줄 것 같아요?(You believe in happy endings don't you?, The knight on the white horse is gonna come and save you from everything?)

....



프랑스에는 팍스(PACs, Pacte civil de solidarité; 시민연대계약)라는 신선한 제도가 있다. 법적인 절차, 즉 결혼이라는 제도하에 두 연인이 묶이는 것이 아니라 팍스라는 제도하에 결혼에 준하는 혜택과 그 형태를 갖추는 것이다. 동성 성인 간의 결합을 위해 만들어진 이 제도는 많은 이성 커플이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제도를 이용하거나 혹은 이용하지 않게 되었을 때의 과정이 결/이혼보다 비교적 간단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러한 제도가 있음에도 결혼이라는 제도 하에 가정을 꾸리고도 내연녀와 바람을 피우는 앙투안이 이해도 안 되고 욕하기 바빴지만, 에밀리와 마찬가지로 실비가 참 안쓰러웠다


그래서인지 이 대화에서 실비의 외로움이 더욱더 많이 느껴졌다. 사랑은 하지만 소유할 생각도, 소유될 생각도 없다는 그녀의 말, 그리고 해피엔딩은 없을 거라는 그녀의 말에 외로움이 묻어났다. 결혼은 사랑, 행복의 시작이고 굳이 엔딩을 생각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물론 제일 안쓰러운 건 그의 와이프 카트린이 아닐까)


사랑의 의미와 형태는 제각기 모두 다를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사랑을 할 것이고, 때론 행복에 겨울 때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순간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사랑에는 Ending을 묻지 않는 것, 그래야 팍팍한 삶이 조금이나마 행복하지 않을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읽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You beileve in happy endings?"

Slower, You're supposed to savor it - 8화(복잡한 가족)

에밀리는 그녀의 아랫집 이웃이자 친구이자 남자 주인공인 가브리엘(Gabriel), 그리고 우연히 알게 된 그의 아랫집 이웃의 여자 친구인 까미유(Camille)와 함께 여행 겸 일로 까미유의 가족 양조장에 방문한다. 방에서 휴식을 취하던 그녀는 절친인 카미유가 부모님과 싸우는 소리에 밖으로 나와 휴식을 취하다가 카미유의 가족이자 낮에 양조장 투어를 도와준 티모테(Timothé)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파리에 오게 된 이유와 파리 이전의 삶, 그리고 지금의 삶에 대해 그와 대화를 나눈다.



티모테(Timothé) : 집에서 도망쳐 파리에서 살아보니 나쁘진 않죠?

에밀리(Emily) : 도망치지 않았어요, 일하러 온 거죠
티모테 : 말도 모르는 나라에 억지로 보낸 거예요?, 그건 좀 아니죠.
에밀리 : 아니에요 나도 오고 싶었거든요, 도망친 건 아니지만요. (시카고에서의 삶은) 좋은 직장에 좋은 애인과 친구들이 있었고... 음, 이런 나 도망친 거 맞네요

티모테 : 행복했을 것 같은데요?

에밀리 : 행복했지만 새로운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아무런 결정도 내릴 필요가 없었죠. 나쁜 결정도 말이죠, 내일 일을 뻔히 알 수 있었어요.

티모테 : 지금은요?

에밀리 : 이젠 아무것도 모르겠네요, 모든 게 새롭고 혼란스러워서 솔직히 조금 무서워요.

티모테 : 그래도 지금이 좋죠?(에밀리가 샴페인을 한 번에 다 마시는 걸 본 후) 천천히 마셔요, 맛을 즐겨야죠(Slower, You're supposed to savor it)

....



우리가 여행을 꿈꾸는 이유도 비슷하다. 내가 머무는 곳에 번듯한 직장과 친구와 가족이 있지만, 늘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일상의 지루함을 벗어나고자 여행을 떠난다. 공항이 즐거운 이유는 '비행기를 탄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 '가보지 못한 곳으로 떠난다는 설렘', 혹은 '새로운 일상의 시작점'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여행을 떠나거나, 출장을 가더라도 새로운 곳에서의 두려움은 떨쳐낼 수 없다. '길을 잃으면 어떡하지?', '소매치기를 당하면 어떡하지?' 등 두려움은 늘 우리와 함께한다. 새롭지 않은 것에는 두려움이 없지만 새로운 것에는 늘 두려움이 함께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조급하게 두려움에 떨기보다는 새로움, 그 순간을 천천히 음미해야 할지도 모른다.


요즘 우리 일상은 이전보다 훨-씬 더 쳇바퀴 속에 갇힌 기분이 든다. 코로나로 인해 국내 여행은 물론이거니와 동네조차도 나가기 두려워졌다. 오죽하면 코로나 블루(Corona blue)라는 용어가 생길 만큼 답답함과 우울함이 더욱더 커져만가고 있다. 하지만 에밀리의 평범한 시카고 생활에 자신도 모르던 행복이 있었듯이 지루하기만 한 우리 일상 속에도 행복한 순간이 함께할지도 모른다. 영화 <원더풀 라이프> 리뷰를 쓰며 이러한 문구를 본 적이 있다.

"가끔 행복은 당신이 열어놓았는지 깨닫지도 못한 문을 통해 슬그머니 들어온다(Happiness often sneaks in a door you did not think was open)"

재택근무로 인해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었다면 이전에는 미처 나누지 못했던 대화를 더 많이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혼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다면 일에 치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나'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나의 '지금'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행복이 있을 수도 있다. 지루한 일상 속에 행복을 찾지 못했다면, 잠시나마 그러한 행복을 찾아보는 것도 좋다. 그리고 그것을 천천히 음미할 수만 있다면, 새로운 곳 못지않은 행복이 있지 않을까?


어제와 같은 일상, 혹은 어제와 다른 새로운 일상을 보낸 당신에게 나도 티모테와 같은 말을 건네본다.


"Slower, You're supposed to savor it"


Well.. let's not wake up just yet - Season 1

이번 리뷰의 제목으로 고르기도 한 이 문장은 <에밀리, 파리에 가다;Emily in Paris>에서 가장 애정 하는 대사다. 앞선 티모테의 대사 또한 정말 좋지만 프랑스 파리에 대한 것을 한 대사로 표현하자면 저 대사를 꼽고 싶다.


파리를 동경해 대학을 연관학과로 진학하고 파리에 4번씩이나 여행을 갈 만큼 프랑스 파리는 내게 특별한 나라, 그리고 도시이다. 유럽 여행을 다녀와 많은 이들이 '파리는 다시 가고 싶지 않아'라고 하지만 나는 한 곳을 가야 한다면 한결같이 파리로 떠나겠다고 말한다.


노상카페에 나란히 옆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연인들,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는 사람들. 피카소 미술관 정원의 작은 벤치에 누워 하늘을 보던 순간. 로댕 미술관 정원 귀퉁이 의자에 앉아 아무런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던 순간. 에펠탑 앞 광장에서 와인과 맥주를 마시며 변해가는 에펠탑을 보던 순간까지.


저마다의 시선으로 순간과 대사를 기억하듯이 나에게는 이 대사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귀국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는 순간, 파리에서의 기억들은 꿈을 꾸다가 깨어나는 것만 같았고, 조금만 더 천천히 깨어나고 싶었다.


이 대사가 나오는 장면이 언제인지, 어떤 상황인지 남기지 않으려 한다. 드라마를 보며 당신에게 이 대사는 어떠한 의미일지, 혹은 어떤 대사가 당신에게 남았는지 <에밀리, 파리에 가다;Emily in Paris>를 보며 즐길 수 있기를....


꿈을 꾸다가 깨어나는 순간 같아요
(I feel like I'm dreaming and I'm about to wake up).
그럼.. 조금만 천천히 깨어나죠
(Well.. let's not wake up just yet).






리뷰에 전부 담지는 못했지만 많은 소재들이 다뤄지는 드라마입니다. 마냥 즐겁고 아름다운 장면이 가득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불편한 감정이 함께 하는 장면이 있을 수도 있고요. 거꾸로 쓰는 날짜, 0층부터 세는 문화 등 파리에 간다면 겪을만한 당혹스러운 요소들도 잘 담아냈습니다. 그렇지만 웃고 떠들며 보기에는 모자라지 않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즐거운 코미디 드라마를 너무 심각하게 바라보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예술은 누군가 바라봐 줄 때 비로소 빛이 난다는 말이 있듯, 여러분들만의 시각으로 그 작품을 음미하실 수 있길 바랍니다.


오늘 유난히 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하노마 드림.


Main Photo by 하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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