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트리 Dec 22. 2024

육아마라톤, 바다에서부터 5km째

너희를 향한 다짐


 시험관 시술을 진행하며 소란한 마음을 잠재우기 위해, 시집 ≪바다는 잘 있습니다≫ 를 자주 펼쳤다. 어린 시절, 바닷가 소도시에서 자란 나는 자연의 바다를 사랑하고, 단어로서의 바다를 깊이 아낀다. 내게 명사인 바다는 해안에서 수평선으로 이어질수록 짙어지는 색의 밀도, 변화무쌍하게 굽이치다 제방에 부딪혀 포말을 흩뿌리는 파도, 그리고 깊이 숨을 들이쉴 때 코끝에 차오르는 소금기 어린 바람과 은은한 솔향까지 떠오르게 한다. 이렇게 풍성한 감각을 선사하는 게 참 좋았다.


 특히, "잘 있습니다"라는 제목에 눈길이 닿을 때마다, 뱃속의 아이가 내게 안부를 전하는 듯했다. 자연스럽게 첫째의 태명은 '바다'로 정했다. 바르고 다정하게 자라라는 뜻을 붙였다. 바다는 태명대로 주수에 알맞은 올바른 속도로 자라며, 엄마가 힘들지 않도록 입덧 없는 다정한 임신기간을 선물했다. 그리고 38주 4일 만에 3.52kg의 건강한 모습으로 세상에 왔다. 바다라는 태명을 지어주며 꿈꿨던 모든 것들은, 아이가 뱃속에서부터 세상에 나온 지금까지도 천천히 내게 되돌아왔다.








설마, 설마 하니 내가 쌍둥이를 품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설마는 진짜로 사람을 잡는다. 뱃속에 자리 잡은 쌀알만 한 두 개의 배아를 확인한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쌍둥이를 품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에, 반가움과 놀람이 한꺼번에 몇 곱절로 밀려왔다. 둘까지는 남편과 육아를 분담하면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셋은 이야기가 달랐다. 그 순간, 십여 년 전에 본 영화 한 장면이 떠올랐다.



영화 <어바웃 타임> 포스터. 레이첼 맥아담스 진짜 예쁘게 웃네 :)

≪어바웃 타임≫에서 메리가 셋째를 낳자고 팀을 설득할 때 이런 말을 한다.


 만약 두 아이 중 한 명이 똑똑하다면, 다른 한 명은 평생 멍청이라고 괴로워할 거야. 그러니 셋을 낳으면 나머지 둘은 행복한 멍청이로 살겠지.



결혼과 임신, 출산에 대한 이해도가 0이던 시기에 감탄했던 장면인데, 이 장면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재생되면서, 나도 모르게 크게 웃고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우리 아이들 중에 한 명쯤은 똘똘할 수도 있을 테니, 나머지 둘이 행복하게 어깨동무하고 지내면 다행이란 결론을 내렸다.


쌍둥이의 태명은 함께 불러도, 따로 불러도 자연스러운 이름이어야 했다. 그래서 '알송'과 '달송'으로 정했다. 남편의 성인 송 씨에서 따온 이름이기도 하고, 삶을 알록달록하게 스스로 채워가는 능동적인 사람으로 자라길 바라는 염원을 담았다. 아이들의 성별이 궁금해서 '알쏭달쏭한 물음표'를 띄운듯한 느낌도 1% 정도 곁들였다.










2020년 가을, 뱃속에 쌍둥이를 품고 바다의 육아일기를 쓰던 나는 마지막 문단에 이런 다짐을 새겼다.


봄의 기운이 느껴지면 꽃을 심을 다정함을, 여름 햇살 아래 감사하는 마음을, 가을의 정취에 안부를 묻는 온화함을, 겨울에 고마운 이를 찾아뵙는 예의를 가르쳐야지. 아이들의 빛나는 순간을 함께하고 어떤 고난을 만나도 응원하는 가족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정직하고 바른 삶이라면 무슨 일을 해도 기다려줘야지. 부족한 엄마는 오늘도 이렇게 마음을 다잡는다.


(호기롭게 꿈꾸는 편입니다...)


쓴 다짐대로 살지 못할 때마다, '한 번에 하나씩 낳았다면 더 깊게 사랑하고 잘 키울 수 있을 텐데.' 하고 후회한다. 그러면 '맞다. 그 시기에 과배란을 진행해서 자란 난자와 그날의 남편의 정자였기에 만난 아이들이지.' 하는 생각이 보란 듯이 꼬리를 문다.


그럴 때, 다시 ≪어바웃 타임≫을 보며 내게 찾아온 두 번의 기적을 되새긴다. 이런 서툰 엄마의 어설픈 손길에도 아이들이 쑥쑥 자라는 걸 보면, 이 아이들은 내게 과분한 축복임이 틀림없다.


바다와 알송달송이는 우리 집의 3인조 아이돌이다. 어린이집에서 배워온 개다리춤을 추기 시작하면 집안 가득 환희가 넘친다. 왼쪽 팔꿈치에 깁스를 한 바다가, 입이 짧은 달송이에게 오른손으로 밥을 떠먹여 주는 모습을 보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시간인데 종달새처럼 지저귀길래 으름장을 놓으러 방문을 열었더니, 짧은 팔을 있는 힘껏 뻗어 머리 위로 하트를 그린다. 남편과 나는 애써 근엄한 척하지만, 하트마다 담긴 말간 얼굴을 보고 결국 무장해제되고 만다. 이런 아이들 덕분에 나는 감사로 하루를 채운다.








 삼십 대 중반인 내게 매일 밥을 거르지 말라고 당부하는 엄마를 떠올리면, 육아란 딸이 애셋을 낳아도 끝나지 않는 장거리마라톤임을 깨닫는다. 첫째인 바다가 다섯 살이니, 42.195km의 마라톤 중 고작 5km를 달려온 셈이다. 아직 37km 이상 남았구나.


 이 긴 여정동안 나는 더 많은 사랑과 마음을 퍼부어야겠지. 지금은 몽돌해변에서 발목을 간지럽히는 파도에 익숙해지도록 돕는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아마도 사춘기가 되어 자아가 단단해지면, 부표를 정해주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도록 지켜봐야 하겠지. 부모님께 받은 상처를 내 아이들에게는 물려주지 않는 차분한 엄마가 되고 싶다. 맑은 눈, 넓은 품, 그리고 담대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품을 수 있을까?


 아이들은 각자의 방식과 속도대로 자라날 것이다. 조금 더딜 수도 있고, 가끔은 멈칫거릴 때도 있겠지. 엉켜버린 실타래를 다시 짜 맞추는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도톰한 매듭을 남기며 더욱 단단하게 성장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가만히, 세 아이가 빚어내는 삶의 문양을 읽어가며 조용하지만 꾸준한 응원을 보내야겠다. 너는 당연히 잘 해낼 거라고, 혹시 지치고 힘들 땐 언제든 돌아와도 괜찮다고 꼭 말해주고 싶다. 아이들 삶의 페이스 메이커로서, 나는 은 37.195km도 묵묵히 함께 걸어갈 것이다. 언젠가 아이들이 각자의 항해를 떠나는 날엔, 쌓아온 사랑을 뚝 떼어서 돛으로 달아주고 싶다. 내 여정은 길고도 험난하겠지만, 이 항해의 시작이 된 세 아이가 있기에 끝까지 감사하며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