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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데 Dec 02. 2017

여섯 번째 날, 위로한다는 것.

시월십삼일, 이천십칠 년

두 개의 달이 서로를 품에 안은 듯 음침한 밤을 대낮처럼 밝히며 유별나게 화사했던 날,

독일 가을답지 않게 유난히 따뜻한 볕이 들어 심장까지 뽀송뽀송해지던 그 날,

맑은 하늘엔 엷은 구름 한 점 없이 그저 맑고 또 맑았던 그런 날,

차를 몰고 시내로 나서는 내내 십여 개의 신호등 앞에서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지나던 어느 날,

예약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지만, 30분 이상 늘 기다리던 다른 날과 달리 대기 시간 없이 바로 의사를 만나던 그 어느 날,

독일에서 살면서 그렇게 운수 좋았던 날이 없었다.


두 번째 시험관을 시작한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주사를 맞기 시작한 지 여드레 날 점심때 초음파 예약이 잡혀 있었다.

첫 번째 초음파 했을 때 경과 좋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심각하게 우울하지는 않았다.

비록, 돌아오는 차 안에서 펑펑 쏟아내긴 했지만, 그래도 금방 마음을 고쳐 먹을 수 있는 정도였다.

의사를 만나고 인사하고 바로 초음파 검사부터 했다.

그런데 의사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니 표정을 볼 필요도 없이 초음파를 보는 내내 의사의 표정은 엷은 바람에도 툭하고 부서질 듯 굳어 있었다.


"탁"


옷을 갈아 입고 의사 앞에 앉았는데도 한동안 서류를 뒤적이던 의사가 서류를 덮고 우리를 보았다.

우리는 이제 막 시험관을 진행했고 이제 겨우 두 번째 초음파 검진이었는데,

추가로 무엇을 적지도 않고 서류 더미를 그대로 덮어 버렸다는 것,

의사의 입으로 어떤 말을 듣지 않아도 내가 들을 말이 나를 슬프게 할 것임은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그 얇은 몇 장의 종이들은 엄청나게 커다란 돌덩이가 바닥으로 내동댕이질 당하듯 이미 내 심장을 후려치고 있었다. 그리고 힘없는 소리로, 또 매우 조심스럽게 의사는 입을 열었다.


"채취까지 가지 말고 지금 중단하면 이번 회차는 보험 회사에서 계산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다음번 채취를 두 번째로 치고 반액 지원을 받을 수 있어요.

나는 한 두 달 쉬고 다른 방법으로 했으면 좋겠는데.. 생각 좀 해보실래요?"


아플 것을 예상했다고 막상 현실에 직면했을 때 덜 아플 리 없었다.

겨우 담담한 척했지만, 그 말을 이후로 내 머리 속은 하얗게 모든 뇌세포가 흩어지는 기분이었다.

앞에서 계속 말하는 남편도, 의사도 모습이 점점 흐릿해지고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득하게 곧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시 정신을 차린 건 남편의 말 때문이었다.


"당신은 어떻게 할래?"


남편은 의사의 의견에 동의했다.

나만 결정하면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결정은 쉽지 않았다.

나는 하나라도 채취할 수 있으면 진행하고 싶었지만, 강행하기에 우리에게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애초의 우리 난임의 원인은 내가 아니었으니, 힘들게 겨우 한 개 채취한다고 해도 그다음에 더 커다란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능한 많은 난포를 얻어야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일 수 있는데, 한 두 개로는 의미 없다는 의사의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거의 반강제적으로 그렇게 두 번째 시술은 첫 번째 시술보다도 허무하게 끝났다.

처음에는 이식도 못하고 끝나고 두 번째는 채취도 못하고 끝이 났다.


첫 번째 시술에서 이식도 못하고 끝났을 때는 이 보다 더 나쁜 결과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때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두 번째 시술에서는 채취조차 못해보고 끝났다. 허무하게 끝난 두 번의 시술은 내 감정을 바닥까지 끌어내리고 벼랑 끝으로 몰아냈다. 갑갑하다.  


호르몬 주사에 반응을 너무 안 하니까 한두 달 쉬고 다른 방법으로 진행하자고 말했을 뿐인데,

나는 그 말이 나는 앞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매우 부정적인 사형 선고처럼 끔찍하게 들렸다.

너무 아팠다.

꾹꾹 눌러 참았던 서러움과 슬픔이 한꺼번에 터져 결국 의사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한 번 터진 눈물은 멈출 줄 모르고 의사도 남편도 어쩔 줄 몰라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리는 말을 아꼈다.


나에게는 문제가 거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두 번째 시술이 허무하게 끝나니 애초에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은 아이를 무리하게 원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독일에서 보험회사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세 번의 기회까지는 시도해보고 포기하자며 시작했는데,

우리에게는 그 세 번을 위해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조차 버겁다.

내가 살면서 얼마나 많은 나쁜 생각을 하며 살았나,

그래서 그것들이 이렇게 날카로운 화살로 돌아와 나를 찌르고 후벼 파는지,

그냥 평범하게 흐르는 시간도 원망스럽고 새로운 날이 밝아오는 것도 무섭게 느껴졌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보통 그렇듯 나도 원망, 슬픔을 지나 자책과 반성에 이르렀다.


하늘에 별 따기.

나에게 아이가 정말 하늘에서 별을 따와야 하는 기적이 될 줄 몰랐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이 슬픈 현실은 현재 직면한 가장 큰 문제가 되었고, 이 고통의 수렁 속에 빠져보니 이제야 알겠다.


세상에는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 사람이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아픔이란 그런 것이었다.

같은 상황, 같은 아픔일지라도 사람마다 아픔의 정도가 다를 것이고 다른 시련에도 비슷한 고통을 느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제일 아프냐가 아니라 내 아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당사자뿐이라는 것이다.

그 외, 누구도 그 사람의 아픔은 상상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세상에서 제일 힘든 사람이라는 생각은 어쩌면 전혀 이상한 게 아니었다.


이, 삼십 대를 정말 파란만장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남들 평생에 한 번 경험해볼까 말까 한 일들을 여러 방면으로 겪으면서 어지간한 일에는 단련이 되었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래서 한 때는 누구보다 남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다고 자신한 적도 있었고 쉽게 감정 이입하여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똑같은 아픔을 직접 겪어보지 못했어도 내가 겪은 수많은 아픔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내가 얼마나 오만했는지를 깨닫는 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다르듯 모두에게 난임이, 같은 고통의 무게는 아닐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내가 느끼는 이 절망은 이제껏 느껴본 적 없던 또 다른 지독한 어떤 것이었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이 고통을 그동안 나는 어쭙잖은 말로 위로하겠다며 헛소리를 했었구나, 뒤늦게 깨달았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이제는 누군가에게 위로의 '말'을 감히 할 수 없게 되었다.


위로한다는 것.

그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조언해주는 것이 아니다.

위로한다는 것.

그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공감하고 안아주는 것도 아니다.

위로한다는 것.

그것은 내가 그 누구의 아픔을 덜어줄 수도 공유할 수도 없는 것이다.

위로한다는 것.

그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어떤 것을 해주는 것이 아니다.

위로한다는 것.

그것은 위로받고 싶은 사람에게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있어주는 것이다.


위로한다는 것.

그것은 아무 말 없이 그냥 안아주는 것으로 위로가 되는 사람에게 따뜻한 품을 내어주는 것이고,

끝도 없이 하소연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내 두 귀를 모두 열어주는 것이며,

내가 아픈 그것에 대해 아무 말도, 묻지도 않길 바라는 이에게는 그저 평상시처럼 대해주는 것이다.


위로하는 것은 사실 정말 어려운 일이다.

같은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가진 아픔에 따라 위로되는 방법이 다를 때가 있고

전혀 다른 아픔이 하나의 방법으로 위로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든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방법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경우가 드물다.

그리고 그것을 상대방에게 요구할 수도 있음에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냥 너무 힘드니까.


나는 힘든 일이 있을 때, 보통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공감을 구하며 위로받는 편인데,

이번 경우에는 그런 방법이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고 외려 상처가 된 경우가 많았다.

예로 들어주는 다른 사람의 상황이 나와 비교될 상황도 아니고 오히려 부러움과 절망을 가중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마음을 비우라는 조언도 그랬다.

하루에도 슬퍼지는 감정을 끌어올리고 다시 떨어지지 않기 위에 얼마나 속으로 싸우는지,

생각해도 답이 없는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도하고 음악 듣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그것을 몰라서 또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내가 작정하고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누군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면,

이야기가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눈물부터 덜컥 나왔기 때문에 그냥 어떤 질문도, 아무 말도 않는 편이 좋았다.


위로한다는 것.

내 경험을 미루어 애써 어떤 말이나 무엇을 해 줄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위로한다는 것.

내가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미루어 짐작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위로한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조심스러운 일이며,

얼마나 섬세하게 그 사람이 위로받고 싶은 방식을 찾아야 하는 것인지 나도 이전엔 몰랐다.

이전엔 나도 내가 어떤 면에서 위로를 받는지 몰랐기 때문에 그랬다.


시험관이 두 번이나 허무하게 끝나면서 정신적으로 무척이나 힘들었는데,

그중에 가장 답답한 것은 나와 같은 케이스를 찾기 어려웠던 것이었다.

게다가 나는 외국어로 타지에서 진행하다 보니 더욱 답답했고 더 자주 인터넷에서 나와 비슷한 경우를 찾아 헤맬 수밖에 없었다.

나와 비슷한 경우는 찾기도 힘들었지만 찾아도 그들이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과정이나 결과가 거의 없었다.

나쁜 결과든 좋은 결과든 예상할 수 있는 정보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출구 없는 미로에서 출구를 찾을 수 있는 빛 마저 빼앗긴 기분이었다.


내 사생활, 게다가 좋지 않은 이런 이야기.

인터넷에서 쓰고 공개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써야겠다고 느꼈던 이유는 내가 느꼈던 그 누군가의 답답함에 일말의 도움이 되고 싶었다.

내 과정이 비록 부정적인 결말을 맞게 된다 할지라도 나는 그런 정보도 절실했기 때문이다.

또 잘 위로받고 싶기 때문에 나름의 용기로 이런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위로할 때 그 누구도 대충하지 않는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런데, 그 방식에 대해서는 정말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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