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월 십사일, 이천십칠 년
눈이라도 펑펑 왔으면 좋겠어.
겨울이 오면 으레 이런 생각을 했다.
겨울이 오면 눈이 오는 것은 당연한 것 인데도 내가 사는 남독일에서는 그것이 당연하지 않은 것 중 하나였다.
벌써 여섯 번째 겨울이 다가오는 데, 눈을 본 일을 손가락으로 세고 손가락이 많이 남을 정도였다.
늘 우중충한 날씨가 어쩔 수 없다면 눈이라도 펑펑 왔으면 좋겠다고 자주 생각을 했다.
눈이라도 펑펑 내려주면 온통 하얗게 변하는 회색빛 독일이 가끔 위로가 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시험관에 실패하고 한국에 다녀왔고 그 사이 독일에서 세 번째 시술을 했다.
마음을 많이 비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시술에 들어가니 그렇지 않았다.
첫 번째 초음파 할 때 얼마나 심장이 떨리는지, 다른 사람이 그 소리를 들을까 노심초사하기 까지 했다.
다행히 채취까지 잘 이어졌지만, 난포를 많이 얻지는 못했다.
그래도 채취했으니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결과를 기다렸지만, 이번에도 처음과 같은 결과였다.
세 번째 시술도 처음처럼 역시 우리의 난포는 세포분열을 전혀 하지 않았다.
또다시 이식도 못하고 허무하게 끝났다.
한 동안 아무것도 못했다.
멍하게 시간을 보내다 안 되겠다 싶어 무작정 밖으로 나갔는데 그것이 실수였다.
크리스마스가 엄청난 축제인 유럽에선 온 동네에 크리스마스 시장이 열리고 평소에는 집에만 있던 어린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밖에서 크리스마스를 즐기고 있었다.
부지런히 벌써부터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이들 틈에는 어느 날보다 아이들이 더 눈에 띄었다.
내 마음이 지금 그래서 그런 걸까?
아니었다. 분명 크리스마스 열기에 온 도시가 후끈후끈 달아올랐고 신난 아이들은 커다란 개들과 어울려 뛰어다녔다. 결국 나는 모두가 즐거운 도시 한쪽 구석에 쭈그려 앉아 펑펑 울고 말았다.
루르드 까지 찾아가서 기적의 샘물을 마시고 정성으로 기도를 바쳤지만, 루르드 기적 따위는 없었다.
처음으로 하루에 10단씩, 20단씩 올리던 묵주기도를 쉬지 않고 100일 가까이 정성으로 바쳤지만, 묵주기도의 기적 따위도 역시 없었다.
모두가 행복하고 눈동자마저 발랄한 이 축제 속에 나만 다시 암흑 속에 빠진 기분이었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고 무얼 해야 하는 걸까.
그리고 지난 2년 나는 무엇을 한 것일까.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그대로 끝없이 가라앉고만 있었다.
그래도 나는 맘대로 울 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사람이 많은 길거리 한복판이라도 가끔씩 멈출 수 없는 눈물이 흐르곤 한다.
내가 먹고 싶다면 뭐든 싫은 소리 않고 뚝딱 해주는 사람.
겨울 내내 물 끓여서 히터 팩(wärmflasche) 만들어주는 귀찮을 일을 하루에 몇 번씩 부탁해도 항상 웃으며 기꺼이 해주는 사람.
그 사람 때문에 나는 맘 놓고 울지도 못한다.
내 눈물이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아니까 그러지 못한다.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또 가장 큰 위로가 될 수 있는 사람 앞에서 난 또 억지로 삼켜야 한다.
그런데 너무 아프다.
너무 아파서 아프다는 소리를 내기도 전에 꺽꺽이며 설움이 먼저 터지는데, 이것을 어떻게 눌러 담을 수 있을까.
그렇지만, 오늘도 난 참아야 한다.
나에게는 그냥 아픔이고 단순한 눈물이지만 남편에게 내 눈물은 칼처럼 단단하고 날카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아파도 그래야한다.
이제 막 겨울이 시작됐는데, 예년 같지 않게 올해 유난히 눈이 자주 내리고 많이도 내렸다.
내가 너무도 좋아했던 눈이기에 그것이 어떤 행운의 징조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결국은 정말 눈이라도 펑펑 온 것이다. 그냥 그것뿐이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많이 햇살이 비치고 펑펑 눈이 내렸나 보다.
나는. 우리는.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여기서 걸음을 멈춰야 할지......,
조금 더 나아가도 될지.......,
그냥 이대로 세상에서 사라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것이 꼭 죽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다.
단지, 많은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이 내게 이렇게 어려운 것을 나는 여전히 인정하기 싫은 모양이다.
이 아픔은 내가 받아들이고 짊어지기에는 너무 버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