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한트케 <관객 모독>
여러분이 아직 들어 본 적 없는 것은 여기서도 듣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직 본 적 없는 것은 여기서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곳 극장에 오면 늘 보았던 것을 여기서는 전혀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곳 극장에 오면 늘 들었던 것을 여기서는 전혀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연극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이미 일어났던 사건이 반복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는 지금이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현재를 의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보내는 이 시간이 바로 여러분의 시간임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주체입니다.
연극이 상연되었던 것이 아니라 현실이 상연되었던 것입니다. 시간이 상연되었던 것입니다.
낯설게 하기. 내가 이미 알고 있지만 인지하지 못했던 것을,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것을 당연하지 않은 것임을 알아차리게 하는 그런 작품이었다.
피터 한트케의 관심은 "언어"에 있었다고 하니 이런 작품을 쓴 것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작품 해설에 따르면, 사람들은 언어는 사물을 지칭하는 것이며 대상과 일치하는 상징이라고 생각해왔으나, 언어학자 소쉬르 <일반언어학 강의>로 인해 20세기부터 사회에서 오랜 시간을 두고 축적된 언어 'langue'와 그 일부를 빌려쓰는 개인들의 언어 'parole'로 구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또한 언어 연구 대상은 'langue'였으며, "언어가 세상 사물과 아무 관계가 없는, 단지 사람들 사이의 약속일 뿐"이라고 정의했다고 한다. (이는 추후 구조주의라는 패러다임을 만들어내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래서 한트케는 연극이 어떤 사건 또는 이야기를 전달하고 연극을 그 대상(사건, 이야기)와 일치하는 상징이라고 생각하여온 것을 '사람들 사이의 약속'일 뿐인 것임을 알리기 위해 "이것은 연극이 아닌 이미 일어났던 사건의 반복이며, 시간이 상연되었던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또한 한트케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 '47그룹'이라는, 독일의 전쟁 범죄 행위에 속죄하는 뜻에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쓰는 문인 단체를 '서술 불능', '낡고 어리석다'라고 공격을 펼쳤다고 한다. 하지만 공격을 펼친 이유가 순수하게 문학 사상의 충돌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인종청소를 자행한 밀로셰비치를 두둔한 전력을 비추어 볼 때 그 의도가 불순해 보이는 건 있다. 한편으로는 핍박받은 역사를 지닌 슬로베니아 출신 어머니를 둔 가족사나, 패전 이후의 독일 분위기 등으로 인해 서구 강대국에 대한 열등감과 거부감 등을 가지고 있진 않았을까 한다.
2019년 노벨 문학상을 받을 때 그에게 비난이 쏟아졌던 것을 떠올리며, 한 사람을 판단하는 건 너무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학살자에 동조한건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나 그는 정말 무슨 생각으로 학살자를 지지했을까. 역사는 승자인 서구 강대국의 시각으로 기록 되고 판단을 내리는 사람과 판단을 받는 사람의 주관은 너무나도 다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