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라스베이거스
영화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Leaving Las Vegas)'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는
"I don't know if my wife left me because of my drinking or I started drinking 'cause my wife left me" 일 테지만,
내게 가장 인상 깊게 들렸던 대사는 다음과 같다.
Sera : What brings you to Las Vegas? Business convention?
Ben : No, I came here to drink my self to death
이 영화 자체는 내가 많이 좋아하지 않지만 이 장면 속 초점 잃은 주인공 벤의 눈, 의미 없이 오고 가는 허무맹랑한 대사들, 쓸데없이 로맨틱한 BGM 은 내가 이 영화를 잊지 않는 이유다.
이 장면에서 세라와 벤은 대화를 나누며 호세쿠엘보 레포사도를 함께 마신다.
호세쿠엘보는 세계 점유율 1위의 테킬라 브랜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브랜드를 통해 테킬라를 접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양산형 테킬라로서, 테킬라를 판매하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이 테킬라를 구비하고 있다. 무난한 가격과 무난한 맛을 자랑하여 입문용 테킬라로 제격이라 하지만 특유의 역한? 느끼한? 맛으로 테킬라 입문 도전자들을 떠나보내기도 하는 녀석이다.
뭐 어쨌든 영화에 영감을 받은 나는 언젠가 라스베이거스에 간다면 호세쿠엘보를 마시다 죽으러 갈 것이다...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번 라스베이거스 여행은 3박 4일 일정이었기에 테킬라를 마시다 죽어버리기엔 그 시간이 너무 짧았다.
데낄라는 아가베라는 식물을 원료로 만든다.
식물의 모양새가 알로에를 닮아 멕시코에서 자라는 선인장의 한 종류라는 오해를 받지만 사실은 아스파라거스과에 속하는 식물이다. 알로에도 마찬가지.
우선 아가베의 잎을 모두 잘라준 후 몸통을 쪄내 즙을 낸다. 이 즙을 발효하고 2-3회의 증류를 거쳐주면 아가베 증류주인 메즈칼이 탄생한다.
메즈칼 중에서도 원료로 블루 아가베를 사용하고 멕시코 내 특정 지역에서 생산된 경우 테킬라가 된다. 브랜디 중에서도 코냑 지방에서 생산된 브랜디만을 코냑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느낌.
이렇게 보면 테킬라가 메즈칼보다 더 고급술이고 더 비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매장 가면 메즈칼이 더 비싸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지만 아마 테킬라는 세계적으로 대중화가 되었기 때문에 대량 생산 시스템이 갖춰졌고, 그에 반에 메즈칼은 여전히 전통방식으로 소량 생산을 하기 때문이라고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테킬라의 급을 따지는 가장 표면적인 방법이 두 가지 있는데 첫 번째가 바로 블루 아가베의 비율이다.
100% 블루 아가베를 원료로 사용한 테킬라는 웬만하면 병에 100% 블루 아가베를 사용했다고 적혀있다. 100% de agave, 100% puro agave 등의 문구가 병에 적혀있다면 블루 아가베만을 원료로 사용한 테킬라이다. 맛을 기대해도 좋다.
그러나 호세쿠엘보, 테남파, 듀랑고 등의 양산형 테킬라는 블루 아가베 비율이 적혀있지 않다. 아마 51% 최저 기준을 맞추고, 나머지는 설탕이나 기타 곡물을 넣어서 만들었을 것이다.
두 번째 기준은 숙성 기간이다.
증류 후 오크통 내에서의 숙성 기간에 따라 블랑코(숙성 없이 병입), 레포사도(2개월 이상 1년 이하), 아네호(1년 이상), 엑스트라 아네호(3년 이상)의 등급으로 나뉜다.
보통 칵테일 바에서 가장 보기 쉬운 테킬라가 레포사도 급 테킬라이다. 스트레이트로 마시기에도 부드러운 편이고, 칵테일을 만들기에도 적당하다.
테킬라는 한국에서 마시기 좋지 않은 술이다.
일단 국내로 수입되는 테킬라의 종류가 많지 않다. 호세쿠엘보, 사우사, 듀랑고, 테남파, 1800, 돈 훌리오, 패트론 정도가 흔히 볼 수 있는 수준.
수입된다 하더라도 그 가격이 많이 뻥튀기되어 맘 편히 마시기엔 무리가 있다. 호세쿠엘보 레포사도 750 ml의 경우 해외에선 20달러 이하지만, 국내 마트 가격이 대략 4만 원 이상이다.
주류 선진국 미국에선 매우 다양한 테킬라를 저렴한 가격에 구할 수 있다. 말 그대로 테킬라를 마시다 죽어버리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원래 영화에서처럼 호세쿠엘보를 마셔볼 생각이었지만, 막상 미국에 도착하니 한국에서도 발에 차이는 호세쿠엘보를 굳이 마셔볼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래서 구입한 테킬라가 바로 그란 센테나리오 아네호이다.
그란 센테나리오는 쿠엘보 가문에서 소유한 자회사이다.
호세쿠엘보를 통해 세계 시장을 장악했지만 양산형 싸구려 테킬라로 낙인찍혀버렸기에 고급화 전략을 세우고자 보유한 자회사이다.
100% 블루아가베라고 자랑스럽게 적어놨을 뿐 아니라, 아네호 급 테킬라인데도 불구하고 그 가격이 호세쿠엘보 레포사도의 국내 가격보다 저렴하다. 35달러 정도? 이런 주류 선진국 같으니..
와인처럼 눈으로 먼저, 그다음은 코, 마지막은 혀로 즐겨보도록 한다.
오크통에 숙성되었다고는 하나, 그 기간이 길지 않기 때문에 색깔이 위스키보다는 연하다. 마치 맥주 카스의 색깔과 유사하다.
다음은 향을 맡아본다. 생각보다 오크향이 강하다. 물론 오크통에서 오랜 기간 숙성시키는 위스키에 비할 바는 아니다.
위스키는 코를 갖다 대자마자 오크향이 코를 찌르는 수준이라면 아네호는 테킬라 특유의 향과 오크 향이 서로 경쟁하며 코로 다가오는 느낌이다.
미국에 와서 매일같이 이 테킬라를 마시고 있는데 마실 때마다 코로 들어오는 향이 다르게 느껴진다. 어떨 때는 오크 향이, 어떨 때는 테킬라 향이 먼저 들어온다.
테킬라는 특유의 향을 즐기기 위해 얼음이나 물을 넣어서 희석하지 않는 게 정석이라고 한다.
온도도 실온에서 마시는 게 정석이라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는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조금씩 냉기가 식어갈 때 마시는 것을 제일 선호한다.
지금껏 내가 마셔왔던 테킬라의 특징은 특유의 날카로운 달달한 향이 빠르게 목을 찌르고는 점차 코 쪽으로 올라오는 느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처음 마셔본 아네호급 테킬라는 달랐다. 이 녀석은 목과 코를 동시에 공략한다. 처음 목에는 테킬라 향이, 코에는 오크 향이 느껴진다. 그러다가 이 둘이 점차 혼합되어 구분이 사라져 버린다. 입 안에는 적절한 오크 향과 테킬라 향의 밸런스가 느껴진다. 테킬라를 위스키처럼 장기간 오크 통에서 숙성하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더 숙성했다가는 오크 향이 테킬라 특유의 향을 잡아먹었을 것이다. 딱 아슬아슬한 시점에서 꺼내 병입 한 술이 바로 아네호라고 생각한다.
더 정확한 비교를 위해 레포사도급 테킬라와 비교시음을 해보도록 한다. 시음에 사용한 레포사도급 테킬라는 Espolon이라는 브랜드의 테킬라이다. 이 녀석에 대한 자세한 리뷰는 다음에 시간 되면..
아네호도 그렇게 색깔이 깊은 편은 아니지만 레포사도와는 확연히 차이가 나타난다. 레포사도급 테킬라는 마치 꿀물과 비슷한 느낌의 진하기이다.
냄새를 맡아보면 레포사도에서는 오크향이 거의 안 난다. 아예 안 난다고 해도 맞을 것이다. 오크 향 대신 테킬라 향과 더불어 바닐라 향이 난다. 이 향을 맡고 다시 아네호의 향을 맡으면 강렬한 오크 향을 느낄 수 있다.
레포사도를 한 모금 마셨을 때, 굉장한 어색함을 느끼고 말았다.
밍밍하다.
아네호를 마신 직후 마셔보는 레포사도라 그런 것 같다. 향도 맛도 내가 예상했던 테킬라의 강렬한 정도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 테킬라의 특징이 느껴지지 않는다.
내 미각이 마비된 건 아닐까 싶어 다시 아네호를 한 번 마셔봤을 때, 새로운 맛이 느껴져 놀랐다.
그건 매운맛이었다. 혀를 따갑게 자극하고, 코로 올라오는 얼얼함. 애주가들은 스파이시함이라고 보통 표현하더라. 그게 그거지 뭐.
게다가 부드럽고 묵직한 바디감이란 게 느껴졌다.
처음 와인 공부를 할 때, 대체 바디감이란 게 무엇인가 하는 깊은 번뇌에 빠졌었다. 마셔봐야만 알 수 있다는 조언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주면서 말해주던가...
그냥 시간이 지나며 이러저러한 느낌이겠거니 하며 제쳐두고 있었는데, 이번 비교 시음을 통해 바디감의 차이가 무엇인지 조금은 목 넘김으로 깨달은 듯싶다.
목을 통과하는 느낌이 다르다. 레포사도도 충분히 부드럽다. 보드카나 진 같은 술을 마실 땐 이 녀석들이 목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레포사도는 아무 부담 없이 목을 지나간다. 아네호는 한 술 더 떠서 목을 어루만지며 지나간다는 느낌이다.
레포사도와 아네호는 개인 취향에 따라 선호도가 갈릴 테지만 확실히 느낄 수 있는 건 레포사도를 마시다가 아네호를 마실 순 있어도, 아네호를 마시다가 레포사도를 마실 순 없다는 것이다. 풍미의 깊이가 다르다.
비행기 연착으로 인해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한 건 새벽 2시가 넘어서였다.
호텔에 짐을 풀자 출장지에서의 긴장감으로 인한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 몸을 짓누르는 듯했다. 아무래도 카지노에 손을 뻗는 건 무리였다.
짐 정리를 하고 샤워를 하니 새벽 3시. 가방에서 테킬라를 꺼내 책상에 올려두고 의자에 앉았다.
한 잔의 데킬라는 목구멍을 지나 몸을 따뜻하게 데워줬다. 아쉬움에 한 잔을 더 따르며 이것만 마시고 자야겠다고 다짐했다. 내일 여행 일정은 8시부터니까.
나는 애초에 술 마시다 죽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영화에서 벤은 라스베이거스로 떠나기 전 자신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모두 불태운다. 직장도 정리하고 오로지 차 한 대와 돈만 가지고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한다. 나중엔 차마저 팔아 술값으로 사용한다.
나는 한국에 두고 온 게 너무 많았다. 출장 건으로 미국에 왔다가, 주말에 잠깐 짬을 내서 놀러 오곤, 남은 연차일수를 계산하는 내가 어떻게 감히 니콜라스 케이지의 허탈한 눈빛과 말투를 넘볼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라스베이거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