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송비 May 10. 2020

박당근 씨의 어젯밤 이야기

박당근 씨는 중고거래에 심취해 있다. 무언가 필요해서 중고거래 시장을 뒤져보는 게 아니라, 중고거래 매물을 뒤져보다가 마음에 드는 걸 사는 식이었다. 시작은 중고로 싸게 사서 아껴보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중독에 가까웠다. 돈을 아끼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중고거래는 삶에서 자극적인 것을 채워주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많이 하다보니 여러 번 만나게 된 사람도 있다)과 물건과 그것의 가격에 대해 얘기하고, 약속을 정한 다음, 서로의 위치와 생김새, 옷차림 등을 알려주면서 만나서는 물건의 상태에 대해서 대화를 하고, 돈을 건네고, 액수를 확인하고 헤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귀찮지 않았다. 거래를 마치고 오면 어쩐지 즐거웠다. 가끔 이상한 사람을 만나기도 했지만, 위협적인 것은 아니었고, 그래서인지 아주 안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하지만 또 만나고 싶은 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블랙리스트로 등록해두었고, 오랜 기간 해오면서 높은 확률로 걸러낼 수 있는 감각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매일 밤 잠자리에 누워서 중고거래앱에 올라온 매물들을 살펴보는 것이 박 씨의 마지막 일과가 되었다. 어제는 금요일이었고, 한 주의 회사일이 끝나서 기분 좋은 마음으로 침대에 누워 중고거래앱을 열었다. 10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옷을 만났다.

몇 년 전, 친구의 돌잔치(물론 친구가 낳은 아이의 첫 생일 잔치를 말한다)에서 그 옷을 입은 사람을 보았다. 어깨까지 오는 파마 머리에 5:5 가르마를 하고, 화려한 체크 무늬와 무릎까지 오는 길이에 플란넬 셔츠 같은 소재로 된 외투였다. 발목까지 오는 워커와 다리에 쫙 붙는 청바지, 민무늬 하얀색 티셔츠를 받쳐 입고 있었다. 친구 배우자의 친구인 것 같았다. 그때는 ‘친구 분이 힙하네’하면서 옆에 있는 친구와 몇 마디 얘기를 한 게 다였지만, 그날 이후로 계속 그 외투가 생각났다. 그 옷을 산다고 해서 입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궁금하니까 검색을 해봤다. 검색창을 마주하고 나니, 그걸 뭐라고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검색어 끝에 ‘코트’를 붙이면 매우 포멀하고 단정한 옷들만 나왔다. 그 옷은 사실 코트라기 보다는 플란넬 셔츠를 아래로 길게 늘여놓은 것에 가까웠다. 그래서 ‘긴 셔츠’를 검색해봤지만 긴팔 셔츠만 나왔다. 거적때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거적때기’를 넣어서 검색을 해봤지만 역시나 나오지 않았다. 저런 옷을 뭐라고 하지? 옷을 잘 알 것 같은 친구에게 물어봤지만, 그 친구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옷이 있다고? 그런 걸 입어? 거적때기 같다며? 힙스터야? 홍대 가봐, 홍대. 너 홍대 좋아하잖아.

그런데 그 옷과 완전히 똑같진 않지만 비슷한(사실 느낌만 기억하고 있어서 똑같다고 우겨도 아무도 알 수 없는) 옷이 매물로 올라온 것이 아닌가. 5초 고민을 하고 바로 연락을 했다. 저 옷이랑 같이 입을 수 있는 옷이 나한테 있나? 같은 생각을 5초간 했다.

안녕하세요. 제가 살게요. 내일 시간 괜찮으세요? 저는 토요일이니까 아무때나 괜찮아요. 아침 일찍도 괜찮습니다.

> 죄송한데 제가 내일은 일을 나가서요. 혹시 지금은 안 되실까요?

지금 밤 10시가 넘었는데, 뭐야 이 사람, 잡혀가는 거 아니야, 같은 생각을 했지만,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이제 와서 든 생각이지만, “그 옷 뭐라고 검색하면 나와요?”라고 물어봤으면 대답을 해줬을 것 같다. 그렇게 하고 ‘늦어서 안 되겠네요 죄송합니다’ 하고 잤어야 했는데, 박은 이미 옷을 차려 입고 있었다.

저 지금 나가면 30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 여기로 오시게요? 그러시면 5천원 빼드릴게요. 저도 맞춰서 나갈게요. 쿠 편의점 앞에 파라솔에 앉아 있을게요.

감사합니다. 얼른 갈게요!

판매자는 옷을 왜 입지 않고 있다가 팔게 되었는지 구구절절 설명했지만, 그런 얘기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대충 네네 대답을 하고 돈을 입금하고 집으로 호다닥 들어왔다. 들어오는 내내 무슨 옷을 더 사야 이 옷을 입을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했다. 집에 오니 11시 30분이었다.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섰다. 웃음이 나왔다. 드디어 만났는데 이제 이걸 어쩌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씻고 다시 침대에 누워서 중고거래앱을 열었다. 그날 봤던 워커가 딱 맞는 사이즈로 올라와 있었다.

————

거적때기 같은 옷을 샀습니다. 아직도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모르겠을 이 옷.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