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송비 Apr 19. 2020

집에 들어앉아 별일 없이 산다

영화를 보러 너무 나가고 싶은데 가지 않고 있다. 극장에 가는 사람이 줄기도 했고 내가 보는 영화들이 관객 수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가도 괜찮을 것 같긴 하지만, 사람일은 모르는 것이라는 생각에 주말에도 집에 들어 앉아 있다. 월초에 오랜만에 회사 사무실로 출근했다가 점심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나니 갑자기 열이 나서 오후에 회사에서 쫓겨났다(정중히 내보내졌습니다). 2주 뒤에 다시 회사에 가니, 그 날 나에게 뿌리라고 주었던 분무형 소독제가 내 것이 되어 있었다(양이 많아서 도로 가져갈 줄 알았음). 그러고 나니 더 위축되는 것 같다. 나의 공간이라고 생각한 곳에서 추방되고 보니 왜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그렇게 화를 내는지 잘 알 것 같다. 대의를 위해서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래서 밖으로 잘 안 나가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고 있다. 원래 집에 잘 있기도 했지만, 여전히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다. 


<씨네21>에서 송경원 기자님의 글을 보고 나서, 전염병을 다룬 영화를 보기로 했다. 지금의 시대를 가장 잘 예측했다는 <컨테이젼>을 먼저 봤다. 이어서 <감기>, <연가시>를 봤다. 뒤늦게 본 감이 있다. 이 영화들은 2월부터 3월 초까지 인기가 급상승했고, 요즘은 자본주의를 다룬(빅쇼트 같은) 영화들이 차트 역주행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만 그렇긴 하지만 확산세가 누그러든 지금에서야 조금 더 편하게 볼 수 있었다. 확산세가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는 와중에 이런 영화를 보는 것은, 공포에 공포를 더하는 것 뿐이다.


<컨테이전>이 셋 중에선 가장 괜찮은 영화였다. 발병의 원인부터 광범위하게 퍼진 뒤의 모습들까지 대체로 지금의 모습과 가까웠다. 병의 발생을 보여주는 마지막 부분은 사실 동양에 대한 혐오라고 생각하는데, 어쩌다 보니 현실이 그렇게 되어서 앞날을 내다본 영화가 되어 버렸다. 미국에선 코로나 이후 총기 판매량이 급증했다고 하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아 이래서 그렇구나' 싶었다. 한국의 두 영화와의 가장 큰 차이는 가족의 죽음으로 영화가 시작된다는 점이다. 특정한 누군가를 살리는 것에 초점을 두지 않기 때문에 그냥 멀리서 바라볼 수 있었다. 영화의 후반부는 사태가 온전히 해결되진 않았지만 희망적으로 끝나는데, 사실 이렇게 끝날 줄은 몰랐다. 갑자기 끝난 느낌이었다. 옆집 어린이에게 백신을 양보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것 때문에 저 사람이 죽겠구나 했는데, 그건 그냥 휴머니즘을 보여주는 훈훈한 결말일 뿐이었다. 내심 뭔가 더 큰 게 터지길 바랐던 것 같다. 한국 영화처럼.


<감기>와 <연가시>는 K-정서가 극에 달해있다. 시작부터 다르다. 하나는 방금 구조한 사람과 연애를 하네마네 떠드는 구조대원들, 다른 하나는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집에 와서 가족들에게 이유없이 화를 내는 아버지로 시작한다. 위기는 가족들 중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오고, 주인공은 이들을 반드시 '살려야 한다'. 우리 가족만은 반드시 살려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게 주인공이 아니라, 창작자인 것 같은 느낌이 계속 든다. 우리 가족을 살리는 것에만 초점을 맞췄다면 차라리 괜찮았을텐데, 정치인의 위기도 주인공과 같은 수준에서 보여주려고 한다. 가족의 보전과 정치인의 승리, 이 둘을 모두 가져가져가야만 속이 시원했던 것일까.


영화를 보고 나면 '국뽕'이 차오르는데, 현실이 너무나도 영화와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두 영화가 전염병을 대하는 방식은 유사하다. 모두 감염자(로 추정되는 사람)를 한 곳에 몰아넣는다. 감염자 관리 대책은 시시각각 급변하고, 사태를 축소하는 것으로 바깥의 사람들을 안정시키려고 한다. 정치인과 공무원은 대체로 무능하다. 두 영화에 나오는 정치인이 공통으로 하는 말이 있다. "저 안에 있는 사람들만 국민이냐, 바깥에 더 많은 국민이 있다." 이 말은 저 안에 있는 사람은 국민이 아니라는 말과 같다. 사람을 공간으로 구분짓고, 죽어도 되는 사람으로 분류했기 때문이다. 죽어도 되는 국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요새는 약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최근에 만들어진 <킹덤>에도 유사한 태도가 나온다. 정치인들끼리 짜고 산속에 따로 모여 살고 있는 나병 환자들을 좀비로 만들어서 일본군과 싸우게 한다. 나병 환자는 죽은 사람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죽어도 된다는 논리를 펼치고, 그들도 사람은 맞지만 낮은 계급에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이 나머지 사람들을 구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그에 응한다. 하지만 정치인이 사태의 중심에 빠져있을 때는 태도가 달라진다. 주인공인 이창은 사태를 축소할 생각도 없고, 좀비가 창궐한 지역의 사람들을 좀비와 동일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사람과 좀비를 명확히 구분하여서 좀비 무리 안에 있어도 사람이라면 구하려 들고, 아버지라 할지라도 좀비가 되었으면 목을 베어버린다. 결국 어떤 사태를 대하는 정치인의 태도는 그것이 나의 일이라 생각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로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



- <컨테이전>의 아쉬운 점을 굳이 꼽자면 블로거의 영향력을 너무나 크게 평가했다는 것이다.

- <감기>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영화의 신 김성수 감독의 작품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것이다. ㅜㅜ

- <연가시>는 김명민이 전공을 살려 가족을 구할 줄 알았다.

- <감기>와 <연가시>가 참고할 만한 건 신종 플루 사태뿐이었을 것이고... 음...

- <킹덤> 짱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