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X디자이너에서 개발자로 커리어 체인지
저는 예전부터 생각했습니다.
나는 왜 이러고 살까?
30대가 되고 나서야 어느 정도는 스스로의 성격,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향점들을 조금이나마 깨닫는 중인데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제가 한번 결정한 게 있으면 아무도 못 말리는 도파민중독자라는 점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예전부터 개인적으로 작게나마 목표한 걸 이루어냈다는 성취감이 저한텐 가장 큰 기쁨 중에 하나였고, 그 성취들이 모여서 알게 모르게 남 눈치도 많이 보고 소심한 성격이었던 저를 지금처럼 단단하고 크게 바꿔놓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 피곤해도 계속 이렇게 살기로 했습니다. 왜?
삶을 윤택하게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가 자아실현이라고 생각하는데, 도전을 거듭할수록 이 자아실현을 내 방식대로 이루기 위한 더 명확한 목표가 세워지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회복 탄력성이 생기기 때문에 보통은 쉽게 생각하지 못하는 일들에 망설임 없이 도전하면서 그 과정을 즐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여정이 멀고 먼 산행길을 떠나는 것과 같다고 느낍니다.
해발고도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몸은 무거워지고 숨이 가빠지고 시야도 좁아지지만, 곧 정상에서의 경치를 볼 수 있다는 고양감이 들죠. 그 기쁨이 아주 잠시 혹은 잠깐에 머물더라도,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기쁨인걸 알기에 힘든 걸 알면서도 계속 올라가게 되는 겁니다. 좋은 경치를 보고 내려오는 길에는 항상 이런 후회를 합니다. 왜 나중에 무릎 아플걸 알면서도 그렇게 높이 올라갔을까? 이렇게 살다 보면 온몸이 너덜너덜 해진 것 같고 체력적으로는 손해를 본 것 같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을 거예요. 이 경험이 내가 아직 겪어보지 못한 멋진 경험들을 자력처럼 끌고 오거든요,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안전지대. 가끔은 이런 안전지대에서 벗어나보는 경험을 해보면 좋아요.
그곳에서 무조건적으로는 아니더라도 가끔 기적처럼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거든요. 30년 이상을 도파민 중독자로 살아온 제가 자부합니다. 안전지대를 벗어난다고 경제적으로나 체력적으로 손해 보는 게 아니에요, 그저 아직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영역에서 알지 못하는 기쁨을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에요.
꼬꼬마시절부터 화가가 되는 게 장래희망이었던 저는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기 전에 서울시 미술영재출신으로 SADI에 합격했습니다. 최연소합격이었죠, SADI를 다니느라 고등학교 졸업식도 못 갔는걸요.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현실적인 문제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저는 미래에 대한 명확한 비전이 없는 상태였고 고졸로 평생 살 자신이 없었어요. 지금 당장은 그래, 좋아하는 걸 맘껏 하는 건 좋은데, 내가 이걸 평생 좋아하면서 살 수 있을까..? 이 분야에서 나오게 된다면 그때 맞닥뜨릴 취업문제와 사회인식은 어떻고? 고민 끝에 SADI를 자퇴하고, 1년의 재수를 거쳐 4년제 미술대학 시각디자인학과를 들어가게 됩니다.
여기서 저는 한번 더 절망하게 됩니다.
디자인공부가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재밌지 않았거든요.
대학 동기들이 열심히 대외활동과 인턴을 나가는 동안 저는 바보같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절망해 있었어요. 그래, 이왕 이렇게 4년을 낭비한 거 일단은 성적이라도 잘 챙겨서 졸업장이라도 따고 생각해 보자. 그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제 인생에 점수를 매긴다면 벌써부터 마이너스점수가 생겼다고 생각했어요.
과에서 제일 디자인을 잘하던 친구와 친했는데, 딱 한번 교수님한테 그 친구가 칭찬받을 때 같이 칭찬을 들은 적이 있었어요. 제 작업물을 보면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해 보인다고요. 정말 웃기게도 디자인을 잘했다고 칭찬받은 것도 아닌데, 제가 평소에 대단하고 느끼던 친구와 같이 들은 그 칭찬 때문에 나도 무엇인가 다른 영역에서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때 제 인생이 여태 마이너스점수라고 쭉 생각했던 것도 웃기다고 느꼈습니다. 아직 저는 다른 분야에선 아무것도 시작을 안 했잖아요? 새로 시작하는 건 무조건 0부터 시작이죠. 저는 그때 제 인생의 총점이 마이너스였든 0점이었든 제게 줄 점수를 따는 게 필요했어요. 그래서 UXUI 독학을 시작했습니다. 그 시기엔 아직 UXUI가 이제 막 떠오르는 신생분야이자 포지션이 덜 만들어져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운 좋게도 제 인생 첫 직장이 대기업이었습니다.
처음엔 정말 신나 있었어요. 독학으로 쟁취해 얻은 결과이기 때문에 기뻤고 비록 단기 인턴이었더라도 제 인생 최대 성취였죠. 금방 무엇이든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에 차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만이었죠.
스스로 성취점을 높게 잡아서 매일 원하는 수준의 결과를 만들어야 했고 더 잘하고 싶어서 욕심을 냈는데 그 욕심이 과해서 몸이 망가질정도였고, 정작 그만큼 노력했다는 것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미숙해서 어떻게 해야 제대로 하는 건지도 모르고 무식하게 노력만 하는데 그걸 칭찬해 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근데, 그 모습을 보고 안타깝게 생각하신 분이 한분 계셨어요.
저희 팀 수석연구원님이 힘들어하는 제 모습을 보고 중요한 회의도 데려가주시고 연구 보조도 시켜주셨거든요. 이 기회도 제 필사적인 노력을 보고 찾아온 기회라고 생각하고 옆에서 정말 열심히 배우고 집에 돌아가서도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악관절이 생기고, 피부에 염증이 생기고 몸에 이상증상이 하나 둘 나타날 때쯤 일을 쉬기로 결정하고 대학원 준비를 결정했어요. 대학원을 입학할 때 수석연구원님의 추천서가 들어갔고요.
전공을 정할 때도, 테크업계에서 계속 일하려면 아직 제가 알지 못하는 다른 분야도 파고들게 많다고 느껴서 User research, Data science, Software engineering이 복합된 분야인 Human-computer interaction 전공을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려던 학교는 학사를 Data science나 Computer science 중 하나로 나와야 하는 게 필수 조건이었고, 만약 학사를 이 둘 중에 안 나왔으면 그에 필적하는 경험이나 학력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6개월 동안 국비지원프로그램을 지원해 자바공부를 하면서 자격증까지 따고, 대학원 준비를 병행했어요.
그 과정이 정말 쉽지 않았고 지금 와서 다시 하라 그러면 망설여질정도로 힘들었지만,
스스로를 마이너스 인생이라고 생각했던 제가,
기적처럼 영국 top7 명문대중 하나인 University of Bath의 HCI 석사과정에 합격했습니다.
비전공자 출신으로 CS학사학위가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석사과정을 따라가기는 정말 벅찼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성숙된 절망감을 바탕으로 절대 쉽게 포기하지 않았어요. 절망에도 질이 있다는 걸 깨달은 건 대학원 생활 때였죠. 공학 논문을 3개 중 하나로 골라 읽어오라고 하면 남들보다 영어도 부족하고 전공기초지식도 부족하니까 3개를 다 읽어왔고, 짧은 영어로도 발표시켜 달라고 적극적으로 나서고, 디자인 베이스가 없는 팀원들을 위해 평가 점수를 주지 않더라도 서비스기획과 UI디자인은 도맡아서 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Software Engineering과 관련된 모든 과목에서 Merit degree 이상을 받았어요. 영국은 특이하게 교수 재량에 따라 First class 즉 점수를 가장 많이 주고 싶은 학생을 정원 내 몇 명으로 줄 세워두지 않거든요. First class 기준이 70점인데, 교수 재량에 따라 아예 안 줄 수도 있어서 성적으로 받을 수 있는 최고점이 Merit인데도 first class 점수를 훨씬 넘은 80점도 받아봤습니다.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처음에는 죽자 살자 공부했는데 나중에는 동기들이 프로그래밍 어디서 따로 배웠냐고 물어볼 정도로 잘 따라가서 저도 스스로에게 놀랐어요. 대학원을 Merit degree로 우수졸업하면서 나도 무엇인가 다른 영역에서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 결론이 프로그래밍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프로그래밍이라는 분야로 결과를 낼 수 있게 도와준 기반이 바로 UXUI디자인을 할 수 있는 역량이었죠.
글의 길이에서 보이듯 이런 고난과 역경(?)을 통해 얻은 독보적인 성취가 저한테 하나 있습니다.
개발자이자 UX engineer로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테크업계에 종사하면서 사용자와 가장 먼저 맞닿는 interface를 고민하고, 결과물로 이끄는 일을 하게 되겠죠. 저는 아무래도 중증 도파민중독자입니다. 앞으로도 제가 도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테크업계에서 종사하면서 시도해 볼 거예요. 이 선택을 하는 것에서만큼은 어떠한 망설임도 없었습니다. 결과를 생각하기 이전에 과정 자체를 즐길 수 있게 되었거든요.
이렇게 살다 보면 온몸이 너덜너덜 해진 것 같고 체력적으로는 손해를 본 것 같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을 거예요. 이 경험이 내가 아직 겪어보지 못한 멋진 경험들을 자력처럼 끌고 오거든요,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