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소중한 분을 통해 영혼의 주모님의 시집이 올 가을에 내게 왔다. 아주 오랫동안 익숙했던 구절이었지만 2024년 가을에 마주한 문장의 깊이는 달랐다.
난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관계를 맺어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 부재까지도 받아들인다는 뜻임을 아는 내가 되어버렸다. 이별까지도 품겠다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 사랑이다. 그러니 상처받은 적 없는 것 처럼 사랑하라는 저 구절은 준비없는 죽음으로 사랑이 끝나버린 내겐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이야기와 다름이 없다.
‘적당한 때에 적당히 헤어지는 것’이란 표현을 <해리에게>라는 드라마에서 들었다. 세상 살면서 난이도가 최상급의 기술이 아닐까.
어제 딸의 생일 날, 뉴질랜드어로 천사라는 뜻을 가진 딸의 친구 엄마가 아이를 낳고 기르느라 고생했다며 서프라이즈 꽃다발을 선물해주셨다. 두터운 친분이 있던 사이도 아니었기에 예상치 못한 마음은 큰 감동이었고 결국 눈물이 흘렀다. 다른 이가 준 꽃다발도 내겐 하늘에서 보낸 선물같이 느껴진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듯 사랑은 있었고, 있고, 있을 것이다. 슬픔과 그리움과 미안함과 고마움과 감동이 뒤범벅되어 내 삶에 계속 함께할 것이다.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는 것은 기억상실증에 걸리면 가능할까. 모든 사람을 하나로 인식하면 가능할까. 완전히 지금, 이 순간만 살면 가능할까. 도대체 얼마만큼의 용기가 있으면 한번도 상처받은 적이 없는 것 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이별은 다시 할 자신이 없는 걸…
내게 영혼의 주모님의 주문은 도저히 가늠이 안되는 용기가 필요한 일 같다. 언젠가 그 용기를 가질 수 있는 날을 꿈이라도 꿔보며 이제 진짜 꿈나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