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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멩이 Jun 05. 2017

그들에게 쿠바를!

쿠바에서 나는 실망했다.

 이천십칠 년 오 월 어느 날. 나는 쿠바에 갔다. 여행의 일부였다. 물-덕인 나는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서 푹푹 찌는 날씨를 잘 이겨내고 있었다. 그곳과 쿠바는 매우 가깝고, 쿠바로 가는 비행기 삯도 좋았다. 모든 게 완벽한 그때 나는 쿠바로 갔다.


불편한 쿠바


 쿠바는 참 불편했다. 슈퍼마켓이 제일 그랬다. 쿠바의 슈퍼마켓엔 다양한 물건이 없다. 생수(그 물엔 ‘쿠바 1등’이라 적혀있다. 쿠바엔 생수 회사가 하난 것 같았다), 두어 종류의 맥주, 탄산류, 탄산보다 저렴한 럼, 낱개로 파는 사탕과 과자 몇 종류가 전부다. 어쩌다 가끔 더 다양한 물건이 있는 곳을 만나게 된다면(그래 봤자 보통 편의점 몇 백분의 일도 안 되는 그곳이) 엄청 호화롭다고 느껴졌다.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슈퍼

 그리고 쿠바에는 두 가지의 통화가 있다. 현재 통합하는 중이지만, 서로 다른 두 개의 통화는 각각 외국인용 그리고 내국인용으로 쓰였다. 그 두 통화는 무려 스물다섯 배의 가치 차이가 있는데, 문제는 두 통화가 달러와 센트처럼 유기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외국인용 통화로 가격을 표시한 식당과 내국인용 통화로 표시한 곳의 물가 차이는 엄청나다. 가령 내가 먹은 보통의 식사 가격과 망고 10개의 가격 혹은 현지인이 타는 대중교통을 120번 탈 수 있는 가격이 비슷했다. 이해하려야 이해할 수가 없는 가격 체계였다. ‘상식’이 되어버린 자본주의 논리로는 애초에 이해가 불가능해 보였다.

 또 쿠바는 현금 사회다. 지갑에 천 원짜리 한 장 없어도 빳빳한 카드 하나 있으면 마음 편한 2017년이다. 하지만 쿠바에서 나는 카드 결제가 되는 곳을 딱 한 번 봤다. 쿠바에서는 인터넷도 자유롭지 않다. ‘와이파이 카드’라는 걸 돈 주고 사야 했고, 정해진 장소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사실 이런 불편함에 대하여 귀가 따갑게 듣고 갔다. 하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것이 ‘행복한 불편함’ 일 거라 생각했다. 내 상상 속에서 쿠바는 원더랜드였고, 에덴의 동산이었고, 신선이 바둑 두는 구름 위였다.



 쿠바가 그렇게 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사회주의 혁명 당시 쿠바엔 미국 자본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맑스-레닌 주의의 피델 카스트로 정권은 미국 자본을 국유화했다. 자본주의는 공산주의 사회의 ‘악’이었다. 자본력으로 쿠바 내 영향력을 키우던 미국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마침내 1961년 쿠바는 미국과의 국교를 단절한다. 그리고 소련과의 무역을 늘렸다.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미-소 냉전시대라는 배경 아래 쿠바와 소련이 친해졌다. 미국은 그게 너무너무 싫었나 보다. 쿠바에 대한 미국의 강력한 금수조치가 시작됐다. 대사관을 닫고, 양국 간의 경제 교류를 금지했다. 미국인의 쿠바 여행도 함께 금지됐다. 쿠바와 수교하는 다른 나라들을 강하게 압박했다. 심지어 미국으로 망명한 쿠바인을 이용해 쿠바를 무력 침공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91년, 소련이 해체됐다. 쿠바를 지원하던 가장 큰 나라가 없어져 버렸다. 하지만 미국의 대쿠바 금수조치는 여전했고, 때문에 쿠바에서의 삶은 빠르게 나빠졌다. 생필품이 넉넉하지 않았고, 화폐 가치는 곤두박질쳤다. 수입되던 공산품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고, 있다고 하더라고 말도 안 되게 비싸졌다. 당시 쿠바에서 삶의 질을 기대하는 것은 망상에 가까웠다고 한다. 현재 쿠바 정부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그곳에서의 삶은 어렵다.


‘원더랜드’, 쿠바


 그런 쿠바는 내게 오래도록 동경의 대상이었다. 이야기는 2004년 정도로 돌아간다. 멋모르고 히죽히죽거리던 중학생 시절, (나만) ‘정신적 지주’로 부르던 선배가 있었다. 그가 내게 처음으로 ‘신기한’ 쿠바의 모습을 말해줬다. 그곳엔 통화가 두 개가 있어서, 가령 쿠바인에게 커피가 10원이라면 외국인에게는 2,500원이라는 것이었다(현재는 몇몇 박물관에서나 이렇다). 나는 자본주의 밖에 모르는 흔한 PK의 중학생이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공산주의잖아”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그는 “공산품 수입이 잘 안 돼서 길거리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1950년대의 올드카가 돌아다닌대. 쿠바를 여행하는 건 마치 시간을 여행하는 걸 거야”라고 무뚝뚝하게 덧붙였다. 열네 살에게 ‘동경’,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말을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그 날 이후 쿠바를 잊어본 적이 없었다. 1950년이 새 천년에 존재한다는 건 정말이지 환상이었다. 1950년대면 한국전쟁이 있었고, 그 ‘위대한’ 한강의 기적이 있기 전이고, 인터넷도 편의점도 비틀즈도 없었다. 하지만 황금기는 항상 과거에 있고, 사람은 언제나 과거를 동경한다고 했던가. 내가 속세에 찌들어 그렇지 1950년의 사람은 불편하지 않게 아니 불편함을 모르고 잘 살았을 거라 생각했다. 지금보다 더 행복했던 때라 생각했다. 다시 말해 쿠바에서 느낄 수 있는 ‘2017년엔 있고 1950년에는 없는 것들’은 ‘행복한 불편함’ 일 거라 생각했다. 쿠바에 꼭 가보리라 다짐했고 한 번도 잊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대학생이란 직업이 ‘주어졌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그린 이들의 아름다웠던 이상을 공부했다. (판사님. 김정일 개새끼입니다.) 1991년에 태어난 나는 공산주의를 볼 기회가 없었다. 그해엔 이미 구 소련이 위기를 겪고 있었다. 걸음마를 시작도 못했던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됐다. 공산주의는 너무 늦게 태어난 내게 그 모습을 허락하지 않았다. PK 출신인 나에게 북한은 ‘절대 악’이었고, 중국은 이상한 자본주의 국가로 보였다. 내게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은 쿠바에만 있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좋은 교육과 의료 체계를 갖고 있는, 잉여가 없어도 행복하게 잘 사는 그런 잘-돌아가는 국가를 상상했다. 그렇게 나는 쿠바를 그렸다.



텅텅 빈 공산주의


 직접 본 쿠바는 사실 예상과 일치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많이 변했다고 하지만 들었던 것은 여전히 존재했다. 하지만 나는 크게 실망했다. 공산주의는 슈퍼마켓에만 남아있었다. 몇 가지 안 되는 품목만 있고, 그마저도 양이 충분한 곳은 드물었다. 필요에 따라 분배(라고 볼 수는 없지만)한다는 공산주의 원칙이 지켜지고 있는 곳이었다.


 공산주의가 떠난 자리에는 생경한 형태의 자본주의가 채워져 있었다. 모든 경제가 화폐에 따라 형성되고 유지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자본주의였다. 하지만 가치가 달라도 너무 다른 두 통화가 위태로운 동거를 하고 있어서 그것을 시장경제라 부르기 어려웠다. 쿠바엔 가치에 따라 결정되는 가격이 아니라 기회에 따라 결정되는 가격이 있다. 비싸게 팔 기회가 있는 사람은 비싼 가격에,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저렴한 가격에 물건을 판다. 그 비싸고 저렴함의 차이가 천상과 지하의 차이와 같으니, 상상도 못했던 빈부격차와 탐욕이 자랐다. 한 친구는 인구의 반이 삐끼 아니냐고 장난 섞인 말을 했다.


 그리고 그곳엔 독재가 있었다. 쿠바 혁명을 이끌었던 피델 카스트로의 이야기이다. 그는 혁명 후 집권하여 40년 이상 독재정권을 이끌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는 편이다. 그는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정책이 쿠바에게 도움되는 방향이었다는 평가가 존재한다. 동시에 그는 많은 지식인, 정적(政敵)을 죽이거나 탄압하기도 했다. 실제로 쿠바 언론은 ‘언론’이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다. 인민의 나라이지만 모두가 인민은 아니다. 북쪽의 김 씨 가문, 스탈린과는 결이 달라서 ‘그만큼’ 욕하긴 어렵지만, 피델 역시 쿠바의 ‘최선’이라 부르기는 힘들다. 40년은 강산이 세 번 변하고도 한 번 더 변할 시간이다. 그가 내려간 지 10년이 되어가지만 아직 변한 건 별로 없다.



 쿠바는 그런 곳이었다. 잘-돌아가는 공산주의는 쿠바에 없었다. 공산주의인 ‘척’하는 놈들은 욕심을 부렸다. 그리고 그를 쳐다보는 민주-자본주의 놈들은 일그러진 영웅 행세를 해왔다. 겉은 멀쩡하지만 속엔 온갖 부정적 단어가 가득 찬 쿠바식 공산주의가 있었다. 꿈을 꾸었던, 꿈꾸는 자를 사랑했던 사람들만 상처받고 아파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저 힘들었다. 왜 힘든 지 잘 모르는 듯했다. 세상의 온갖 더러운 욕망이 투영되어 얼굴에서 말에서 드러났다.

 실망한 나는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마음이 아픈 건 나의 실망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구름 위의 허울에 있었다. 그건 나의 잘못이었다. 그곳에 있는 2주 동안 왜 마음이 아픈지 생각했다. 그리고 2주 후 돌아온 대답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였다.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들은 힘들게 산다. 2017년의 지구에서 혼자 1950년을 산다. 하지만 2017년은 스멀스멀 흘러들고 있다. 멕시코 칸쿤 공항의 아바나행 비행기 체크인 게이트는 마치 피난길 같았다. 2017년이 아바나로 가고 있었다. 틈입을 허락한 1950년은 더 힘들어지고 있었다. 천장은 높아졌고, 남의 떡은 더욱 커졌다.

 쿠바의 달력을 1950년에서 멈추게 만든 놈은 누구일까. 그건 쿠바가 아니다. 미국이고, 자본주의고, 민주주의 국가였다. 공산주의가 이상에 가득 차 실패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인간 본연의 욕망을 고려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하지만 쿠바의 공산주의가 허울이라서 부패하고, 힘든 삶을 만들어내진 않았다.

 그들은 그저 희생양이었다. 여기서 그들은 쿠바의 꿈꾸는 사람이다. 사회주의 혁명에 열광했고, 아직도 식탁 머리에 혁명 영웅의 사진을 걸어 두는 그들 말이다. 광장에 모였고 꿈을 소리쳤던 그 사람 말이다. 그들이 잘못한 건 없다. 절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들의 잘못이 아니고, 그들이 꾼 꿈 혹은 체제의 잘못도 아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은 사람, 욕망과 탐욕에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무언가의 잘못이었다. 공산주의가 싫은 자본주의의 심술궂은 장난질이었다. 공산주의를 민주주의의 반대말로 오해한 사람들의 잘못이었다. 또 공산주의란 가면을 쓴 독재의 잘못이었다.


 나는 실망했다. 그렸던 모습은 포장지였다.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몰랐다. 포장지는 밖에서 찢는다. 포장지를 찢고 그 속으로 갔다. 무언가 있었다. 더럽지만 더럽-혀진 것이었다.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의 한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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