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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멩이 Jul 05. 2017

여행하다 만난 양아치

조금만 더 부끄러워해봐요.

 멕시코 유카탄의 어느 호스텔. 늦게 지는 해가 떨어지고 있을 즈음, 남미의 한 나라에서 왔다는 한 남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는 영어를 못하고, 나는 스페인어를 못하고. 그래서 그는 몸짓을 했다. 같은 방 다른 침대, 방금 들어온 여성이 짐만 풀고 나간 그 침대를 가리키며 말이다. 그는 열심히 엉덩이를 앞뒤로 흔들었다. 한쪽 손을 앞으로 쭉 뻗은 채 말이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너무 명확했다.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의 욕망은 정확하고 군더더기 없이 표출되었고, 그 방에 있던 나와 다른 한 사람의 눈을 통해 퍼졌다. 무방비 상태에서 숨 쉴 시간도 없이 당했다. 구역질이 났다. 30초라면 길 시간에 그는 그녀를 봤고, 욕망을 느꼈다. 그리고 빠르게 표출했다. 찡그려 화답했다. 모르는 것 같았다. 앞의 동양인이 왜 웃는 얼굴에 찡그리고 있는지 어리둥절해하지도 않았다. 조금 어색해진 웃음을 다시 보여줄 뿐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는 알았다. 말을 언제 해야 하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그 여성이 나간 후에 그는 몸짓을 하고 말을 했다. '부끄러운 줄'아는 사람이다. 그러면 뭐하나 싶어도 알았던 것 같다. 아마 경험적 학습에 의한 후천적 본능 같은 게 작동했을 거다. 의식보다는 무의식의 영역에 있어서 인지하기 힘들었을 거다. 그는 그 행동을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했고, 아무렇지 않게 이름도 모르는 나에게 했다.


세상에 양아치는 많았다


 한 열흘 정도를 함께 여행했던 친구가 있다. 처음 만난 그는 참 인상이 좋았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사실 나이에 걸맞은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니 나이 때의 평균적이고, 관념적이고, 전통적인 성향 등을 말하는 걸로 하자) 순수한 미소를 갖고 있었다. 또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영화, 소설, 노래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그 이야기를 할 때면 그 속에 있는 듯했다. 참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조금 친해졌다고 생각될 무렵부터 '불편함-폭행'이 시작되었다. 그는 눈 앞에 지나가는 모든 여성을 흘겨보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꽤 자주 나에게 "look at her. she's hot"이라고 말했다. 장난 안 치고 하루에 서너 번은 들었다. 그때마다 어색한 미소를 짓거나 무시했지만 그 역시 몰랐다. 내가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말이다. 역시 어리둥절하지도 않았고, 눈치채고 말을 아끼지도 않았다.


 또 다른 양아치도 있었다. 대한민국의 10개년 국민 공통 기본 교육과정이 나에게 '바다색'이라 알려주지 않은, 에메랄드 색이라고 불리는 녹주색 바닷가에 누워있을 때였다. 돈 많은 아시아인 역할을 하고 싶었던 나는 썬베드도 빌렸고 과카몰리와 맥주 한 병도 시켰다. 모든 게 완벽한 날이었다. 하지만 내 바로 옆 미국놈들(인지 모르지만 유창한 미국식 영어로 말하는 놈들)이 산통을 깼다. 옆에서 자꾸 이야기가 들려왔다. 역시 "Look at her, she's so hot", "Oh my god, check her botties out", "I wanna fuck her"과 같은 말들. 세 시간을 넘게 들었다. 내가 그를 제지하거나, 자리를 옮길 용기는 썬베드에 투자한 200페소-대략 만 이 천 원 정도-보다 작았고 옹졸했다. 산통이 깨진 완벽한 바다는 뻘이 가득 찬 낙동강보다 못해 보였다. 그 시키들 때문에 그 해변은 최악의 해변 리스트에 올랐다. '내가 미국인이다'는 어조의 우렁찬 목소리로 떠들던 그들 역시 별 죄의식이나 부끄러움은 없어 보였다.


무엇이 양아치를 만드나


 양아치는 정말 정말 많았다. 발에 치이게 만났고 숨이 막히게 역겨웠다. 그리고 대부분은 자신이 잘못하는 줄도 모르는 듯했다.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들은 왜 잘못하는 줄 모를까 하는 생각이 오래도록 머리에 있었다. 아는 것 같으면서도 모르는, 낙타 발에 양말을 신겨놓은 듯한 이상함이었다. 그리고 몇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아마(?) 그럴 거라 생각했다.


 우선 그들은 그들의 성욕이 당연한 것 혹은 주어진 것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본능'대로 행동할 뿐이었다. 우리가 흔히 자주 듣는 말 중에 "본능인데 어떡해", "본능을 참는 게 얼마나 어려운 지 알아?"와 그 결을 같이 한다. 그들은 성욕이 흙에서 풀나고 바다에서 파도치는 일처럼 너무나 당연해서 거부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나는 우리의 성욕은 우리가 만들어간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회적으로 거칠 것 없이 받아들여진 성욕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 사회 속에서 우리의 성욕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어떤 고민이 필요한지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성장한다. 단지 "본능이잖아"로 포장할 수 없는 공간이 너무 크다.


 한국 남성이라고 크게 다를 바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왜 유독 한국에서는 (특히 오프라인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양아치들이 해외에선 자주 눈에 띄는지 궁금했다. 어쩜 비슷한 답을 하나 찾은 것 같기도 하다. 바로 'Outgoing'의 남용이다. 사전에서 정의하길 outgoing은 'friendly and socialy confident'라고 한다. 친근하고 사회적으로 자신감이 있다는 뜻. Outgoing 한 성격은 주로 긍정적으로 해석된다. 다른 말로 그는 '좋은' 사람이라 여겨진다. 많은 사람이 'outgoing'하기 위해 노력했을 거다. 그리고 그 outgoing이 (주로) 남성에게서 남용되었다.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 그것도 거침없이 드러내는 것이 '좋은' 성격이 되는 과정 중 하나가 됐다. 말 그대로 남용이다. 그것은 폭력이고 이런 식으로 드러나면 안 되는 일이었다. 남용된 outgoing에는 폭력이 남았다.


조금 더 부끄러워하기


 그런데 여기엔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본능'을 '무의식'이라 받아들이는 사람이, 대상이 없는 장소에서 말하고 행동했다는 점이다.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무언가 대놓고 하면 안 되는 일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본능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은 실재한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이런 얘기는 증명하기도 전에 익숙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들을 이렇게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정도로 당연하다 생각하진 않는 사람'이라고. 다시 말해 자신의 본능이 잘못되었다는 생각도 존재하지 않고, 그렇다고 그것을 쉽게 내비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양립하는 상태 말이다. 


 여기서 해결을 조금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조금만 더 부끄러워하기이다. 왜 부끄러워하는지, 왜 이런 행동은 말의 대상 앞에서 하면 안 되는지 조금만 더 부끄러워해보는 것이다. 조금 더 부끄러워하면 조금 더 생각하게 될 것이고, 그곳에서 잘못된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리고 정말 잘못이라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할 이유가 없어질 것이다. 그렇게 남성의 시선에서 여성을 제단하고 판단하고 등급 매길 때, 그것은 폭력이라는 것을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라 믿는다. 조금만 더 부끄러워해본다면 말이다.


+나의 부끄러움


 스스로 부끄러울 때가 있다. 아니 많다. 이미 몸에 들어온 문화와 사상, 그리고 권력에 대한 인지능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남자고, 나도 모르게 내가 누리거나, 공격하거나, 피해 주는 일이 많다. 이민국 직원 앞의 홍세화 씨가 이렇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아치들을 만났을 때 그들을 양아치라 생각했고 불편했다. 하지만 큰 일을 하진 못했다. 계속되는 그들의 이야기에 간혹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질문에 어중뜨게 답하기도 했다. 그런 내가 부끄럽다. 그리고 싫다. 앞으로 만날 양아치들에겐 그러지 않을 거라 다짐해본다. 조금 더 불편하게, 치열하게, 세세하게 느끼려 노력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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