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돌멩이 Jul 05. 2017

공감

'섬' 밖에서 찾은 세월호

 3월 29일. 서울을 떠났다. 6개월이라고 얘기했지만, 더 길어질지 짧아질지 모른다. 그저 걷다 보면 적당한 때에 적당한 곳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3월 22일



 3월 22일. 시카고행 비행기를 타기 딱 일주일 전. 학교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 사장님이 몹시 친절하신 가게에서 보쌈을 먹고 있었다. 한 여덟 시 정도였나, 세월호를 인양한다는 연합뉴스의 1보 기사가 떴다. 1보답게 "세월호 본체 인양 시도"라는 제목만 적혀 있어 잠깐 헷갈리기도 했다. 사실 헷갈리고 말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뉴스가 눈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가슴이 먹먹한 게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날, 밤새워 뉴스를 봤고, 술을 들이부었다. 가만히 있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사나흘 정도가 지나자 세월호는 물 위로 올라왔다. 1,074일 만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비행기에 올랐다.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 일주일은 지옥과 가까웠던 게 분명하다. 갑자기 찾아온 울증은 끝을 모르게 나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여행이, 떠나감이 일주일도 안 남은 사람의 모습을 나는 갖지 못했다. 한숨 때문에 곧이라도 땅이 꺼질 것 같았다. 불편함을 느끼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지만, 그 다가올 불편함이 너무 거대하게 느껴졌다. 공릉동 편한 집을 두고 왜 시카고로, 멕시코로 가려고 하는지 후회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말 마음이 이상했다. 두고 떠나면 안 되는 것들이 내게 있는 것만 같았다.

 도쿄를 거쳐 시카고로 가는 15시간을 나는 잠만 잤다. 자는 게 제일 기분 좋은 일이었다. 배와 함께 4월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게 편하지 않은 마음으로 떠나왔다. 여전히 손목엔 'REMEMBER 20140416'이라고 적힌 팔찌가, 가방엔 노란 리본이 있었다. 배경만 달라졌다. 


9/11


 시카고에서 묵었던 Airbnb는 라이베리아에서 온 흑인 남성과 멕시코에서 온 히스패닉 여성이 주인이었다. 그들은 모두 미국 시민권자가 아니었다. '그린카드'라고 불리는 영주권 비슷한 게 있다고 했다. 아니 내가 그렇게 이해했다. 어느 날 밤, 서로 다른 세 개의 국적을 가진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담배 연기에 섞여 들었다.

 그중 가장 강하게 섞여서, 걸쳤던 티셔츠에 가장 오래도록 남은 이야기는 9/11 테러에 대한 이야기였다. 백인도 미국인도 아닌 그중 한 명은 "내가 왜 9/11을 슬퍼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인이 아프리카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아?", "아프리카에서는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 줄 알아?"라고 덧붙였다. 그는 9/11에 대해 미안하다고 느끼지만, 그게 그렇게 큰 일인지 국가적 슬픔인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했다. 동의하진 않았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다. 가령 세월호 이야기를 할 때 천안함 이야기를 한다든지 말이다.


43


 2014년 11월 멕시코 시티에 큰 집회가 있었다. 1968년에 있었던 'Tlateloco 대학살'을 기억하기 위한 집회였다. 한 대학에서 집회를 위해 멕시코 시티로 오던 대학생 43명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 이후 멕시코 시티의 가장 큰 번화가 Reforma길 한 복판에는 집회 천막이 들어섰다. 


'43명은 어디에 있나'라고 적혀있다. (출처:BBC)


 이 이야기를 멕시코에 와서 처음 들었다. 전혀 모르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어느 토요일 오후 나는 그 천막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유창한 영어로 한 사람이 내게 다가와서 필요한 게 있냐고 물었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다고 답했다. 그는 들어오라 권했고, 그곳에서 나는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야기의 요지는 이렇다. 누군가 43명의 학생을 납치하고 죽이는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2년 반이 지난 지금도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은 왜 죽어야 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세월호가 겹쳤다. 정부의 조사가 이뤄졌지만, 아직도 아는 게 없다고 그는 말했다. 그곳에서 나는,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공감


 다시 시카고로 돌아가자. 9/11에 왜 슬퍼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이야기에 난 동의하지 못했다. 나는 미국인도 아니고, 미국 사회에 살지도 않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 중 지인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9/11에 경악했고, 함께 슬펐다. 나는 아직도 슬프다. 그 이야기를 듣던 다른 호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It's about the sympathy". 맞다, 공감이다. 인종, 국적, 문화를 초월한 공감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 공감이 멕시코 시티의 집회 천막에서 내가 눈물 흘린 이유일 것이다. 무고한 누군가가 죽어야 했다는 것을 들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일 중 하나이다. 공감하고 분개하는 일 말이다.


 2017년 4월 16일 나는 멕시코 시티에 있었다. 그날은 왠지 술을 마실 수 없었다. 그 날 나는 호스텔 루프탑에 앉아 저 멀리 반짝이는 불빛을 보고 있었다. 오다가다 얼굴을 익힌 친구가 내게 왜 술을 마시지 않냐고 물었다. 그냥 술을 마실 기분이 아니라 답했다. 왜 그럴 기분이 아니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세월호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그가 술잔을 내려뒀다. 자기도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했다. 공감이었다. 인종도 국적도 문화도 다른 그가 5분도 안 되는 시간에 세월호에 공감했다. 자신과 관련은 없지만 적어도 오늘만은 술 마시길 그만두겠다 내게 말했다.


'섬' 밖에서 찾은 세월호


 그렇게 '남한'이라는 '섬' 밖에서 세월호를 찾았다. 받아들이기 힘든 아픈 이야기를 찾았고, 그리고 그를 향한 공감도 찾았다. 그 모든 이야기들이 무섭도록 세월호와 닮아 있었다. 그를 이용하는 사람도 있었고, 무관심한 사람도 있었다. 슬펐다. 여러 욕심과 이기심에 변질되고 이용당하는 모습이 슬펐다. 분개할 수밖에 없었다. 앞서 말한 이야기 말고도 수없이 많은 일이 있었고 일어나고 있다. 정부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자 반항으로 시민을 무작위로 죽여버린 카르텔도 있고, 대륙 전체에 새겨진 대학살의 기억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하나도 찾을 수 있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는 것, 아니 공감할 준비가 된 사람이 수없이 많다는 것 말이다. 나아가 그들이 끊임없이 소리치고 있다는 것, 그 소리가 점점 들리게 된다는 것을 찾았다. 멕시코 시티를 처음 방문했을 때 43명의 학생들과 관련된 것이라고 찾을 수 있는 건 공동체적 기억과 집회 천막뿐이었다. 그리고 3달 후 다시 찾은 멕시코 시티의 중심가에 '+43'이라 적힌 큰 설치물을 만날 수 있었다. 공감의 목소리가 퍼지고 있었다. 힘들고 비판받았던 우리의 마음이 인류 공통이란 걸 확인했다. 값진 발견이었다.


 우리 모두가 세월호이고, 43명의 학생이고, 9/11의 2,996명이다. 그렇게 내 팔찌가 조금 더 무거워졌다. 조금 더 편안하고 힘들지 않게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이 오면 좋겠다.


992일째 시위중.




매거진의 이전글 여행하다 만난 양아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