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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멩이 Sep 11. 2017

슬럼프

그리고 여행

 집을 나온 지 이제 다섯 달하고 이 주 정도 지난 것 같다. 사실 집에서 나오는 순간에도, 비행기를 타고도, 미국에 도착한 후에도 실감나질 않았다. 졸업 후 여행을 갈 거라고 떠들고는 다녔지만 내가 진짜 갈 줄은 몰랐다. 그래서 떠나는 순간까지 내가 어디로 얼마나 가게 될지 스스로도 몰랐다. 실감이 안 날 수밖에. 그리고 당시 정신 상태가 아주 엉망이기도 했고, 원래 내가 그런 사람이기도 했을 거다.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면 처음 한두 주는 '여행'이라는 생각 없이 그냥 다녔던 것 같다. 단지 평소 쓰지 않던 언어를 쓰고, 처음 보는 종류의 맥주를 마시고, 생경한 물가를 볼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또 첫 목적지였던 시카고는 진짜 추웠다. 3월 말, 겨울이 이제야 끝났는데 겨울이 그곳에 다시 있었다. 


 '여행'이라는 현실감을 찾은 건 멕시코에서였다. 언제나 그랬듯 시간이 지나자 정신 상태는 돌아왔고, 돌아보니 정말 상상도 못 했던 분위기 속에 서있는 내가 보였다. 알게 모르게 신이 났던 것 같다. 주변 모든 것이 생소한 상황, 모르는 언어, 모르는 문화, 모르는 날씨, 지리. 숨 한번 내쉴 때마다 새로운 무언가를 보고 느끼고 맡을 수 있었다. 아무 길거리에 아무렇게 있어도 신이 났다. 그렇게 신이 난 나는 참 잘 놀았다. 내 '여행'은 택배를 기다리는 '시간'보다 게을렀고, 손톱이 자라는 일보다 사소했다. 게으르고 사소한 여행자가 한 번쯤 느껴볼 만한 죄책감도 없었다. 질리게 노래를 부르고 살았던, 잠깐 잊혔던 내 꿈이 이뤄진 것 같았다. 구름 위에서 바둑 두는 신선이 되는 일 말이다. 마감이 있어도 잘 안 써지던 글이 참 쭉쭉 써 내려져갔다. 참 좋았다. 그렇게 나는 넉 달을 보냈다.


 그래서 다섯 달 중에 아무 문제도 없었냐고 하면 그렇지 않다. 간혹 마음이 축축 처지는 것을 느꼈고, 간혹 향수를 앓았고, 또 간혹 아픈 데 없이 아팠다. 볕 좋은 날이든 비가 억수같이 떨어지는 날이든 상관 않고 찾아왔다. 하지만 괜찮았다.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하루면 언제 그랬냐는 듯 나는 돌아왔다. 이내 바보처럼 방방 뛰었고, 때론 미쳐 날뛰었다. 큰 문제는 아니었다. 돌아올 거란 믿음도 있었다. 또 힘든 만큼 성장하는 것이지 싶어서 마조히스트처럼 그 시간을 즐기기도 한다. 그런 날엔 오히려 더 많은 글을 썼다. 회색 빛 마음을 글로 정리할 때면 스물일곱인 내가 크는 것만 같았다. 그 글이 노트북 밖으로 나올 것 같진 않지만 말이다.


 어떤 문제가 항상 그렇듯 내게도 문제가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여행의 네 달이 넘어갈 즈음, 우울이 잦아지는 걸 느꼈다. 일주일에 하루였던 게 이틀이 되고 지금은 좀더 잦은 것 같다. 매번 같지는 않지만 그렇게 느낀다. 그 이유는 다양하다. 아무 이유가 없는 날도 많고, 뭔가 사소하고 자잘한 이유도 많다. 생각보다 집 생각에 우울해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내 여행이 변한 것도 아니다. 여전히 게으르고 사소하다. 특별하지도 않다. 그냥 난 주어진 공간을 다니는 한 사람이다. 나는 여전하지만, 말로만 듣던 '슬럼프'가 찾아온 건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즐겁지 않은 날이 늘었고, 꾸역꾸역 넘기는 날이 늘었다.


 내가 일종의 '슬럼프'를 '이겨내는' 법은 다양하다. 사실 이겨낸다기보다는 나락까지 빠지지 않고, 나락의 입구 근처 어딘가서 다시 올라 나오는 일이라고 얘기하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다. 때로는 '건전한' 노력을 하고 때론 그렇지 않게 노력한다. 햇볕 아래 누워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거나, 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를 찾는다. 때론 오오랜 시간 잠들기도 하고, 술을 취할 정도로 마시기도 한다. 꽤 높은 확률로 어떻게 해야 내가 괜찮아지는지 안다. 당연히 꽤 성공적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다섯 달이 지난 지금 내가 이곳에 있지 않았을 거라 확신한다. 실제로 이에 실패한 어느 날 한국행 비행기를 찾아본 적이 있다. 단지 내 지갑에겐 무서운 가격이었기에 한국에 가진 못했지만 말이다. 나는 나약한 사람이다. 단지 아직 운이 좋았을 뿐이다.


 여태 '슬럼프' 이야기를 했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슬럼프'가 아니라고 얘기하고 싶다. 단지 '여행'과 '일상'이 뒤집힌 것이다. 누구나 '일상'을 살아가면서 조금씩 우울해하고 조금씩 힘들어하지 않나. 조금이 아니라 괘 많이. 오래라면 오랜 시간 동안 집을 떠나 있었다. 작은 가방 하나와 몸뚱이를 이끌고 생경한 공간을 누비는 게 이른바 '일상'이 되어버렸다. 새로운 것에 예전만큼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내가 조금은 밉기도 슬프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이 '일상'을 만족해하고 있다. 이유 없는 습관처럼 "집에 가고 싶어"를 남발하며 찡얼거리기도 하지만, 막상 이 '일상'이 끝나면 슬퍼할 것도 그리워할 것도 아는 것 같다.


 나는 그저 크게 특별하지 않은 나의 삶을 살고 있다. 때로 힘들어 하지만 더 많이 웃고 행복하다. 여전히 게으르고 사소하지만, 여전히 밝게 빛나는 무언가를 찾곤 한다. 아직 찡얼거리고 엄살 피우지만, 앞으로 그러지 않을 거란 확신은 없다. 그저 성장하고 어딘가에 안착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마치 나와 내 가방처럼 말이다. 이번 여행은 정말이지 '여행'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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