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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멩이 Sep 16. 2017

반골기질과 여행

그리고 삶

 나는 극도로 보수적인 가정에서 나는 자랐다. 다들 가는 길인 '정도'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예외 없이 저항에 부딪쳐야 했다. 아마 그래서 그럴 것이다. '반골기질'이라는 것이 생겼다. 그것이 반골기질임을 알게 된 건 몇 년 밖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쭉 있었던 것을 몰랐을 뿐이라 생각한다. 무엇에서든 1등은 이유 없이 싫었고, 남들 다하는 반대로 하는 성격이었다. 인터넷 서점이 막 생겼을 때 1등 하는 서점이 싫어서 10년째 2등을 쓰고 있고, 이상하게 삼성은 쓰기가 싫어서 LG를 썼다. 다들 가는 그런 여행지는 가기 싫어서 남들 안 가는 곳만 찾아 향하기도 했다. 말 그대로 엄마가 싫어할 성격이었고, 실제로 좋아하신 적도 없는 것 같다. 사람은 생긴 대로 사는 게 인지상정인지라 여행을 떠나자 또 반골기질이 찾아왔다. 나도 모르게 말이다.



동그라미 두 바퀴


 여행 루트라 하면 줄을 쭉 긋기 마련인 것 같다. 여기서 저기까지 그리고 그 사이에 쭈르륵. 남에서 북으로, 동에서 서로 긋기 마련이다. 누가 가르쳐 주진 않았지만 그게 효율적이고 편하며 그러지 않을 이유도 없다. 그런데 내가 지나온 길을 지도 위에 그려보면 좀 다르다. 멕시코 지도 위에 동그라미가 두 바퀴 그려졌다. 동에서 한 번 번쩍, 서에서 또 번쩍, 남에서 번쩍, 북에서 번쩍. 무슨 홍길동도 아니고 여기 갔다 저기 갔다 경제성으로 치면 최악의 평가를 받을 그런 그림을 그렸다. 크게 힘들진 않았지만 이상한 여행이었다.

 멕시코를 떠난 지금 나는 만족한다. 약간 뿌듯하기도 하다. 지도에서 나를 발견하는 기분이 들었다. 별 의도는 없었지만 마음이 흐르는 대로 다녔다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지금 내 가슴이 닿는 곳에 내가 닿을 것이라는 믿음이 지도 위에서 보인다. 다행히 큰 문제도 없었다.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 김에 작은 신념 하나를 얘기하고 싶다. '예측 가능한 위험은 감수하자'는 것이다. 위험하지 않으면 너무 재미가 없지 않나. 물론 언제나 어디서나 예측 불가능하게 닥치는 위험도 있다. 그런데 그건 더더욱 어쩔 수 없다. 조금만 힘들고 이겨낼 수만 있으면 괜찮다. 사실 많이 힘들어도 되고 말이다. 그렇게 성장하는 것일 거다. 그래서 이상해지는 위험을 감수한 내가 조금은 뿌듯하다.

 

필연적 반골


 반골의 정의는 국립국어원 국어사전에 따르면 "어떤 권력이나 권위에 순응하거나 따르지 아니하고 저항하는 기골. 또는 그런 기골을 가진 사람"이다. 내가 싫어하는 단어가 두 개나 나왔다. 권력과 순응. 모든 권력관계를 지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나로부터 무언가에게의 권력 혹은 무언가로부터 나에게의 권력 모두 필요할 이유가 없다. 가령 말에 담기는 권력을 피해보려 용쓴다.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 쉽게 반말하는 일, 근거 없는 존경이 담긴 존댓말을 하는 일. 나의 문법에 권력이 들어갈 틈을 주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리고 순응. 순응의 사전적 의미는 "환경이나 변화에 적응하여 익숙하여지거나 체계, 명령 따위에 적응하여 따름"이다. 싫다. 너무 싫다. 우리 곁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언제나 질문하고 싸울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게 그렇게 진보하지 않을까.


 사실 내가 '반골이다', '그런 기질을 가졌다'고 얘기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날 갖다 붙이기에 '반골'은 너무 거창하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뿐인데 말이다. 하지만 나에게 흘러가는 대로란 '나에게 주어진 것'에 따라 산다는 말이 아니다.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일을 말한다. '흘러'가는 건 '어디'로 가는 것조차 아닐 테니까. '흘러'가지만 힘들고 고통스러울 테니까. 나에게 흘러가는 삶이란 그런 삶이다. 어디로 흘러갈지 어떻게 흘러갈지를 항상 고민하고 그렇게 흘러 사는 일. 따옴표에 갇혀버린 '흘러'는 고통의 다른 말이라 생각한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흘러가는 삶은 반골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사회는 극도로 보수적인 사회라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해"를 가르치는 것이 우리 교육의 지상 과제다. 어느 누구도 가는 길을 멈추고 다른 곳을 쳐다보라 가르치지 않는다. 좁디좁은 길에 어떻게 수없이 많은 이들의 꿈이 담길 수 있겠는가. 꿈꾸는 누군가를 위한 자리는 그곳에 없다. 나 역시 꿈꾸는 사람이다. 조금 더 적극적인 나만의 방법으로. 내 꿈 역시 길 밖에 있었다. 그래서 길 밖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길 밖의 무언가가 좋아 보이는 사람이 '반골'이 되는 건 너무 필연적이지 않나. 그렇게 나는 '반골'이 되었다. 사실 이런 세상에는 필연적 '반골'과 드러나지 않은 '반골' 두 가지의 사람만이 존재하는 걸지도 모른다.


밖으로 나가자


 살아내는 게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라는 노래 가사를 믿지 않는다. 아니 싫어한다. 내 삶은 내가 그려가고 만들어간다. 달리는 기차 안의 세상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차를 세우고 기차 밖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에서 남궁민수는 기차를 멈춰 세우고 나가면 죽을 수도 있지만, 기차 밖 세상으로 나간다. 그래서 기차 밖에서 하얀 곰을 만난다. 또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이렇게 말했다. "아마 혁명은 이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이 비상 브레이크를 당기는 일일 것이다"라고. 박노해 시인의 <경주마>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경주마가 할 일은/ 자신이 달리고 있는 곳이 결국/ 트랙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리고/ 트랙을 빠져나와/ 저 푸른 초원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저 바깥 세상이 초원이든 곰과 함께하는 눈밭이든 우리는 필연적 '반골'이 되어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렇게 믿고 그렇게 살 거라 오늘도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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