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나를 읽고 현재의 내가 쓴다
고맙습니다. 어떤 경로가 됐든 이 글의 조회수를 올려주신 모든 분께 고개 숙여 인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어느 지점까지 스크롤을 내리실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미 넘어가서 지금 이 문장조차 읽지 않으실지도. 그러나 제게는 글을 열어주신 그 자체가 이미 커다란 감동입니다. 진심이에요. 최대한 많은 분께 감사를 표하고 싶기에 첫 문단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제 마음 거기까지 잘 전해졌나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글쓰기는 늘 '잘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정확한, 단정한, 논리적인, 구체적인, 구조적인, 간결한, 아름다운, 문학적인, 통찰력 있는, 번뜩이는, 호흡이 깊은, 통통 튀는, 유머러스한, 감동적인, 핍진한. 그밖에 한 편의 글 또는 한 줄의 문장을 칭송하기 위해 쓰이는 수식어라면 낯부끄러운 줄 모르고 탐했습니다. 어쩌다 한번 듣는 칭찬은 마치 제 소원을 들어줄 영물이라도 된 듯 마음 속 깊은 곳에 모셔둔 채 조금씩 조금씩 뜯어먹곤 했죠.
잘 쓴 글과 잘 쓰는 사람을 언제나 선망했습니다.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매만져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꺼내 보이는 이들. 어떤 생각인지 무슨 마음인지 알기 어렵다면 그 어려움을 가득하게 담아낸 글들. 저는 그런 이들을 금방 좋아해버렸고 그런 글들에 자주 반해버렸습니다. 그리고 깊게 빠져들었어요. 롤모델로 삼았던 기자님의 글을 찾아다닌 끝에 그가 10년 전에 남긴 언론사 최종합격 후기에 다다르기도 했습니다. 저, 구글링 좀 하더라고요.
좋은 것을 알아보는 감각을 가진 자의 저주 받은 운명에 따라 오랫동안 만성 슬럼프에 시달렸습니다. 대체 왜 저들처럼 쓸 수 없는가! 훌륭한 글은 커다란 만족감과 그에 못지 않은 좌절감을 동시에 가져왔죠.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글 잘 쓰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지. 각종 SNS부터 뉴스레터, 독립출판 등 여러 플랫폼의 등장에 힘입어 글쓰기가 보편화 된 세상. 그건 제게 더욱더 높은 해상도의 천국이자 지옥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도 '글쓰기 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언론사 입사를 준비하던 때였죠. 무려 2년에 달하는 시간. 소위 언론고시는 1차 관문인 필기시험이 가장 큰 허들입니다. 여기서 상당수 지원자를 걸러내기 때문인데요. 우스갯소리로 필기 시험을 통과한 뒤 면접을 다니기 시작하면 A회사 면접에서 본 사람들을 그대로 B회사 면접에서도 볼 수 있다고도 합니다. 정량적인 스펙은 아니지만 어떤 기준으로서 '필력'이 기능하고 있는 것이죠.
논술 시험에 통과하기 위해 글쓰기를 연구했습니다. 당시엔 정말 기계처럼 썼어요. 주제와 시간에 관계없이 일관적인 구조와 분량을 뽑아냈죠. 즐거웠습니다. 높은 합격률이 결과로 따라왔거든요. 면접 일정이 겹치는 바람에 다른 하나를 포기하는 사치도 부렸습니다. 이렇게 쓰면 이렇게 되고 저렇게 쓰면 저렇게 되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경험은 지금 떠올려봐도 짜릿합니다. 그래요. 저는 제가 정말로 글을 잘 쓰는 줄 알았습니다.
얼마 전 당시 썼던 원고지를 발견했습니다. 한 시절의 열정을 추억해볼까 싶어 글 몇 편을 읽었어요.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필체는 분명히 내 것인데, 글이 너무 생소했던 겁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문제점과 해결방안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논할 뿐, 제 생각과 감정은 전혀 담고 있지 않았어요. 첫 합격의 기쁨, 연달아 맛본 탈락의 쓴맛, 함께했던 스터디원들에 대한 고마움은 물론 그것들을 쓰며 느낀 글쓰기의 즐거움까지. 저는 대체 뭘 썼던 걸까요?
그런 텅 빈 글은 더이상 쓰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결심은 순간적으로 제 속의 에너지를 극단적으로 부풀게 하는데요. 그게 빠져나갈 통로를 만들어줘야 합니다. 일상의 요소들이 스스로의 통제 아래 있어야 마음이 놓이는 성향이지만 제 삶의 중요한 변곡점을 만들어낸 힘은 언제나 이런 즉흥성으로부터 왔어요. 자 드디어 본론. 제목으로 쓴 '프로젝트 리싸이-글: 다시 쓰는 글'이 바로 그 통로인 셈입니다.
말 그대로 이미 썼던 글을 다시 쓰겠다는 말입니다. 뉴스레터로 보냈던 글, 독서모임에 냈던 글, SNS에 끄적였던 글이 주요 대상입니다. 어설프지만 제 생각과 감정을 담았던 글들을 거의 새로 쓰는 만큼의 시간을 들여 크게 다듬을 계획이에요. 오래 보관한 필름들을 하나씩 인화하는 마음으로 꺼내볼 겁니다.
"마감이 쓴다"고 말하지만 사실 다들 알고 있잖아요. 그 마감을 하는 게 사람이란 거. 한 글자도 안 쓰면 그냥 한 글자도 안 쓴 사람이 된다는 거. 그 사이에 어떤 비극적 운명이나 불가항력 같은 게 들어설 틈은 없습니다. 일주일에 최소한 1편, 으쌰으쌰 힘이 날 땐 더 올려보려고 해요. 부지런해야겠습니다.
12월 23일. 2022년까지 카운트 다운 D-9인 날입니다. 올해의 남은 날이 한 자릿수로 접어들었습니다. 오늘 시작하면 딱 열흘 뒤에 2년 차가 돼요. 9일 차와 10일 차는 사실은 단 하루 차이지만 연차로는 1년이 벌어집니다. 어쩐지 이미 궤도에 오른 듯한 느낌이 들지 않나요? 결심을 실행하기에 이보다 적절한 시기가 없죠.
과거의 저를 읽고 현재의 제가 쓰는 여정에 가끔씩 들러 주시면 참 좋을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