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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양 Feb 01. 2018

육식의 성정치_1부_3장


육식의 성정치_1부. 가부장제의 고기 텍스트들

3장. 은폐된 폭력, 침묵의 목소리들

언어의 가면

  우리의 언어는 남성 중심적male-centered이며, 뿐만 아니라 인간중심적이다. 우리는 "동물"이란 단어를 마치 그것이 인류는 지시하지 않는 것처럼, 다시 말해 우리는 동물이 아닌 것처럼 사용한다. 언어는 동물을 "그것들its"처럼 대상으로 칭하면서 우리와 동물을 더욱 동떨어진 것으로 만든다. "그것it"은 "그 사람he"과는 달리 암수 구별 없이 동물의 살아 숨쉬는 본성을 제거한 채, 즉 죽은 사물의 상태를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또한 우리는 동물이 처한 현실을 왜곡하는 은유들 또는 직접적인 비유들을 사용하면서 우리 자신과 동물을 구별한다. 우리가 동물에 대해 갖고 있는 표상들은 동물을 지시하기보다는 인간을 지시한다. 예를 들어, 여우처럼 교활한 인간, 곰처럼 굶주린 인간, 망아지처럼 귀여운 사람 등. 어떤 사람이 '속죄양이 되다' 또는 '기니피그(시험 대상)가 되다'와 같은 표현들. 또한 '이미 끝난 것을 문제삼다beating a dead horse', '손 안에 든 새a bird in the hand', '당신에게 따질 일이 있다I have a bone to pick with you' 등.


잘못된 명칭

  우리는 '고기'라는 단어를 가지고 복합어(말고기, 개고기 등)들을 만들어낸다. 여기에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동물의 이름이다. 식용이 금지된 동물의 고기에 대해서는 그 동물의 이름에 'meat'을 붙인다. 식용으로 쓰이는 동물의 고기에는 다른 명칭을 쓴다. 따라서 웜바트고기wombatmeat라고는 하지만 양고기sheepmeat라고는 하지 않으며, 개고기dogmeat라고는 하지만 소고기cowmeat라고는 하지 않는다. 양고기는 mutton이 되며 chichenmeat에는 meat라는 단어가 불필요하다. 닭고기는 그냥 chicken이라고 부른다.

  18세기의 채식주의자였던 골동품 연구가 조셉 릿슨은 다음과 같은 항목을 포함한 "새로운 사전"을 기획했다.

Carrion[현대어에서는 썩은 고기의 의미]. 자연적으로 죽은 또는 적어도 인간의 손에 의해 인위적으로 살해되지 않은 동물의 고기.

Lobster[현대어에서는 바닷가재(갯가재) 또는 대하의 의미]. '훌륭한 감성과 위대한 인류애를 품고 있는' 인간에 의해 산 채로 끓는 물에 삶아지는 갑각류.

  채식주의자들은 육식가들이 고기를 "완벽한 단백질", "철분이 다량으로 함유된 식품", "활력을 북돋아 주는 식품", "즐거운" 또는 "체력을 증강시키는 식품"으로 부르는 것을 거부하면서, 대신 "불태워 죽은 동물의 일부분" 또는 "도살당한 인간이 아닌 것들" 또는 "불에 그슬려 죽은 동물의 시체들"이라고 부른다. 낚시질하는 것을 "이유 없는 살인"으로 간주하며, "모가지 비튼 닭"이라고 본다.

  이런 고기에 대한 채식주의식 명칭은 그것 자체를 육식을 승인하는 사회적, 언어적 맥락에서 분리시킨다. 이런 단어들이 생산하는 불협화음은 그런 명칭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적절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단어들은 동물을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있는 육식문화의 일반적인 담론을 지지하지 않는다.

  아이들 동화책에 그려져 있는 어느 돼지 가족의 그림을 보면서, 이 돼지 가족이 지배 문화에서 사용되는 단어들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펴보자.

  "빨리", "둥글게 원을 그리면서 빙 둘러 서 봐"라고 윌리엄은 말하고 나서, 빙 돌아가면서 뭔가를 세기 시작했다. 햄, 베이컨, 폭찹, 건너뛰고. 지나가던 피그 여사가 이 말을 듣고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옴짝달싹 못하다가 뒤를 돌아본다. "저런, 어디서 그런 말을 주워들었니? 너희들은 그런 말 따라하면 안 돼요."

  윌리엄과 형제들이 햄, 베이컨, 또는 폭찹과 구별되는 것은 폭력 행위가 가미되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있다. 이것이 피그 여사가 전율을 느끼는 이유이자, 우리가 이 구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직접 우리의 언어를 구성하고자 하는 이유다. 


융합된 억압들

  언어는 가부장제 문화에서 여성과 동물의 열등한 지위를 융합한다. 우리가 1장에서 살펴보았듯이, 거의 모든 육식 문화는 남성지배 문화다. 2장에서 우리는, 우리가 여성 폭력에 대해 말했을 때 그것은 도살당한 동물[부재 지시대상]을 지시한다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동물을 여성의 열등한 지위와 연관시키고, 한편으로는 동물들을 억압한다.

  동물을 그것it으로 부르는 것은 동물의 성별을 확인하는 데 필요한 어떤 기준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물이 수컷이든 암컷이든 상관없이 동물에 대해 그 남자 또는 그 여자를 사용할 때도 있다. 파리 4대학 불문학 교수인 앙드레 졸리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그것을 결정하는 문법 규칙을 설명한다. "현재 동물은 아무리 크든 작든 그리고 수컷이든 암컷이든 상관없이 메이저 파워나 마이너 파워로 양분할 수 있다." 이것은 고래들이 "그 여자들"로 불리고 사람이 까마귀 둥우리를 보면서 "그 여자가 날아오른다!"고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 여자"는 마이너 파워일뿐만 아니라 정복된 파워, 그리고 곧 죽게 될 힘없는 동물을 대표한다. 동물의 수컷들도 상징적으로 암컷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남성 폭력에 희생당한 경우다. 살에서 피가 나오는 동물은 주기적으로 피를 흘리는 여성[월경하는 여성]을 환기시킨다. 이런 경우에 동물의 암컷이 처한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글자 그대로 동물이 음식으로 사용된다는 사실과 공명한다. 육식의 성정치는 글자 그대로 동물의 암컷에 대한 억압을 강화한다.

  명명의 권력을 이용한 여성과 동물에 대한 중첩된 억압은, [인간의]타락에 대한 책임을 물어 여성과 동물의 하나인 뱀이 동시에 비난을 사고 있는 창세기 타락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아담은 이브와 다른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줄 수 있는 권력을 부여받는다. 우리는 '기혼 여성femme covert'와 '가축beste covert'이 법률상 같은 범주에 속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런 법률적 범주들과 남편husbands들이나 농사꾼husbandmen들 사이의 관계, 매 맞는 여성들과 매 맞는 아이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곰곰히 생각해보아야 한다.


글자 그대로 생각하기

  "고기가 도살된 죽은 고기의 살점" 또는 "고기는 살인"이라는 문장은 글자 그대로 사실을 말하는 것이며, 상징적/비유적으로 사고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글자 그대로 말하면 채식주의의 메시지와 방법은 지배적인 견해와 충돌한다.

  히치콕 감독의 영화 <새.1963>에서 새들이 인간을 무섭게 공격하는 장면이 주는 충격은, 이 새들이 갑자기 인간을 공격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예민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 영화 속에는 새에 대한 억압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조류학자인 번디 여사는 새들이 인간을 공격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그 견해를 말하는 순간 우리는 저편에서 배경음으로 "프라이드치킨 세마리요. Three southern fried chicken" 라는 닭고기 주문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언어에 의해, 즉 닭이라는 단어가 단수이기 때문에 그 복수성이 은폐되지만, 그들이 처한 운명(죽어서 프라이드가 된다)을 떠올리게 된다. 이 영화에서 글자 그대로 잡아먹히는 닭고기chickenmeat는 새들이 인간을 공격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는 번디 여사의 견해와 직접 대립한다.


침묵의 목소리

  [어떤 한 집단이 자신의 독특한] 개념적 여지 없이 그 집단이 의도하는 바의 의미 [예를 들어 채식주의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은, 옥스퍼드대학의 인류학자 에드윈 아데너에 의해 지배와 침묵의 문제로 이론화되었다. 지배-침묵 이론은 채식주의자들이 지배문화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채식주의자들은 침묵을 통해 폭력의 정체를 폭로하고자 하지만 결국 지배구조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실패하고 만다.

  언어에 대한 남성의 지배적인 통제를 철폐하려고 할 때, 채식주의자들은 워싱턴이나 링컨처럼 정치적 해방자로 간주되기보다는 까다롭고, 특별하고, 기분 상하게 하는, 독선적이고, 반항적이고, 특히 감상적인 해방자들로 간주된다. 동물을 죽이는 것을 거부하는 태도는 "여자다운 것"으로 간주된다. 스피노자는 "동물을 죽이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공연한 미신과 여자 같은 연약함'에 기초한다"고 말했다.

  음식으로 동물을 죽이는 것에 반대하는 태도가 여성적인 것 또는 '여자다운 것'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은, 일차적으로 그것의 감정 섞인 어조가 가부장제 문화에서 역시 침묵하고 있는 다른 여성들과 결부되면서 동시에 채식주의의 침무게 기여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명명

  채식주의자들은 새로운 단어들을 주조해냄으로서 부당한 언어를 개혁한다. 1847년 그리고 의식적으로 "채식주의자"라는 단어가 형성될 때까지 동물을 먹지 않는 사람을 지칭하는 가장 일반화된 호칭은 "피타고라스주의자Pythagorean"였다. 채식주의자라는 단어는 여러 세기에 걸쳐 이어져 온 동물살해 반대운동을 하나로 결집하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단어의 어원을 놓고 많은 해석상의 논쟁이 초래됐다. [옥스퍼드 영영사전]에는 이 단어가 "채소의veget-able"라는 형용사와 "-주의의arian"라는 접미사가 불규칙하게 결합돼 파생한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영국의 채식주의자들은 이 단어가 homo vegetus-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원기왕성한 사람-처럼 '건강한, 건전한, 신선한 또는 살아 있는'의 의미를 가진 라틴어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영국의 채식주의자들은 채식주의적 삶의 목적을 철학적이고 도덕적인 데 맞추려 했다. 단지 채식을 널리 보급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그 후 단어의 어원과 의미 해석을 둘러싸고 벌어진 설전은 어떤 사람을 채식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으로 옮겨간다. 포괄적인 경우가 아니라 한정적 의미를 갖고 있는 채식주의라는 단어는 이미 육식가들이 전유하고 있었다. 육식가들은 채식주의라는 단어를 정의하면서 채식의 범주에 닭고기와 생선을 포함시켜 그 원래의 뜻을 희석시켰다. 이런 식의 개념 정의가 한 번 묵인되면-살아 숨쉬는 얼마간의 피조물들이 소비될 수 있다면- 결국 채식주의자들의 급진적 저항은 그 핵심을 박탈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채식주의자들은 죽은 닭고기와 생선을 먹는 사람들이 스스로 채식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못마땅해하면서도, 자신들이 너무도 무신경하고 까다롭게 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 이내 잠잠해진다. 채식주의자라는 단어를 오직 붉은 고기에 대한 거부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단어의 의미를 중성화/일반화했던 것은 사실 채식주의를 거부하는 지배문화가 이 개념에 대응할 만한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려고 상당히 고심했음을 방증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동물화된 단백질[동물성 단백질]이라는 개념은 지금까지도 사용되는 역사적 용어다. 단백질의 동물화는 부재 지시대상의 구조를 작동시키는 주요한 작인이다. 고기를 설명하는 데 있어 "동물화된"이라는 용어는, 고기의 생산 과정을 환기시키면서 이 논의에 부재 지시대상을 다시 끼워넣도록 한다. 동물의 몸은 단백질 배양기로 조작될 수 있는 하나의 신체로 간주된다.

  육식이라는 것을 영양학이나 진보의 산물로 간주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육식을 역사 발전에 따른 필연적인 생존 전략으로 간주하는 언어들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육식의 언어는 동물 억압을 옹호하는 문화적 의미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물망처럼 얽혀 있는 동물 억압을 폭로하려는 시도들은 새로운 단어들을 직조해낸다. 예를 들어 플루타르크는 피타고라스가 고기를 멀리했던 이유를 묻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내 생각에 당신의 질문은 근래에 누가 육식을 중단했는지를 묻기보다는, [피타고라스가 최초의 채식주의자라는 측면에서] 누가 이것을 가장 먼저 실행에 옮겼는지 물어보는 형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버나드 쇼 역시 무슨 이유에서 채식주의자가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고 "지금 무슨 이유로 내가 품위 있게 식사를 하게 되었는지 설명해 달라는 거요?"라고 반박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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