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식의 성정치_1부. 가부장제의 고기 텍스트들
2장. 동물 성폭행, 여성 도살
1987년 나는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 여성학회가 주최한 <페미니즘과 번역>이라는 학술대회에 패널로 참가해 어슐러 험드레스를 [성폭력-표상과 실재]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그리고 같은 달에 프린스턴에서 채 60마일도 떨어져 있지 않은 필라델피아에 사는 게리 하이드닉이라는 사람의 집 지하실에서 감금되어 있던 여자 세 명이 발견되는 사건이 있었다. 한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몸통 부위가 부엌의 오븐과 스토브 위에 놓여 있던 스튜 냄비와 냉장고 안에서 각각 발견되었다. 팔과 다리는 이미 잡혀온 다른 여성들에게 강제로 먹인 것으로 밝혀졌다. 생존자 중 한 여성은 감금되어 있던 시간동안 하이드닉이 자신을 여러 번 성폭행했다고 증언했다.
나는 어슐러 햄드레스의 이미지나 하이드닉의 범행 수법처럼 강간당하고, 살해당하고, 잡아먹히는 여성들이, 서구 문화에서 이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성폭력의 이미지들과 자연이나 동물의 신체에 가해지는 파괴와 해체가 서로 중첩되면서 상호 연관을 맺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중 특별히 관심이 가는 것은 동물 도살의 문화적 표상들이다. 왜냐하면 육식은 우리가 동물과 상호작용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도살은 육식을 위한 가장 본질적인 행동 방식이다. 육식은 살고자 몸부림치는 동물에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의 시선과 감정을 격리시키면서 글자 그대로 동물을 해체하도록 만든다. 뿐만 아니라 하나의 패러다임으로서 도살은 서로 중첩되어 있는 다양한 문화적 이미지들[예를 들어, 어슐러 햄드레스와 여성의 이미지, 성폭행과 자연 파괴나 동물 도살(성폭행)의 이미지]의 존재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부재 지시대상
"동물"은 소비자들이 그것을 먹기 전에 죽은 동물의 신체에 다시 이름 붙여진 언어[각 부위별 명칭]로 인해 "부재하는 무엇"이 된다. 우리 문화는 요리법의 언어, 즉 각종 요리 명칭을 가지고 '고기'라는 용어를 더욱 신비화한다. 여기에서 신비화란 도살된 죽은 동물의 영혼을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요리해서 먹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는 동물의 이런 부재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다. 고기와 고기를 먹는 것의 문화적 의미는 역사에 따라 바뀌어 왔지만 고기의 의미가 갖는 본질, 즉 동물의 죽음 없이는 아무도 고기를 먹을 수 없다는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므로 살아 숨쉬는 동물은 고기의 개념에서는 부재하는 지시대상이다. 부재 지시대상은 독립된 실체로서 동물을 망각하도록 만들고, 그런 동물을 떠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든다.
동물이 부재 지시대상이 되는 세 가지 방법 중 하나는 육식이다. 동물들은 도살당했기 때문에 글자 그대로 부재하게 된다. 다른 하나는 정의상으로, 우리는 고기를 먹으면서 동물의 명칭을 바꾼다. 예를 들어, 우리는 고기에 대해 그 동물이 살아 있을 때 부르던 새끼 송아지, 소, 양이라 부르지 않고 송아지고기 또는 양고기라고 부른다. 마지막 방법은 은유다. 동물은 인간의 경험을 묘사하기 위한 은유로 사용된다. 이런 은유적 의미에서 부재 지시대상의 의미는 동물이 특히 여성과 같은 다른 어떤 대상에 적용되거나 그 대상을 지시할 때 파생되어 나온다.
여성과 동물-서로 중첩되어 있지만 부재하는 지시대상들
부재 지시대상의 구조를 통해 가부장제의 가치들이 제도화된다. 동물의 죽은 몸이 고기에 대한 우리의 언어에서 부재하듯이, 남성의 문화적 폭력에 대한 묘사에서 여성은 부재하는 지시대상이다. 특히 성폭행이라는 단어는 글자 그대로 여성이 겪은 일을 지시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폭력적인 유린의 다른 예들, 즉 1970년대 초반의 생태학적 저술들에 자주 언급되던 '지구에 대한 성폭행'이라는 표현에서처럼, 다른 대상에 비유적으로 사용된다. 여성들의 몸에 가장 빈번하게 가해지는 실제 성폭행은, 이 성폭행이라는 단어가 '지구에 대한 성폭행'에서처럼 다른 대상에 은유적으로 쓰일 때는 부재 지시대상이 된다. 이런 용어들은 "여성" 자신이 아닌 여성이 겪은 "경험"만을 환기시킨다.
페미니스트들은 도살이라는 단어가 원래 적용 대상인 동물에 대한 억압을 의미한다는 사실에 상관없이, 여성에 대한 비유적 표현으로 도살의 은유들을 전유한다. 이런 부재 지시대상의 기능을 통해 서구문화는 폭력의 물질적 실체를 끊임없이 통제하며 통제 가능한 은유들로 바꿔 나간다.
성폭력과 육식은 서로 별개 형태의 폭력으로 나타나지만, 부재 지시대상 속에서 서로 교차지점을 발견한다. 성폭력의 문화적 이미지들과 실제로 자행되는 성폭력은 종종 동물이 어떻게 인간에게 도살되고 먹히는지에 대한 우리의 앎에 의존한다. 예를 들어 캐시 베리는 예닐곱 명의 소녀들이 하룻밤에 각각 80명에서 120명 정도의 남자를 접대하는 "갈보집maisons d'abattage(직역하면 도살장)"에 대해 이야기한다. 따라서 여성들이 폭력의 희생자라고 할 때, 이 말은 여성들이 동물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는 것을 환기한다.
비슷하게 동물 도살의 이미지들에서 묻어나오는 에로틱한 분위기 역시 그 이미지에서 부재하는 지시대상이 여성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만약 동물이 "여성 도살"이라는 표현에서 부재 지시대상이라면, 여성은 '동물 성폭행'이라는 표현에서 부재 지시대상이다. 유혹하는 암퇘지의 이미지는 부재하지만 상상이 가능한, 즉 매혹적이고 통통한 여성을 의미한다.(어슐러 햄드레스)
인종주의와 부재 지시대상
부재 지시대상의 구조를 통해 억압당하는 집단의 현존과 부재 사이의 변증법이 발생한다. 부재하는 집단은 다른 집단을 규정하면서 억압당하는 한 집단을 배후에서 지시한다. 여기에는 이론적으로 여성과 동물에 대한 억압뿐만 아니라 계급과 인종 폭력도 포함된다.
부재 지시대상의 구조에는 동물을 대신 도살하는 소외된 노동을 대신 수행하는 대리인들(인디언들)이 필요하다. 살아있는 온전한 동물은 육식 습관에서는 물론 모피 거래에서도 부재 지시대상이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모피 거래가 함의하는 동물 억압과 노예인 흑인에 대한 억압 사이에 상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흑인 역사가들은 흑인들이 미국인이 만든 노예제도로 인해 원주민보다 더 강압적인 지배를 받게 된 역사적 원인 중 하나로 모피를 얻기 위한 동물 학살을 거론한다. 빈센트 하딩은 [미국 흑인들의 자유를 향한 투쟁]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북아메리카에 이주해 온 유럽인들의 중요한 소득 원천 중 하나는 인디언들과 했던 모피 거래였다. 따라서 인디언들을 노예로 삼는 것은 위험천만한 행위였다."
결국 이런 부재 지시대상의 기능에 주의를 기울이고 동물을 잡아먹는 것을 거부하게 될 때, 우리는 이런 동물 억압에 의지하는 은유를 거꾸로 이용해, 이 은유가 지시하는 대상과 그것이 유래한 대상을 동시에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성폭력과 육식
보통 폭행범, 강간범, 연쇄살인마, 아동 성학대자들은 동물을 희생시킨다. 배우자 강간범들은 여성을 위협, 포박, 또는 폭행하기 위해 애완동물을 이용하기도 한다. 연쇄살인마들은 종종 동물에게 시범삼아 먼저 자신의 폭력을 보여준다. 보통 폭행범들은 다음 차례가 바로 당신일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 수단으로 애완동물에게 상처를 내거나 죽여버린다. 위험에 직면해 있는 여성 또는 아이는 애완동물 살해자에게는 부재 지시대상이다. 상징적 질서 내에서 이곳저곳 파편화되어 있는 지시대상은 더는 자신을 상기시키지 않는다. 대신 다른 어떤 것을 상기시킨다.
일반적으로 부재 지시대상은 부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억압당하는 집단들 간의 연관성을 직접 경험할 수 없게 만든다. 도살과 성폭력의 문화적 이미지들은 동물이 부재 지시대상으로 기능하는 급진 페미니스트 담론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해석하기 위해 동물 도살/폭력의 경험을 전유하고 있는 가부장제적인 부재 지시대상의 구조를 떠받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구타당한 뒤에 주치의를 찾아간 한 여성을 알고 있다고 하자. 그리고 의사가 여자의 다리를 보고 "정육점에 걸려 있는 고깃덩어리 같군요"라고 말했다고 하자.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표현을 여성 억압을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예로 언급한다.
급진 페미니스트 담론은 이런 도살의 비유적 표현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동물 억압을 글자 그대로 우리의 가부장제 문화에 대한 분석에 통합하지 않고 있으며, 또는 페미니즘과 채식주의 사이의 강력한 역사적 유대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여성이 자신을 고깃덩어리처럼 느낄 수 있고, 실제로도 고깃덩어리로 취급받을 수 있지만-감정적으로 도살되고 물리적으로 구타당하는-동물은 실제로 고깃덩어리가 된다.
객체화, 절단, 그리고 소비의 주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 평행선을 그리고 있는 것들, 즉 여성과 동물에 공통적인 억압과 은유의 문제와 부재 지시대상의 궤적을 추적할 수 있는 이론이다. 객체화는 억압자가 또 다른 어떤 존재를 하나의 대상으로 보게 만든다. 예를 들어, "안 돼No"라고 말할 수 있는 여성의 자유를 부정하는 성폭행과 살아 숨쉬는 존재인 동물을 죽은 객체로 전환시키는 도살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과정은 절단fragmentation, 또는 잔인한 해체dismemberment, 그리고 소비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주체는 우선 은유를 통해 판단 또는 객체화된다. 그리고 절단을 통해 객체화된 대상은 본래의 존재론적 의미와 분리된다. 마지막으로 소비를 통해 주체는 오직 그것을 표상하는 것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 지시대상의 소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중요한 목적이 되며, 그것을 표상하는 것을 완전해 없애버리는, 즉 절멸시키는 반복 과정이다.
고기를 은유적으로 소비하기
고기는 그 지시대상인 피 흘리며 도살당하는 동물 없이도 자유롭게 부유하는 이미지가 된다. 고기는 의미의 수단일 뿐이지 그 자체로 고유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하나의 이미지로서 고기의 본래 의미는 소비되고 부정되기 때문에, "고기의meat's" 의미는 그것이 놓여 있는 환경에 의해 구조화된다.
고기는 서구 문화에서 여성에 대한 억압의 메타포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 여성을 강탈한 뒤 소비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예가 바로 제우스와 메티스의 신화다. 제우스는 메티스를 삼켜버리기 위해 그럴듯한 말로 유혹한다. "잠자리에서 달콤한 말로 메티스를 달래던 제우스는 갑자기 입을 벌려 메티스를 삼켜버렸다." 제우스는 어떻게 정확하게 메티스의 임산한 몸, 팔, 어깨, 가슴, 자궁, 넓적다리를 그대로 한입에 삼켜버릴 수 있었을까? 신화는 부재 지시대상이 어떻게 부재하는가를 알려주지 않는다.
누락된 절단
은유와 지시대상 사이의 누락된 관계와 평행하게 고기를 먹는 행위에는 고기의 절단 과정이라는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 고기를 소비하는 과정에는 고기의 도살, 절단, 분해 등은 누락되어 있다. 사실 가부장제 문화는 실제 자행되는 도살에 침묵한다. 지리적으로 도살장은 격리되어 있다. 그러므로 부재 지시대상을 현존하도록 만드는 것-동물이 발로 걷어차이고 비명을 지르면서 어떻게 죽어가는지, 그리고 어떻게 절단되는지를 정확히 묘사하는 것-이 소비를 불가능하게 하고, 메타포의 권력을 무용지물로 만든다.
[포트노이 씨의 병.1970]에서 필립 로스는 포트노이 씨가 고기를 가지고 자위행위를 할 때, 어떻게 고기가 남성의 성행위 도구로 사용되는지를 다루고 있다. 생식기로 쓰이는 것과 먹는 고깃덩어리를 연결하는 것, 몸 안으로 삽입되는 것과 먹히는 것을 연결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실 성폭행/폭행/의지에 상관없이 페니스가 몸 안으로 삽입되는 것은 먹히는 것과는 비슷하지 않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느끼는 것일까? 그 이유는 당신이 만약 고깃덩어리라면, 나이프나 포크 또는 그 밖의 도구를 이용한 폭력[자르고, 찌르는 행위]에 당신이 지배당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안드레아 드워킨은 "남성 문화의 가장 큰 자만은 경험이란 것이 글자 그대로 뼈가 부서지듯이 산산조각날 수 있다고 간주하는 것, 그리고 이런 뼈 조각들을 마치 원래 뼈의 일부가 아니었던 것처럼, 또는 이 뼈가 마치 신체의 일부가 아니었던 것처럼 다룬다는 데 있다"고 지적한다. 감정 그리고/또는 상상력과 지식이, 결과와 행동이, 실체와 상징이, 신체와 정신이 분리된다. 몇몇 부분은 전체를 구성하고 전체는 일부를 위해 희생된다. 도살의 이미지들이 가부장제 문화를 가득 메우고 있다.
남성이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이야기를 쓰면서, 페미니스트들도 자신을 억압하는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문화적 이미지들을 끌어다 사용한다.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이 여성의 굴욕, 객체화, 폭력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동물의] 상징들과 직접적인 비유들은 폭력에 의해 파편화된 여성의 성적 실상에 관심을 촉구하는 한 방식이다. 우리가 고기와 도살을 여성 억압의 메타포로 사용할 때, 사실 우리는 어슐러 햄드레스의 비명에는 침묵하면서 [동물 억압에는 무관심하면서], 우리 자신의 비명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동물권 옹호자들 역시 동물에게 가해지는 억압/폭력을 묘사하기 위해 은유적으로 여성의 경우에 적용되는 '성폭행'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주의해야 한다. 은유적으로 성폭행이라는 단어를 동물에게 적용하려고 할 때, 우리 문화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폭행의 사회적 맥락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이런 선결조건 없이 동물 억압을 설명하기 위해 단지 여성 성폭행이라는 단어에 의존하는 은유적 차용은, 결국 가부장제의 근원적 폭력에 맞서는 것도, 그렇다고 동물 억압과 여성 억압이 서로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목적은 정신과 육체를 분리하는 폭력에 저항하는 것이자 부재 지시대상을 만들어내는 가부장제의 구조를 제거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지적된 것들이 구체적인 실체가 아니라 단어들, 관념들, "추상명사들"이었다는 것을 상기하자. 그러나 분명히 파편화된 살점이 있고, 이 살점이 발견되는 부엌도 있다. 직접 부엌에 가서 "남성들이 누구를 때리는지", 그리고 "(우리가) 누구를 먹어치우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동물의 운명과 결부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봉착할 것이다. 유색인들에게 "백인"의 육식 습관을 강제하는 제국주의와 육식 사이의 관계, 생태학적 함의들, 우유와 달걀 같은 "여성화된 단백질"을 생산하는 동물의 암컷에 의존하는 현실이 함의하는 것들, 그리고 "일등급" 단백질의 기준을 정하는 산업화된 강대국들의 지배적인 지위를 고려할 때 제기되는 인종주의와 계급차별의 문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