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는 반드시 무언가가
홋카이도 여행의 인상적인 순간들
여행이 끝나면 항상 생각해본다. 이번 여행의 잊기 힘든 순간들에 대해. 늘 그랬듯 가장 인상적인 순간들은 드라마보다는 시트콤에 가깝다. 쓰나미를 생각하며 걸었던 하코다테의 아침이나 알몸으로 탔던 노보리베츠 노천탕 미끄럼틀, 동심을 만끽했던 도야호수 눈썰매나 눈 위에 처음 드러누웠던 탁신관 자작나무숲. 눈 쌓인 오타루 구 데미야선 기찻길에서 기린처럼 겅중겅중 뛰는 아이를 보고 깔깔 웃었던 것. 렌터카 앞자리에서 넋을 놓고 바라본 설국.
이번 여행의 인상적인 순간을 물었더니 한참 고민하다 내뱉은 심이 대답도 역시 시트콤이다.
-노보리베츠 마호로바 호텔 노천탕에서 만난 한국인 단체 관광객. 거기서 한국인 아닌 척 행동한 거. (부끄러워서 아이와 중국어로 대화했다)
-진심으로 그게 제일 기억에 남는다고?
-그리고 돈키호테에 사람 진짜 많았던 것도 신기했어. 오타루 기찻길에서 날뛰었던 거랑 마지막 공항 편의점 가던 길.
-???
역시 인생도 여행도 시시껄렁한 농담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오타루에서 삿포로까지 광란의 드라이빙
그 날 안에만 반납하면 되겠지,라고 가볍게 생각하고 오타루를 마음껏 즐기다 렌터카 반납 가능 시간이 한 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된 것은 오타루 기찻길에서였다. 한시간 내 반납하지 못하면 적지 않은 하루 치 금액을 추가로 결제해야 했다. 춘은 반납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기 위해 파파고가 알려주는 일본어를 마구 읽으며 렌터카 직원과 통화했다. 옆에서 듣기에 너무 유창해서 역시 절박한 사람이 못할 일은 세상에 없구나 싶었다. 춘은 6시 퇴근인 렌터카 사무실 직원을 20분 더 잡아두는데 극적으로 성공했고 이제 한 시간 안에 삿포로까지 질주하는 일만 남았다. 오타루에서 삿포로까지 광란의 드라이빙. 베이징 후통에서 보여 준 깻잎 운전 이후 그것은 정말이지 아름다운 드라이빙이었다. 조수석에서 침을 꼴깍 삼키며 안전 벨트를 꽉 잡고 있었던 건 그의 운전이 너무 눈부셔서 그랬을뿐.
문제 해결이 제일 쉬운 그는 당연히 삿포로에 안전하게 도착했고 이제 퇴근이 늦어져 조금 짜증이 났을 렌터카 직원이 있는 사무실로 가 차를 반납하는 것만 남았다. 하지만 삿포로 초행길. 시계탑 근처에 있다는 사무실은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춘이 헤매는 사이 직원은 퇴근해버렸고 그는 결국 렌터카 반납에 성공하지 못했다. 최근에 겪은 가장 선명한 좌절이었기에 춘은 한껏 풀이 죽었지만 나는 무사히 삿포로에 (살아서) 도착했다는 것에 안도했다.
춘의 인상적인 순간들은 운전과 관련된 것이다. '노 엑시덴또 구다사이'를 외치던 렌터카 직원이나 도야호수 도로에서 만난 환상적인 눈보라 같은 것들.
여행은 이토록 개인적이다.
결국 또 여행을 한다.
여행이면 버선발로 환영하던 20대, 잦은 출장과 타국 생활로 점철되어 있던 30대를 지나 '여행도 좋지만 역시 집이야'라고 생각하는 40대가 됐다. 여행을 질색하던 예전 친구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달까. 하지만 집에 돌아와 여행 사진을 보다보면 알게 된다. 시트콤같은 일들이 만발하는 여행지에서 우리가 얼마나 환하게 웃고 있는지.
여행은 스무살 연애와 비슷하게 온갖 감정의 층위와 나라는 사람에 대해 알려주는 수단. 결국 부정적이고 불안했던 감정은 대부분 지우고 사진 속 환한 미소처럼 미화되어 남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미소는 거짓이 아니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대로 눈이 오면 눈이 오는대로 날씨에 불평하기 보다는 오늘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방법, 그 속에서 작은 기쁨과 안도를 찾아 소중한 이와 나눌 수 있는 마음, 이 순간을 매우 나답게 경험하는 법. 인생에서 중요한 대부분의 것들을 나는 여행에서 배운 셈이니 이제 내게 여행기록이란 새로운 공간에 대한 경험이라기 보다는 그곳을 통과하며 찾은 어떤 이야기들이다. 여행기란 낯선 공간에서 스스로와 나눈 대화 같은 것.
그러니 어떻게 떠나지 않고 배기겠는가. 떠나고 돌아오고 멈추고 다시 시작하고 그렇게 죽음으로 조금씩 가까워진다.
그곳에는 반드시 무언가가
여행의 다이내믹이 끝나고 돌아온 집에는 일상이 마구잡이로 놓여 있다. 마지막에 캐리어에서 탈락된 주황색 스웨터가 널부러진 거실, 원치 않았지만 해야 하는 한겨울의 이사, 몇 년째 나를 괴롭히는 잇몸 치료 같은 것들이. '여행은 일상처럼, 일상은 여행처럼'이라는 나의 모토와는 별개로 여행과 일상의 경계는 이렇게 분명하다.
그래서 12월의 홋카이도에 무엇이 있었는가? 눈이 있었고 겨울이라는 계절의 선명한 감각이 있었고 쓰나미에 대한 걱정과 그 걱정을 무색하게한 펭귄의 행운과 약간의 희망이 있었다. 물론 연어알과 사슴고기도, 징기스칸과 수프카레도. 무엇보다 새하얀 눈의 효과로 조금 더 어린 아이에 가까워진 즐거운 우리와 낭만이 있었다.
최근 다녀왔던 여행지를 떠올려보건데 '낭만'은 쉽게 붙일 수 있는 수식어가 아니다. 치앙마이에는 '힐링'이, 싱가포르에는 '초록'이, 타이베이에는 '다정'이 있었다. 베이징에는 '추억'이 스페인에는 '활기'가 있었다. 낭만이 있는 곳이란 드물게 귀한 것이다.
내가 지나 온 작은 도시들을 종종 떠올리며 살아간다. 포르투의 일몰, 리스본의 트램, 코르도바의 아침, 베이징 후통, 타이베이 야시장, 싱가포르 야경, 치앙마이의 햇살에 홋카이도의 눈보라가 더해진다. 다시 그곳에 가보지 못한다고 해도 이미 충분하다. 그 잔잔한 그리움이 좋다.
매일 걷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