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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출산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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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스 Dec 17. 2021

출산 51일 차 일기

눈이 오지 않아 다행이야

2021년 12월 17일 금요일 날씨 맑음  


새벽에 눈이 내린다는 예보가 있었는데 다행히 눈이 오지 않았다. 운전을 시작한 이후로 눈이 오는 날은 심란하다.  

아침부터 변을 역대급으로 싼 마리를 씻기고 옷을 입히고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니 오전 10시가 넘어간다. 남편은 올해 겨울 들어 처음으로 두꺼운 패딩을 꺼내 입고 출근했다. 날씨가 많이 추우려나 보다. 난 푸마 브라탑에 푸마 잠옷 바지를 입고 있다. 일기를 다 쓰고 나서 장판을 튼 침대에 누울 예정이다. 그러면 잠이 쏟아진다. 역시 사람은 등짝이 뜨끈해야 잠이 잘 온다.  


내 딸 마리도 연신 하품을 해대며 어린이집으로 떠났다. 오늘도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고 오렴.

 

어제저녁 내 엄마 영은 기별도 없이 시내버스 두 번을 환승해 한 시간이 걸려 우리 집에 왔다. 나와 바리에게 먹일 반찬을 싸가지고서.  

그녀는 다시 시내버스 두 번을 환승해 한 시간이 걸려 집에 갈 것이 심란했는지 반찬을 건네자마자 다시 옷을 입고 현관으로 향한다. 난 '어린이집에서 곧 올 마리를 보고 가라'는 이유로 영을 잡아둔다.  

보통 때 같으면 나의 손을 뿌리쳤을 영은 마리 이야기에 주춤한다. 지난밤 새벽, 부둥이며 발차기를 하던 마리의 발을 어여삐 바라보며 키스하던 영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 엄마 영이 누군가에게 키스를 하는 모습을 본 것이 얼마 만일까. 아니 저토록 사랑스러운 눈빛을 한 영을 본 것이 얼마 만일까. 내 엄마 영이 내 딸 마리에게 사랑을 쏟는 그 장면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가끔 떠오를 것 같다. 그 둘의 장면이. 어색하고 낯설고 의아하지만 마음이 일렁이는 장면이다.

 

영은 결국 마리를 보고 갔다.  

예쁘다, 우리 마리 예쁘다. 를 연신 말하며.

 

마리가 울지 않고 잠잘 때 예쁘다는 내 이야기에, 아가는 존재만으로도 사랑받을 자격이 된다는 산후도우미 이모의 말이 떠오른다. 내 엄마 영에게 내 딸 마리는 존재만으로도 사랑스러운 대상인 것 같아서이다.  

 

czars의 음악을 듣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자정이면 익산 원음방송에서 한 시간 동안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다. 팝스 갤러리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czars는 그때 알게 된 밴드이다. 팝스 갤러리는 내게 세상엔 다양하고 좋은 음악이 많다는 걸 알려준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아침마다 아픈 다리를 끌고 식탁 의자에 앉아 일기를 쓰며 듣는 노래들은 그때 알게 된 음악들이다. 고교 시절의 음악 리스트는 조금도 더 나아가지도 않았고, 여전히 나는 그때의 음악을 들으며 그 시절에 머무르고 있다. 수능을 보고 대학에 들어가고 이성친구를 사귀고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지만 음악은 여전히 20여 년 전의 리스트. 하나쯤은 인생의 흐름에도 바뀌지 않는 것이 있어도 괜찮겠지. 

 


왼쪽의 성분 좋은 칼슘제를 먹고 지독한 장트러블에 시달리다 어제부터 오른쪽 칼슘제로 바꿨다. 마그네슘 함량이 절반이다.

다음 주 월요일은 병원에 간다. 한 달간 빼먹지 않고 정성을 다해 약과 영양제를 복용했다.

아, 이번에 알게 된 사실 하나. 장이 안 좋은 사람은 마그네슘이 다량 함유된 칼슘제를 먹으면 설사를 한다는 것.(장트러블로 한 달간 고생하고 며칠 전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칼슘제를 바꾸니 설사를 하지 않는다.)

그로 인해 다시 복기하게 된 사실 하나. 아픔은 아픔을 낳는다.

세상 모든 일엔 교훈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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