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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다혜 Mar 31. 2016

한-콜롬비아 FTA, 콤마(comma)의 여왕이 되다

우리 팀의 에디터들은 각자 현재 돌아가고 있는 FTA 하나씩을 담당하게 되었다. 한-호주, 한-콜롬비아, 한-터키 FTA 가 당시 진행 중이었는데 나는 그중에 한-콜롬비아 FTA를 맡게 되어 수석대표회의와 4차 협상부터 대표단을 따라 출장을 다니게 되었다. 첫 출장지는 워싱턴 D.C. 였다. 미국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던 나는 미국에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한껏 들떠 있었다. 공무여권을 발급받고 미국 비자를 받는 등의 준비작업이 신나기만 했다. 원래는 양 당사국에서 번갈아 교섭을 개최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우리나라와 콜롬비아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가운데 지점인 미국에서 회의를 했던 것이다. 나는 교섭단의 한 서기관님이 꼼꼼하게 챙겨주신 지난 교섭 기록과 여러 자료들을 미국행 비행기 안에서까지 열심히 읽었다. 



드디어 회의 일정이 시작되었고 콜롬비아 측 대표단은 처음 온 내게도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나는 TV와 신문에서만 보던 FTA 교섭 현장에 지금 내가 와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신기했다. 미국에 오기 전 자료를 열심히 읽긴 했지만, 회의 중에 아무리 귀를 기울여 들어보아도 거의 대부분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지난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인 탓도 있었지만, FTA 교섭은 그 내용이 매우 technical 하기 때문에 각 챕터별 배경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세이프가드 조치(safeguard measures, 긴급수입제한 조치), SPS 조치(sanitary and phytosanitary measures, 위생 및 식물위생조치), TBT (technical barriers to trade, 무역에 대한 기술장벽), national treatment (내국민대우), MFN treatment(most-favoured-nation treatment, 최혜국대우) 등등 쉴 틈 없이 쏟아져나오는 전문용어와 약어뿐만 아니라 대화의 맥락 자체를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첫 출장에서 받은 충격이 채 가실 틈도 없이 그동안 밀려있었던 업무를 하느라 정신없이 지내다, 또 다음 교섭을 준비하고 교섭단과 함께 출장을 가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한 번은 내가 일하고 있었던 통상법무과 업무로 유럽 출장을 다녀와 인천공항에 오전 11시에 도착하고는 바로 집으로 가 가방만 바꿔서 다시 공항으로 가서 교섭단을 만나 워싱턴으로 FTA 출장을 간 적도 있었다. 그래서 한 달 중 거의 절반 이상을 외국에 나가 있기도 했다. 그러면서 해외 출장을 갈 땐 공항 면세점에서 홍삼진액을 꼭 사서 출장기간 내내 체력 보충을 하는 요령도 생기고, 유럽-한국-미주를 오가느라 수시로 바뀌는 시차에도 금방 적응하게 되었고, 또 불편해서 잠을 잘 못 잤던 이코노미석에서도 숙면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한 번은 우리과 업무 때문에 교섭단이 먼저 출발을 한 후 나 혼자 후발대로 따라가야 했던 적이 있다. 그땐 콜롬비아의 카르타헤나라는 지역에서 회의가 개최되어, 혼자 거의 30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비행기를 두 번 갈아타고 그곳까지 가야 했다. 태어나서 가장 긴 여정을 혼자 가야 했지만,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미국까지 갈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비행기를 갈아타고 콜롬비아 보고타 공항에 내려서는 뭔가 불길한 예감이 자꾸 들기 시작했다. 공항직원들인데도 불구하고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내 영어를 못 알아듣고, 나는 그들의 스페인어를 하나도 못 알아들으니 정말 막막했다. 나는 내 짐이 옮겨졌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내가 데스크로 가서 보딩패스를 보여주며 내가 갈아탈 비행기를 가리키면서 이 비행기로 내 짐이 옮겨졌는지 확인하고 싶다고 아주 천천히 영어로 여러 번 말했지만, 그 직원은 내가 이 비행기를 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는다고 생각했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어로 뭐라고 말을 하며 손으로 자꾸 탑승게이트를 가리켰다. 주위를 둘러보니 왠지 다들 무섭게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고, 영어로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사실에 흠칫 놀라며 하는 수 없이 비행기에 올라탔다. 카르타헤나 공항에는 자정이 넘어서야 도착했다. 마중 나와계시던 교섭단 중 한 분과 콜롬비아 대사관의 서기관님이 멀리서 보이자 30시간 만에 드디어 말이 통하는 한국사람을 만났다는 기쁨에 눈물이 날 뻔했다. 그런데 역시나 불길한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내 짐이 도착하지 않은 것이었다. 공항직원은 짐이 도착하는 대로 호텔로 가져다주겠다고 하며 호텔 주소를 적고 가라고 했다. 분명히 그 다음날 아침에 도착할 거라고 했던 내 캐리어는 이틀이나 지나서야 바퀴 하나가 부서진 채로 겨우 도착했다. 그 덕분에 나는 짐이 도착할 때까지 다른 여자 직원분들의 화장품, 옷 등을 빌려 쓰는 수밖에 없었고 회의장에도 비행기에서 입었던 편한 복장 그대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 내 인생 중 가장 불편한 이틀이었다. 그렇게 고생을 해서 멀리까지 갔지만 협상이 끝나는 날까지 호텔 밖으로는 저녁 먹으러 한 번 근처 식당에 간 걸 빼고는 한 번도 나가보지 못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회의가 계속 이어졌고, 밤늦게 회의가 끝나면 그날의 교섭 결과를 정리하고 다음날 회의를 준비해야 했고, 나는 통상법무과 일까지 들고 와서 하느라 회의 기간 내내 거의 잠을 못 잘 정도였기 때문이다. 또 건물 밖에서는 FTA 반대 시위 가계 속 있었기 때문에 위험하기도 했다. 


6차 교섭회의는 정말이지 긴장의 연속이었다. 우리 측 대표단도 협상 타결을 목표로 하고 왔고, 언론에서도 이번에 협상이 타결될 것이라는 기대를 담은 기사를 내보냈다. 하지만 상품, 서비스 등 각 분과별로 하루하루 회의가 진행될수록 분위기가 험악해지기도 하는 등 원만하게 해결될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어서 내심 걱정을 했다. 협상에서는 각자의 주장을 피력하기 위해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 하고 내리치거나, 서류를 집어던지거나, 회의장을 나가버리거나 하는 쇼맨십도 때로는 필요하다. 그 외에도 상대방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많은 스킬들을 사용한다. 또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었다가, 우리 측이 관철해야 하는 부분이 나오면 또 강력하게 맞받아치는 등 상대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능력도 필수다. 각 분과 대표인 과장님들의 화려한 협상스킬들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며 그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도 나는 속으로 ‘우리나라 대표단 역시 멋지다’며 감탄을 했다. 축구경기에 빗대자면 우리 측이 원정경기를 간 것이었기 때문에 불리한 측면도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콜롬비아 측에서 회의를 잠시 중단하고 밤 12시에 재개하기를 요청하기도 했는데, 정말 그때까지 내부 회의를 했을 수도 있지만 보통 협상에서 쓰는 하나의 작전이라고 했다. 이른바 버티기 작전이었다.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비행기 시간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가까워져 오면 우리가 조바심이나 빨리 회의를 끝내기 위해 조금 양보하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던 것 같다. 그 다음날 새벽 6시에는 호텔에서 출발을 해야 비행기를 탈 수 있었는데 새벽 2-3시가 다되어도 콜롬비아 측과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결국 6차 협상은 결렬되었고, 우리는 각자 방으로 가 짐을 챙겨 바로 공항으로 향했다. 일주일 내내 회의장에만 있다가 아침에 공항으로 가는 길에서야 겨우 카르타헤나의 풍경을 잠시 구경할 수 있었지만, 아쉬운 마음보다는 우리나라 대표단들의 멋진 모습에 애국심이 절로 가득 해지는 느낌이 더 컸다. 


마지막 7차 협상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거의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여러 나라를 오가며 만나고 회의 기간 내내 하루 종일 회의하고, 함께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한 덕분에 콜롬비아 측 대표단과도 정이 들어, 마지막 협상이 아쉽기까지 했다. 이번에도 역시 거의 매일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회의가 계속되었고, 마지막 날 밤 자정이 다 되어서야 끝이나 그 다음날 아침에 드디어 “한-콜롬비아 FTA 타결”이라는 기사가 나갔다. 콜롬비아 대표단 중 3명의 변호사가 모두 나이가 우리와 비슷해 이제는 거의 친구가 된 듯했다. 회의장에서는 서로 각자의 국익이 걸려있는 일인지라 때로는 목소리를 높여가며 치열하게 협상에 임했지만, 회의장을 벗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친구처럼 사소한 농담도 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도 편하게 나누게 되었다. 지금도 페이스북에서 종종 서로 안부를 묻곤 한다. 


협상타결 후 양측 대표단과 함께. 서울 외교부


협상이 타결되고 문안이 완성이 되면 legal scrubbing(법률 검토)이라는 작업을 한다. 협상의 결과물인 협정문 text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다시 검토하는 작업이다. 사소한 문법 실수에서부터 양 측이 합의한 내용이 정확히 반영이 되어있는지, 그리고 양국의 국내법과 충돌하는 조문은 없는지 등의 법적 검토까지 총체적인 재검토를 한다. 법률 검토는 다시 워싱턴 D.C. 에서 하게 되었다. 일주일의 기간 동안 수백 페이지가 넘는 협정문을 검토해야 했기 때문에, 우리는 또다시 잠은 고스란히 반납해야 했다. 이른 아침부터 양측 대표단이 마주 보고 앉아 회의장 앞 커다란 스크린에 텍스트를 띄워놓고 조문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검토하고 양측의 합의하에 수정을 해나갔다. 점심도 햄버거로 간단히 해결하고 오후에 회의를 재개해 저녁 즈음에야 끝이 나면, 우리는 호텔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잠시 쉰 다음 다시 모여 내일 검토할 부분을 점검하고 우리 측 의견을 정리하느라 새벽 3-4시가 되어서야 각자의 방으로 돌아와서 잠시 눈을 붙이기를 반복했다. 무리한 탓에 과장님은 눈의 실핏줄이 터져 대사관에서 급히 약을 공수받고 일정을 계속 진행하시기까지 했다. 협상 대표단이 우리나라를 위해서 이렇게 고생하는 걸 국민들이 과연 알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콜롬비아 FTA 교섭대표단과 함께. 워싱턴 D.C.


그 과정에서 나는 무엇보다 완성도 있는 협정문을 만드는데 일조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내 나름대로 열심히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려 노력했다. 그 전에 한-미, 한-EU FTA 오역 수정 작업을 하면서 영문의 오류 또는 모호한 구조 때문에 한국어 번역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경우를 많이 보았다. 특히 수식 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부분을 번역할 때 제일 까다로웠다. 협상을 하다 보면 때로는 의도적으로 모호한 수식 관계를 그대로 남겨두는 경우도 있고, 양측의 입장 대립으로 인해 오류도 어쩔 수 없이 수정을 못하고 서명을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그렇다 보니 그런 부분에 대한 한국어 번역은 제대로 하기가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 법률 검토 때 최대한 그런 부분을 줄이면 보다 좋은 한국어 번역본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수정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발견할 때마다 열심히 말씀드렸다. 과장님은 내 의견을 정말 많이 존중해주셨고, 최대한 반영해주려 하셨다. 그 과정에서 영문의 모호한 수식 관계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콤마(“,”)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여러 개의 대상을 나열할 때 “and” 앞에 쓰는 serial comma 뿐만 아니라, 수식 관계를 명확하게 구분하기 위해서도 콤마를 많이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에는 콤마에 너무 집중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해 머쓱해지기도 했다. 한 챕터에서 수정한 콤마만 수십 개가 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중간에 잠시 점심을 먹을 때 옆에 앉은 콜롬비아 측 변호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기대해. 이따 오후엔 콤마들이 훨씬 더 많이 몰려올 거야.”하고 농담을 했더니, 그 변호사는 크게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하면서 “I like to work this way.”라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그만큼 법률문서에서 콤마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멈출 수 없었다. 법률 검토기간 내내 회의장에서 스크린을 보며 열심히 “저기 콤마는 빼고, 여기에는 콤마를 넣고...”를 외쳤더니, 콜롬비아 측 변호사들이 나를 

“comma queen(콤마의 여왕)”


이라고 농담 삼아 부르기까지 했다. 나중에는 챕터 하나에 대한 논의가 끝나면, 과장님께서 이제부터는 comma session을 가지라시며 온전히 콤마에 대한 검토를 내게 맡기시기도 했다. 


일주일 남짓 계속되었던 정말 physically demanding 했던 법률 검토가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잠시 틈을 내어 대표단과 함께 근처를 돌아볼 기회를 가졌다. 예전에 워싱턴에서 공부를 하셨던 과장님 덕분에 우리는 편하게 둘러볼 수 있었다. 링컨기념관에도 갔는데, 벽에 링컨 대통령의 statement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가 “어, 여기, 콤마!”를 외쳤고, 우르르 몰려가 보니 내가 회의 기간 내내 그렇게 주장했던 serial comma 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던 것이었다. 우리 모두는 서로를 바라보며 크게 웃었고, 그 앞에서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FTA 교섭회의를 따라다니며 많은 것을 보고 배웠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우리나라 외교관들의 애국심과 사명감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한 번은 우리 측 대표단 중한 여자 서기관님이 우리 측 의견을 전달하는데 원래 워낙 목소리도 작고 얌전한 성격이라, 작은 목소리로 얘기하는 걸 콜롬비아 측 대표단이 잘 알아듣지 못하자, 우리 측 과장님이 목소리를 크게 하고 얘기하라고 조금은 무섭게 얘기를 하셨다. 나는 속으로 그 서기관님이 무안했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나중에 저녁을 먹으러 가서 과장님의 얘기를 듣고는 크게 감동했다. 비단 작은 목소리 때문에 그 서기관님을 나무란 게 아니었던 것이다. 과장님은 일단 협상장에 나오면 “나는 우리나라를 대표해서 나왔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나라는 한 사람의 개인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얼굴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측 의견을 전달하는 것도 우리나라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작아지지 않도록 필요한 경우에는 강력하게 어필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날 들었던 과장님의 말씀을 요즘도 통역하러 나가면 회의 시작 전에 마음속으로 되새기곤 한다. 


“우리나라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들의 말을 정확한 영어로 전달할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지.” 






[법과 영어 연구소 아우디오 랩]

https://www.instagram.com/audiolab.chl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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