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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치 Mar 21. 2016

'적당함' 그 속에서 헤엄치다.

부족함과 과함의 부조화

전히 적당히라는 그 말이 나에겐 참 어렵다.

아니 현존하는 모든 사람들의 교집합이 아닐까도 싶다. 사람들은 직장 생활에서도 사람 관계에서도
감정에서도 에서도 등등 여러 상황들에서 적당히라는 말을 수도 없이 뱉어댄다. 심지어 을 향해 달려가는 나에게 적당히 하라며 걱정인지 시기인지 알 수 없는 물음만을 남기기도 한다.

직장생활을 할때에는 "야 너무 눈에 띄지도 말고 너무 뒤로 쳐지지도 말고 그냥 적당히해."
사람 관계에서도 "give & take 도 좋지만 너무 그리 계산적으론 하지마. 적당히 해~"
감정에서도 "너무 깊게 좋아하거나 미워하지도 마. 다 감정낭비야. 그냥 그러려니 적당히 해~"
돈에 대해서도 "뭘 그렇게 열심히 벌어? 안쓰럽다 안쓰러워. 적당히 벌고 적당히 써!"

말이야 쉽지 그게 말처럼 되던가?
우습지만 나 역시 적당한게 무엇 인지도 잘 알지 못하면서 주변인에게 터줏대감마냥 설교를 늘어 놓기도 한다. 도대체 그 적당함의 기준이 뭐길래 이리도 복잡스러울까? 생각하기 나름이라던데 좋고 싫음이 분명한 나에겐 '적당한 선' 이라는게 밤새 손도 못댈 수학문제마냥 어렵다. (차라리 수학문제가 나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 정도다 싶으면 상대방은 아니라 하고, 상대방이 이 정도면 되겠어! 라고 하면 이번엔 또 내가 말썽이니 말이다. 연인관계의 공식같은 '밀당'처럼
'적당' 이라는 녀석도 가늠이라도 할 수 있게 수치화 되어 있었음 좋으련만 애석하게도 나에겐 '경험'에서 비롯된 신념과 눈치와 몹쓸 감(feel)뿐이다.

그렇다면 그 풀리지 않음에서 뫼비우스의 띠 마냥 종종종 제자리 걸음만하며 답답한채로 돌고 돌아야 할까? 꼬리에 꼬리를 물던 나는 생각의 각도를 조금 바꿔보기로 했다.



아직 방향을 채 잡지 못했다면, 적당함의 기준이 미숙하다면 제 자리 걸음을 하는 것 또한 좋은 경험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리저리 실패 아닌 실패를 맛보란 뜻이다. 어차피 수치로 따져낼 수 없는 가치관이다. 내 신념을 찾아가는 길 중 하나라고 마음 편히 생각하라고 내 자신에게, 조금 더 나아가 당신에게 말해 주고프다. 세상에 버릴 경험 하나 없다고 하지 않던가! 분명 훗날 어디선가 반짝 할 날이 있을 것이다. 혹 반짝 하지 않더라도 번쩍! 하고 내 머리를 일깨워 줄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또 하나는 내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상황들에 대해 적당해야 한다는 강박을 한겹 걷어내 버리자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갖고 싶은 것,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가 지켜내고 싶은 것, 내가 싫어하는 것, 미워하는 것, 들춰내고 싶지 않은 것. 즉, 감정이 깃든 모든 것 앞에서 적당히가 될 리가 없다. 그런데 구태여 적당함 속에 묶여있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감정이라는 것 자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소모적일 수 밖에 없는데, 적당함을 뛰어넘어 가능한한 조금 더 열정적으로 미친듯이 태워 날려도 보고 깊숙해봐야 새로운 것을 꿈꿔보고 그려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야 다음 것에 대한 깊이를 궁금해 참맛을 보지 않을까 싶다.

다만, 여기서 오해 말아야 함은 사사건건 이런식으로 모든 일을 마주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적당함'의 기준은 상황마다 다를테고 그 상황들은 예상할 수 없을 만큼 무궁무진 할테니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감정이 깃든 일들에 대해서는 적당함 속에 과함과 부족함의 부조화를 쿨하게 인정해 주자는 뜻이다. 나 그리고 당신은 적당함 만으론 살아갈 수 없는 그런 존재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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