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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치 Aug 12. 2019

서른의 축사

고유한에세이 세번째시간



드디어 오늘이다.
서로의 흑역사를 샅샅이 알고 있는, 판도라의 상자 같은 친구 보경이 결혼을 한다. 게다가 나는 신부 측 축사를 맡았고.

주춤거리며 어렵게 부탁을 하던 보경의 모습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너무 쉽게 승낙을 해버렸나. 지금 이렇게 달달달 떨고 있을 나를 예상했다면 근사한 밥이라도 얻어먹고 생색을 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항상 서로를 위하고 보듬어주기를 바라며 오늘은 친구로서 꼭 전하고 싶은 말을 몇 자 읽어봅니다.”

후. 대망의 고비 단계다. 몇 번이고 연습을 한 부분인데 다음 단락에 ‘보경’의 이름을 부를 때면 매번 울먹거렸다. 차라리 연습을 말걸 후회했다. 이건 마치 어디서 걸려 넘어질지 미리 아는 경주나 다름이 없었다. 울먹거릴 때마다 웃긴 상상을 하라던 지영의 말은 새까맣게 잊은 채 내 머릿속은 하얗게 질려갔다. 누가 입을 틀어막은 것처럼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보! 보만 외쳐보자...!’


10초 30초 50초... 체감상 1분 정도의 정적이 흐른 것 같다. 더 이상 입을 떼지 못하면 내가 이 결혼식을 망쳐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조급해졌다. 제발 제발... 입아 떨어져라.


“보... 보경아”

사실 20대까지 회사 선배다 동창이다 잦은 결혼식장을 오며 가며 들었던 의문이 있었다. 울먹거리며 편지를 읽거나, 축사를 하며 울거나 바들바들 떠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저렇게 슬플까? 그냥 저 앞에 서는 게 떨렸겠지~ 하고 말았다.

절대적으로 내가 틀렸다는 걸 이제야 알았는데, 떨리는 건 둘째치고 보경과 함께 채웠던 10대, 20대 추억들이 아른거렸다. 중학교 땐 코앞의 학교를 두고 굳이 같이 가야 한다며 지각을 하더라도 서로를 기다렸고, 우정 노트를 돌려 적고, 말도 안 되는 별명을 서로에게 지어주며 소속감을 다졌다. 지난 구남친은 물론이고 질리게 본 주사들은 우리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어 주었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범위가 방대해져 갔다. 사고 후 호주에서 귀국했을 때 유일하게 엉엉 울며 안아주던 보경의 눈물이 자꾸만 내 눈에서 흐르는 듯했다. 오랜 시간을 공유한 사람과의 힘이 이토록 강한 것이다.

안 그래도 작은 키가 더 작아 보이고, 어둠 속의 핀 조명이 내 몸을 태워버릴 것 같았다. 겨우 보경의 이름을 부르고 차근차근 읽어 내려가는데 이게 타령인지, 축사인지 분간이 어려운 목소리의 높낮이는 제멋대로였다. 결혼식장에 앉아있는 모든 사람에게 미안했다.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더 크게 귀를 울렸다. 울먹이며 읽는 글의 속도는 얼마나 느긋한지 애가 탔다. 편지지를 잡고 있던 손은 글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떨렸고, 이대로 쓰러져 실려나가고 싶었다. 그 와중에 보경의 얼굴을 힐끗 올려다보니 흐뭇하게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렇게 죽겠는데 웃고 있다니! 알 수 없는 억울함과 안도감에 속력을 내 달렸다.


“찰나같이 지나갈 결혼식이지만 이 순간을 잊지 말고 살아가길 바랄게. 두 사람 결혼 진심으로 축하해. 너의 영원한 친구 승연이가”

박수가 터져 나오고 바들거리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애써 여유로운 척 웃으며 착석했다. 축사는 두 번 다신 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30분도 채 되지 않는 간결한 결혼식이 끝났다. 마지막 단체 촬영까지 마친 후 긴장이 풀렸는지 뭐라도 먹고 싶었다. 지영과 함께 연회장으로 가는데 뒤에서 웅성 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야 아까 여자분 축사하는데 나 울었잖아 왜 이렇게 슬퍼? “
“그러니까! 나도 울었잖아...!”
“나도 나도!”

지영이 슬쩍 뒤 돌아보더니 “신랑 측 친구분들인가 봐” 라며 웃는다.

안도감이 밀려왔다. 눈물이 없었다면 과연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진심이 가 닿았을까. 보경과 나 사이 수많은 눈물이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나 혼자가 아닌 우리 사이에 억만 겹의 눈물 덕에 이룬 축사였다. 좀 전까지 훌쩍이며 울먹이던 축사가 더 이상 미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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