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치 Aug 26. 2016

여름의 마지막이 주고 간 선물


여름


유독 더웠던 2016년의 여름이 가고 있다. 매일같이 켜놓았던 미풍의 선풍기 바람이 차게 느껴지는 걸 보니 가을이 다가오고 있음에 틀림없다. 유월에 태어나 어느 계절보다 여름을 사랑하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있어도 등에서 땀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인상이 절로 찌푸려지는 폭염에 '올해 여름은 제발 빨리 가게 해주세요.' 라며 몰래 기도를 하기도 했다.


그랬던 여름이 그냥 가기 아쉬운지 나에게 작은 선물을 남겨주었다. 괜히 지나가는 여름을 조금 더 붙잡고 싶은 건, 여름을 충분히 즐기지 못해 씁쓸한 마음도 있지만 이미 내 방 이불속까지 갑자기 성큼 찾아온 서늘한 가을바람 탓을 하고 싶다.



우리 집은 복도식 아파트이다.

밤늦게 귀가할 땐 벽 모퉁이쯤 누군가 서있을 것 같은 느낌에 섬뜩하기까지 한 복도식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내려, 중문을 열면 탁 트인 하늘을 매일같이 만날 수 있는 복도식 아파트.

비 오는 날, 방 창문을 열면 가까이서 후둑후둑 내리는 비의 감성을 바로 느낄 수 있는 복도식 아파트.


이 복도식 아파트와 여름의 끝자락의 조화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산책을 마치고 익숙한 발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타 버튼을 눌렀다. 띵- 하는 소리에 맞춰 문이 열리고, 하늘이 환히 보이는 중문을 열고 집으로 가려던 찰나,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첫 번째 집부터 시작해서 우리 집을 지나 세 번째 집까지 전부 다 현관문이 열려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 여름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것 마냥 우리층의 현관문이 전부다 열려있었다. 사실 우리 집은 에어컨을 놔두지 않았다. 그래서 자주 현관문을 열어두었는데 양 옆집까지 현관문을 열어둔 광경은 꼭 처음이었다. 현관문을 열어 두었다는 것은 무방비 상태를 뜻한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쌓인 이웃들 간의 믿음을 엿볼 수 있었다. 요즘 같은 사회엔 이웃주민들 간에 무관심만 가득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편견이 여름의 더위와 함께 녹아갔다. 신기한 기분으로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그때 마침, 복도에 서 계시던 옆집 아주머니가 편안한 차림으로,


"이제 왔어요?"


라며 먼저 인사를 건네신다. 어정쩡하게 쑥스럽다는 듯 인사를 얼버무리는 나. 참, 현관문이 뭐라고 그리 꽁꽁 닫아두고 살았는지, 마음의 문이 뭐라고 그리 꽁꽁 닫아두고 살았는지 인사하나 제대로 못하는 내가 안타깝고 창피했다. 평소에 넉살 좋다 칭찬을 받으면 뭐하나, 가까운 이웃의 가벼운 인사조차 어색해하는데.



해가 뉘엿뉘엿 지면서 하나 둘 현관문도 닫히기 시작한다. 내가 좋아하는 복도식 아파트의 하늘을 만끽하기 위해 현관문을 다시 열었다. 왜인지 모르게 오늘이 마지막 여름의 하늘일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아, 깊게 들이마셔야지 여름의 마지막 온기.


하늘을 올려다보니, 한동안 고생 많았다고 곧 다가올 가을과 잘 지내보라며 손을 흔드는 듯했다. 양 옆을 둘러보니 이내 굳게 닫혀있는 현관문들이 보인다. 예전 같았으면 별 감흥도 없었을 텐데, 오늘만큼은 닫힌 현관문 틈 사이로 아직 집안 곳곳에 남아있을 여름의 냄새가 풍겨 나와 나를 웃음 짓게 만들었다. 그 여름의 웃음으로 내일 아침에는 내가 먼저 인사하리라 다짐도 해본다.


푹푹 찌는 듯한 여름의 찜통더위도 쓸모가 있어 보였다. 코 앞으로 다가온 가을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고마웠다. 땀을 뻘뻘 흘리게 해 준 여름도, 여름 내내 흘린 땀을 마르게 해줄 가을에게도-





조금 더 날 것에 가까운 하치의 하루 비우기가 궁금하시다면

-> 하치 인스타그램


ⓒ 2016. 하치 all rights reserved.

매거진의 이전글 달빛 나누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