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 완화 없는 공정성은 사상누각
때 아닌 계급 논쟁이 온 나라를 달군지도 두 달, 공정성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 그러나 정작 논쟁의 선봉에 서야할 가진 것 없는 노동자와 서민은 무관심하다. 오히려 '조국 사태'의 당사자들과 비슷한 경쟁 관계에 있을법한 이들이 논쟁의 중심에 섰다. 대학조차 신분 세습의 도구이자 넘지 못할 장벽이 된 마당이니 소외된 계급은 이제 비판도 질투도 버겁다.
이미 2000년 전 전한 시대의 사마천도 '부의 상대적 차이가 10배 정도이면 질투의 대상이지만, 1만 배에 이르면 스스로 그 부자의 노예가 된다'고 간파하지 않았던가. 치열한 경쟁 판의 한편에 포기에 단련된 계급이 공존하는 우리 사회를 보면서 역시 '자본주의교'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실감을 하게 된다.
경쟁 사회에서 개인은 철저히 혼자여야 한다. 개인의 이익은 공동체의 이익과 어울리지 않는다. '이제 사회는 없다. 오직 개인과 가족만이 있을 뿐이다'라던 영국 대처 수상의 신자유주의적 모토는 순식간에 모든 개인을 분리함으로써 사회를 철저한 경쟁 구도로 이끌었다. 경쟁이란 상대를 이겨야 하는 게임이니, 법의 경계는 늘 유혹의 영역이 된다. 조국 사태로 드러난, 군사 작전을 연상케 한 입시과정의 부모·자녀 간 합동 작전, 일반인에겐 낯선 사모펀드 등을 활용한 복잡한 자산 운용의 실상을 지켜보면서 '계급을 지키려면 저 정도 몸부림은 해야 하는구나'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교리에 충실했던 계급의 일상은 가진 자의 우아함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최선을 다해 자신의 계급을 자녀에게 물려주려는 강박감 때문이다. 먹고 사는 문제만으로도 버거운 경쟁 밖 저편의 계급에 견줘도 그다지 여유 있어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자본주의교가 각자에게 부여한 임무였고, 그래야 자본의 구도가 강화될 수 있기 때문일까? 조국 사태를 바라보는 계급들의 반응에서 우리는 경쟁 사회의 또 다른 본질을 보게 된다. 바로 '경쟁하지 않을 자유'가 없는 경쟁 사회의 무기력증이다.
역사는 거대한 전환의 변곡점마다 이해 당사자들 간 격렬한 대립과 진통을 겪어 왔다. 중세 봉건제에서 중상주의를 거쳐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지주와 자본가 사이에 격렬한 세력 싸움이 있었다. 가담자는 적어도 무언가 지킬 것이 있는 계층들이다. 중세의 농노나 자본주의의 임금 노동자처럼 경쟁할 조건을 갖추지 못한 계급들은 순응 외에 택할 것이 없다. 그 순응은 저 편의 가진 자 계급을 강화하는 데 필요한 미덕이다.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기반이 된 협업도 순응의 미덕을 기반으로 한다. 카를 마르크스는 협업이 분산된 독립 노동자나 소규모 장인의 생산과정과 대립하여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독특한 역사적 형태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이는 현실의 노동과정이 자본에 종속됨으로써 경험하는 최초의 변화였으며, 수많은 임금 노동자가 동일한 생산과정에 동시에 고용되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출발점이 되었다(카를 마르크스 <자본Ⅰ>).
70만 건에 이른다는 조국 장관 관련 기사들은 많은 가짜 뉴스를 양산해내며 온 나라를 달구었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대부분의 실상은 뉴스를 읽는 이의 상대적 패배감을 자극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극도로 불공정한 구조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그대로다. 그러나 누구보다 진보적일 것이라고 기대했던 인물이 바로 그 불공정 구조에서 혜택을 누리는 쪽에 있었다는 사실은 개인의 잘잘못을 떠나 분노감을 촉발하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그것으로 끝이었다는 데 있다. 분노를 통한 문제의식과 자각은 필요 없었고, 오직 분노의 확대 재생산만이 보수 신문들의 목적이었다.
진보 신문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불공정한 구조에서 드러난 현상만을 주목할 뿐 근본적 대안을 말하는 기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왜일까? 해법은 복잡하고 복잡한 만큼 설명도, 읽는 이를 이해시키기도 난감한 무력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입시 제도를 공정하게 개선하라는 대통령의 지시에 쉽게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심정과 같다. 우리 사회의 자본과 깊숙이 연결된 교육 제도의 문제가 입시제를 고치는 것만으로 쉽사리 풀릴 것이라 기대하는 이도 없거니와, 정상화를 기다릴 인내심도 이미 한계에 와 있다. 경쟁 사회가 낳은 무력감은 공정성 의지를 더욱 취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계급 세습 문제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 문제지만, 비단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공공의 시장질서와 이익을 위한다는 명분하에 해마다 열리는 G20 정상회담장 밖에는 어김없이 세계 시민과 NGO들의 반(反) 세계화, 반(反) 자본주의 시위가 함께 열린다. 특히 복면 시위대까지 대거 등장해 격렬한 반 자본 시위를 이끌었던 2017년 독일 함부르크의 G20 정상회담 때는 개최국인 독일 메르켈 총리가 바짝 긴장하기도 했다. 2008년 세계적 금융위기 극복 방안을 논의하면서 정상회담으로 격상된 G20 정상회담은 거시경제정책, 금융규제 관련 등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정책 방향을 의제로 한다. 그러나 공공의 이익을 위한 시장질서라는 표면적 목표와 달리, G20 자국의 경제지표 개선을 위한 치열한 각축전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해마다 정상회담장 밖에서 회담을 방해하는 위험천만한 시위가 함께 열리는 이유가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현장에서 외치는 그들의 주장은 '반자본주의', 즉 자본주의를 반대한다는 것이다. 너무 뜬금없고 추상적이지 않은가? 10~20년도 아닌 수백 년 된 자본주의에 반대한다? 철갑처럼 공고해진 자본주의를 무슨 수로? G20 정상들을 향한 이들의 외침은 우리가 겪고 있는 조국 현상의 논점에서도 비껴나 있다. 조국 논쟁이 구체적 현상에 주목한 반면, 반자본주의 시위대는 실현 가능성조차 모호하게도 체제의 근간을 건드리고 있다. 왜일까. 그리고 자본주의를 대신할 어떤 대안이 있기는 한 것일까?
세계의 수많은 사람이 갈등, 반목, 소외, 궁핍, 오염 등에 시달리고 있다. 인간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는 극심한 빈부격차(양극화), 끝없는 경쟁 체제로 인한 스트레스·정신질환·자살, 그리고 자원의 낭비와 과용으로 인한 심각한 환경오염, 기아, 전쟁은 도대체 왜 발생한 것이고, 왜 개선되지 못할까. 인간의 이기적 심리에서 오는 광범위한 도덕적 해이 때문일까. 그러나 이것들을 온전히 인간의 심성으로 돌리기엔 무리가 있다.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우리의 일상을 천천히 따라가 보자. 우리의 생존 터전인 조직(기업)이 나타나고, 그 기업의 가면을 벗기면 자본의 존재가 드러난다. 우리의 하루 일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더듬어 들여다보면, 매 순간 자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자본(대형 건설사)이 제공하는 집, 자본이 만든 안락한 침대에서 눈을 뜨고, 자본이 만들어낸 휴대폰을 확인하는 것에서 하루를 시작해, 우리는 자본이 만들어 낸 온갖 전자기기, 기구, 식품, 플랫폼을 이용하며 하루를 보낸다. 자본이 만들어낸 자동차를 타고 그 자본의 집(회사)에 출근해 자본을 위해 일하고, 다시 자본이 제공한 각자의 집으로 퇴근한다. 이런 구도는 임금노동자가 아닌 자영업자나 프리랜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자본에 포위되어 살고 있다. 자본의 사슬이 붕괴되거나 일부라도 삐걱거리면 우리 삶도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직접 지시하고 명령하는 자가 없어도 사회 전반에 깔린 자본의 인프라를 통해 그 명령을 따르고 있다. '그래서?'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복되는 공정성 시비, 무한 경쟁으로 야기되는 빈부격차, 학벌 경쟁, 신분 세습 등 우리 사회가 겪는 대부분의 문제가 자본의 축적 욕망 때문이라면 어떨까? 물론 자본은 극히 일부에게만 승진이나 후한 연봉을 보상함으로써 자부심을 자극한다. 우리의 학벌 경쟁은 애석하게도 이런 자본의 일상에서 좀 더 풍요롭게 누릴 물질적 조건을 쟁취하는 싸움일 뿐이다.
우리의 교육 시스템은 어떤가? 이 '뿌듯한 자부심'을 위해 끝없는 경쟁에 익숙해지라고 부추긴다. 누군가가 조금 더 가져가고 더 잘 살기 위해 반드시 누군가는 처참하게 희생되는 치열한 경쟁 구도는 공정 경쟁이라는 그럴듯한 외형으로 포장된다. 자신의 몸을 던져야만 살아갈 수 있었던 수많은 '김용균들', 최소한의 환경 조건도 부정된 채 열악하고 밀폐된 공간에서 쉬고 먹고 일하면서도 다른 계급의 눈치를 봐야 하는 수많은 청소 노동자들의 문제로 우리 사회가 이렇게 뜨거운 적이 있었던가. 극성스러운 경쟁적 계급 사회에서 외면 받는 많은 문제들이 과연 반자본이 아닌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을지 의심하게 되는 이유다. G20 회담장 밖 시위대가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이는 반자본주의를 꾸준히 이슈화하는 이유는 이런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반자본의 대안은 무엇일까? 당장에 딱히 대안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우선 자본주의 체제의 심각한 실상을 세계에 알려 문제를 인식하게 하는 것, 도대체 자본주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 많은 문제들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그래서 현재 신자유주의의 방향과 방법은 왜 수정되어야 하는지를 알리자는 것이다.
세계의 거대 자본이 투자 전문가들의 매개 하에 어떻게 가난한 나라와의 거래로 폭리를 취하고 노동을 착취하며 무분별하게 환경을 파괴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 오스트리아의 다큐멘터리 영화 <움켜쥔 땅, 2015>은 자본의 실상을 고발한다. 자본 종속이 가속화하면서 개인의 삶이 파괴되어 가는 캄보디아, 외국인 자본의 급격한 유입과 민영화로 위협받는 루마니아의 농촌, 식량 부족에 시달리는 국민이 현대판 노예로 전락해가는 시에라리온의 모습들을 통해 우리는 앞서 간 나라들의 자본주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설탕 공장에 땅을 빼앗기기 전에는 쌀농사를 지었어요. 사는 데 부족함이 없었죠. 소금과 식용유만 사면 됐어요. 그런데 지금은 쌀을 사려고 그 설탕 공장에서 일해야 해요. 애들까지 거기서 일해요." 그들은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 어느 날 갑자기 쫓겨났다. 캄보디아 프놈펜의 평온했던 한 시골 마을이 불도저에 밀려 261가구가 불태워진다. 한 상원의원이 소유한 설탕 공장이 마을 주민을 몰아내면서 평화는 깨지고 주민의 노예 생활이 시작된다. 국가 권력은 기득권에게 특혜를 주고, 기득권은 주민을 삶의 터전에서 몰아내고 공장 노예로 삼았다. 이렇게 생산한 값싼 농산물은 부자 나라의 무관세 혜택에 힘입어 다국적 대기업의 배를 불린다. 다이아몬드, 커피, 코코아 생산에 투입된 아프리카, 중남미 아동의 노동 착취 현장은 이런 자본의 속성 말고 설명할 길이 없다.
선진 유럽(EU) 국가의 가정에 배달되는 달콤한 설탕과 친환경 원료는 폭력과 노동 착취 등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 경제 체제에서 나온다는 무거운 진실을 영화는 말한다. 이 외에도 거대 기업들이 생명공학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유전자 조작 식물들을 광범위하게 생산해내기 위해 멀쩡한 농민을 몰아내고 착취해가는 과정의 영화 <유전자 룰렛: 생명을 건 도박, 제프리 스미스 감독>도 자본의 폭력성을 고발한다. 그들이 자국 내에서 반대 여론에 부딪치자 약소국가들의 권력자들과 손잡고 농민들을 점령해가는 과정은 어떤 물리적 전쟁보다 폭력적이다.
경제 규모 세계 12위가 된 우리나라의 사정도 자본주의 시장 경쟁의 폐해에서 자유롭지 않다. 1등이 아니면, 또는 상대를 이기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무한 경쟁의 구조는 수많은 사람을 패배자로(실업자 또는 저임금자) 만들어 사실상 도태시키고 있다. 이긴 자의 승리감은 영원할까? 그들도 경쟁에서 밀려 패배자로서 낙인찍히지 않으려면 경쟁을 멈출 수가 없다.
G20 회담장 밖 시위대의 구호가 왜 '일자리를 늘려라', '복지를 확충해라', '전쟁과 기아를 해결하라'와 같은 개별적 사안의 구호로 끝날 수 없는지, 분명해지지 않는가?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해결로는 본래의 궤도로 회귀하려는 이 자본의 관성을 막을 길이 없다. 레일 위에서 끝없이 운동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영화 <설국열차>의 모습과 같다. 오늘날 인류가 생산하는 물자는 차고 넘칠 정도지만, 자본은 그들의 거대한 몫을 따로 챙겨둔 채 나머지 몫으로 수많은 사람을 경쟁시키면서 돌아간다.
18세기 초 버나드 맨더빌은 '자본의 축적은 프롤레타리아의 증식'이라는 명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카를 마르크스, <자본I>). "노동자들을 굶어 죽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에게 저축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아무 것도 주지 말아야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일하는 사람을 부지런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요인은 '적당한 임금'이다. 너무 적게 주면 기질 상 무기력해지고 절망감에 빠지며, 너무 많이 주면 무례하고 게을러진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사회에 행복을 주고 인민을 궁핍 속에서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대다수 사람을 완전한 무지와 빈궁 속에 빠뜨려둘 필요가 있다." 초기 자본주의 이후 인류는 엄청난 물적 풍요를 이루었지만 300년이나 지난 지금의 노동자는 300년 전 모습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치열한 경쟁의 이면에 여전히 그 시대의 순응이 숨 쉬고 있는 것도 그대로다.
고전파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공통의 이익만 확인되면 즉각 동맹하는 자본의 속성과 달리 노동자는 그 환경적·경제적 취약성 때문에 단결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임금 노동자의 취약성을 극복할 방안은 없을까? 영악한 자본이 인간 공동체의 자연스러운 협동 체계를 효율성과 경쟁 체제의 기반으로 처음 차용한 생산 방식이 협업이었다. 다시 우리가 자본의 협업을 모방해 경쟁 대신 협동의 사회를 복구할 차례다.
조국 사태는 또 다시 공정성 시비를 불렀다. 이참에 친일 잔재의 무리들과 보수 야당은 물론, 오랜 적폐 집단으로 지목돼온 검찰까지도 조국 국면을 경쟁의 레이스로 몰아가고 있다. 그런데 공정한 기준만으로 우리는 계급 사회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까? 대통령의 교육 개혁 의지가 경쟁 사회의 폐해를 극복하고 기회 균등의 사회로 이어질지는 의문이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는 아무리 공정한 기준이 작동해도 다수의 낙오자가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공정한 기준이 작동했으니 낙오자들을 버리면 문제는 해결될까?
경쟁의 완화 없는 공정성 기준만으로 끝없는 계급 욕망을 잠재울 수는 없다. 경쟁에서 자유로워지는 방향의 교육 개혁, 자본의 과도한 경쟁 원리로부터 자유로운 교육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 그러려면 대학과 자본 간의 깊숙한 연결 구조를 단절시킬 과감한 정책이 필요하다. 또한 경쟁 사회의 물적·인적 자본을 넘어 공공의 자본과 사회적 자본을 생각할 때다. 경쟁 완화를 위한 복지 정책과 사회안전망은 더욱 확충해야 하며, 이를 기반으로 사회의 공동 가치를 실현해나갈 방향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질주하는 자동차 경주에서 사망 사고가 빈번한 것은 당연한 결과다. 차량의 견고함 정도에 따라 다치고 사망하는 운전자가 달라질 뿐, 사망자 수는 줄지 않는다. 이 상황에서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공정성일까, 감속일까? 빈번한 사고를 방지하려면 경쟁의 완화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공정성만으로는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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