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백 의혹도, 공천개입 의혹도 규정이 없어 처리할 수 없단다. 도대체 650조 예산으로 돌아가는 대한민국 법체계가 이렇게 허술하다는 게 믿어지는가? 영세한 조직에서나 나올법한 '관련 규정이 없어서..'라는 탄식이 경제규모 세계 12위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
나라를 시끄럽게 달구고 있는 이 청탁금지법(일명 김영란법)은 언제 어떤 이유로 제정되었을까? 불과 10여 년 전 기억으로 되돌려 보면 알 수 있다. 교육현장에서는 촌지문화가 일상화 되었고, 뒷돈이 들어가야 관공서의 인‧허가 등 행정이 돌아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우리사회는 뒷돈 관행들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특히 2010년 초반을 뒤흔들었던 그렌저검사, 벤츠검사 등 상상을 초월할 액수의 뇌물들이 오갔던 검찰 발 비리사건들이 폭로되면서 사회적 분노를 촉발시켰다. 그런 분위기에서도 여전히 관행을 고수하려는 막강한 저항은 있었지만, 그 저항을 뚫고 탄생한 것이 바로 김영란법이다. 우리는 그 김영란법의 제정 필요성을 촉발시킨 당사자였던 검찰의 손에서 다시 그 법이 무력화되는 것을 보고 있다.
작은 조직일지라도 규정 타령이나 하며 문제를 덮는 일은 드물다. 조직이 망하도록 놔둘 수 없기 때문이다. 법체계가 미비하더라도 인간은 '합리적 판단'을 통해 문제를 처리하며 자신과 조직을 지켜내려 한다. 인간에게 그런 능력이 없었다면 개인도, 공동체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비록 작은 조직이지만 여전히 살아남았다는 것은 적어도 그런 합리적 기준들이 작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물며 구멍가게도 아닌 650조 예산으로 돌아가는 대한민국 조직에서 온 나라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굵직한 사건들을 판단할 규정이 없어 처리할 수 없다는 황당한 논리로 문제를 덮으려 한다. 권력을 이용할 의지도 없으면서 그저 여염집 이웃에게 선심 쓰듯 고가의 선물을 건넸단 말인가? 왜 이 정부에서는 유독 아무 이유도, 어떤 의도도 없는 행위들이 그리도 많은가.
검찰 논리대로라면 10년 동안 잘 지켜져 온 김영란법은 하루아침에 무력화된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지난 시절 교육현장에서 관행처럼 흔했던 촌지봉투들이 자기 자식 성적을 올려달라고 건네졌겠는가? 성적 조작은 일반적으로 가능한 일도 아니다. 단지 내 자식에게 격려라도 한마디 얻고자 하는 작은 바램에서였다. 그러나 그런 행동들이 경쟁적으로 일어나면 결국 부패로 발전하게 될 것임을 고려해 유치원 교사들조차 김영란법을 적용하게 된 것이고 실제로 교육현장에서 촌지문화를 거의 사라지게 했다. 작은 청탁 가능성들조차 차단하려는 법적 의지였다. 그런데 검찰이 주장하는 당사자성과 직무관련성 논리대로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앞으로 학부모들이 담당교사에게 촌지를 건네고 싶다면 해당 교사 말고 교사의 배우자나 가족에게 건네주면 그만이다. 어떤 언급도 하지 말고 은근한 눈빛으로 촌지만 건네준다면 법 위반을 피해갈 수 있다. 순식간에 김영란법 이전의 촌지 관행으로 돌아가겠지만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 이 얼마나 편리한 해석인가!
법과 원칙이 강조되었던 또 다른 사례들을 보자. 우리는 물류대란의 주범으로 지목되며 처참히 무너졌던 화물연대 파업과 대우조선해양 파업을 기억한다. 생명을 지킬 수준의 임금, 도로 위의 안전을 지켜낼 수준의 임금을 보장해달라는 파업이 공권력의 위협으로 진압되었던 2022년의 일이다. 개인사업자들인 지입차주들에 업무개시명령이라는 모호한 규정을 들이대며 빨갱이 색깔론까지 입혀 고강도 압박이 이뤄졌던 해였다. 입으로는 법과 원칙, 행동으로는 ‘힘과 권력’으로 밀어 붙였더니 대통령의 지지율도 함께 올라갔고 생존파업, 안전파업은 그렇게 무력하게 끝나버렸다. 그로부터 2년 후인 지금 화물연대파업과 대비될 의사단체의 막강한 파업현장을 다시 목도하고 있다. 기득권의 면모를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는 의사단체의 파업에서 격세지감을 느낀다. 우리사회의 차별적 시선의 대상이 된 두 집단이 자연스레 겹쳐졌기 때문이다.
화물연대파업의 사회적 우려가 물류대란이었다면, 이번 의사파업의 사회적 우려는 국민 생명에 대한 안전이다. 국민 건강권이 심각하게 침해당하고 응급의료체계가 무너져 죽는 사람들도 발생하고 있다. 어느 쪽이 더 부도덕하고 위험천만한 상황인가? 그러나 정부와 시민들의 시선은 화물연대파업 때와는 사뭇 다르다. 적어도 화물연대파업 때처럼 터무니없이 북한과 연결한다거나 빨갱이라는 덧칠도 없다. 우리사회에서 힘없는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이 차별을 넘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실감한다. 두 파업을 대하는 정부의 이중적 잣대는 언급할 필요도 없다. 개혁이라는 이름까지 붙여 추진하겠다고 공표한 의료정책의 준비수준이 650조 예산을 움직이는 국가의 능력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이니 말이다. 중장기적 의료정책 속에서 풀어야 할 의사인력 확대 문제를 밑도 끝도 없는 ‘2천명 증원’ 발표부터 내던지고 보는 정부. 게다가 정교한 절차와 조정을 주도해야 할 정부의 역할을 마치 법 위에 군림하며 위반자를 색출하고 사법처리하는 역할로 이해하고 있는 정부에게 법적 공정성을 따진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처럼 국민과의 관계에서 총체적 무능을 드러내고 있는 정부가 자신들을 규율할 법과 원칙은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을까? 그 반대였다.
미국의 한국에 대한 도감청 의혹이 제기되었을 당시를 떠올려보자. 안보문제를 걱정하는 질문에 ‘미국이 악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대통령실 관계자의 동문서답에 국민은 어리둥절했다. 대통령실 안보가 뚫린 위험천만한 상황인데 자애롭게도 공격자의 의도부터 살피고 악의가 아니길 빌고 있는 굴욕외교의 낮 뜨거운 장면. 누군가 내 집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데도 우릴 해치려는 악의는 없는 것 같다며 좀 두고 보자는 답이 가당키나 한 반응인가? 이런 문제적 인식은 어쩌다 발생한 우연한 오류가 아니어서 더욱 위험천만하다. 북한 오물 풍선이 처음 서울 상공을 떠돌 때도 인식은 비슷했다. 유승민 전 의원이 "엄청난 생화학무기를 갖고 있는 북한이 언제 오물 대신 생화학무기를 풍선에 실어 인구밀집 지역에서 대량살상을 자행할지 알 수 없는데 우리의 국방은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봐야 아는 원시적 수준으로 대응하고 있다"며 강도 높게 비판했던 그대로다.
대화란 상식적 인식이 전제된 소통 방식이다. 상식적 인식이 공유되지 않으면 대화를 할 수가 없다. 지금 우리 국민은 정부와 제대로 된 소통과 대화가 어려운 실정이다. 정부의 정책 실책들이 잇따르고 있어도 개선되지 못하고 있는 데에는 이런 인식의 부재가 깔려 있다. 채상병 사건. 이태원참사, 잼버리 파행, 엉성하기 짝이 없었던 부산 엑스포 유치 과정, 오송역 참사 등 연이은 인명피해와 부실운영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사후관리들이 그저 우연한 일들이 아니다. 그뿐인가? 온갖 민생현안들은 속수무책이고 연속되는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국정은 멈춰서 있지만 대수롭지 않다는 듯 여전히 마이웨이다. 대통령 관저 이전 과정에서 드러난 수상한 쪼개기 입찰과 측근 비리 의혹들, 영부인 1인을 위한 공연제작 의혹, 수시로 터지고 있는 정치브로커들의 권력형 비리 관련 녹취록들이 끝없이 뉴스를 도배하고 있지만 이를 견제할 기관인 감사원은 손 놓고 있다.
법 집행의 공정성 정도는 그 사회의 건강성을 가름하는 척도다. 한국전쟁 이후 폐허의 땅에서 우리는 법의 집행은커녕 근대적 의미의 법 규정조차 없었다. 나라의 운영체계가 무얼 의미하는지도 생소했을 그 시기, 제대로 된 배움의 기회조차 갖지 못한 당시의 대중들이었지만 4.19 혁명에 이어 오랜 독재를 마감할 기초가 된 5.18과 6월 항쟁이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루면서 구석구석 나라다운 법체계도 세웠다. 고문으로, 총탄으로 누군가의 아들딸들이 죽어나가는 지난한 과정을 겪으면서도 합리적 판단이라는 불분명성을 대신할 명확한 규정들을 뿌리 깊게 심으려 민주화를 일궈왔다. 그 덕에 규정 타령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알량한 규정들을 비틀어 남용해왔던 야만과 비상식의 독재로부터 안전할 수 있게 되었다.
민주국가에서 법규정이 무시될 때 국민들 삶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처참해지는지 우리는 중동의 분쟁 국가들과 동남아시아의 독재국가들을 통해 보고 있다. 우리가 그런 독재시대를 마감할 수 있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성숙한 시민의식을 기반으로 일군 탄탄한 법 체계였다. 그런데 국가운영의 기반이 되었던 그 체계들이 다시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탑을 쌓기는 어렵지만 허무는 데는 한순간이라 했던가. 도대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어떤 기준으로 살아야 괜찮을까?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나온다.
나라의 법체계, 행정망 체계가 무너지니 개인들 간의 신뢰도 따라 무너지고 그 자리에 힘의 논리가 횡행하고 있다. 그런 힘의 논리는 이번 의료대란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자신들의 존재 이유인 시민과 환자들을 향해 입에 담지 못할 모욕적 언사로 비아냥대는가 하면, 어려운 여건에서도 환자들을 지키고 있는 양심 있는 동료 의료진들은 비열한 신상 털기로 매도하며 공격하는 일도 발생했다. 더욱 기가 막히는 사실은 물의를 일으킨 전공의가 구속되자 그 범죄행위를 돕겠다고 부모들이 모금을 했다는 소식이다. 돈으로 기득권을 지키겠다는 그들에게 이미 공동체 존립을 위한 합리적 판단이란 없었다.
법은 그 엄격성만으로 사회를 지켜낼 수 없다. 법체계만큼이나 중요한 공정한 법 운영은 시민들의 건강한 판단능력과 건강한 상식의 기반위에서만 이루어진다. 법이 결코 만능일 리 없기 때문이다. 법이 만능이라고 인식하는 사회에서는 늘 돈과 힘이 그 법을 지배해 왔다. 수많은 인명참사의 원인을 규명하고 해결하라는 국민들의 요구, 생존을 위해 최저임금을 부르짖던 지입차주들의 파업이 정부의 힘에 무력했던 것처럼 힘겨루기 사회에서 약자들을 위한 법이란 무력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이번 의사파업은 어떤가? 환자들 목숨을 담보로 기득권을 지키려는 의사단체의 힘은 정치권력조차 무력화시키고 있다. 나라의 의료체계를 의료인들의 사적 영역으로 착각하고 있는 의사집단들과 법을 앞세워 무책임하고 무계획한 국정운영 능력을 감추려는 권력이 마주쳐 힘겨루기를 벌이는 현장 뒤에는 막강한 법률지원단도 꾸려져 있다.
이렇게 서민들 삶은 이중 삼중으로 날로 팍팍해져가고 있는데도 서울시는 100억이 넘는 예산을 들여 광화문 광장에 100미터 높이의 태극기 게양대 설치를 고집하고 있다. 경쟁이나 하듯 250억이 넘는 예산의 독립기념관도 새로이 건립하겠다고 수선이다. 알맹이가 없는 정치는 늘 상징물 사업으로 정치를 선전 선동해왔다. 왜 자꾸 이런 일들이 반복되는 것일까?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암암리에 공정한 법체계 전반을 흔드는 근원이 바로 정부와 국회, 정치인들의 기득권 영역들이라는 사실이다. 이들이 자신들 이익과 연결된 문제들에는 어떤 방식으로 일치단결하여 예산을 늘리고 기득권을 확대해가고 있는지 직시해야 한다.
의원특권 내려놓기, 법조계와 공공기관의 전관예우 금지와 철저한 관리, 국회의원 보좌관 수와 예산을 북유럽 수준으로 줄이고 의원연금 등 각종 혜택 금지, 공공기관과 정치인들의 명확치 않은 해외연수 금지와 범위 제한, 선진국 수준으로의 경제사범 처벌강화, 김영란법 보완 등 기득권이 남용하기 쉽게 설계된 현재의 법체계를 다시 꼼꼼하게 개정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법률들의 제‧개정이 이들 기득권의 손에 맡겨져 있다. 부패한 정치인들에게 힘을 실어줄 뿐인 진영논리에 동원되어 에너지를 낭비할 때가 아니다. 실력 없는 국회의원, 지방자치 의원들이 양산해내는 완성도 낮은 입법안들, 누더기 법률들을 저지하기 위해서라도 시민사회가 힘을 모아 이런 기득권 영역들을 촘촘하게 규제할 입법 활동을 주도해야 한다. 공청회를 구성해 법 조항들도 치밀하고 완성된 수준으로 다듬어가야 한다. 그래야만 엄청난 예산들이 상징물 사업과 정치권의 기득권 유지에 흘러들어가는 것도 차단할 수 있다. 더 이상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겨둘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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