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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호 Feb 02. 2020

'언덕'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이태원을 이해할 수 없다

오르락내리락, 남산 아래 첫 동네

도심 속의 섬


이태원(이태원동, 보광동, 용산2가동 일부)의 지형 조건을 살펴보면 북쪽은 남산의 남쪽 사면에 맞닿아 있고, 남쪽에는 한강이 흐른다. 동쪽으로는 남산 줄기에서 뻗어 나온 능선이 한남동과 자연적 경계를 형성하며, 서쪽은 여전히 그 속을 알 수 없는 미군 부대의 장벽이 시야를 가로막는다. 산지로 에워싸인 자연 조건에 인공적 경계가 더해지면서 이 지역은 수십 년 동안 인접 지역과 분리된 채 뚜렷한 개성을 갖게 됐다. 이는 비단 물리적인 경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태원 특유의 생활 문화적 특수성을 유지하게끔 하는 밑바탕으로 작용했다.


이태원의 언덕은 지형적 경계이자 주민 생활의 중심지다


언덕 위 중심가


남산에서 이어지는 경사지는 이태원 전역에 뻗어 있는데, 그중에서 높은 능선은 생활권을 나누는 분수령 역할을 한다. 대표적으로는 경리단길 권역과 이태원로 권역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회나무로44길이 있는 능선, 소월로부터 해방촌 오거리를 거쳐 보성여자고등학교까지 이어지며 해방촌을 동서로 나누는 소월로20길이 있는 능선, 그리고 한남동과 보광동의 경계가 되는 우사단로 능선 등이 있다.


이들 중 몇몇은 지형적 경계인 동시에 주민 생활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해방촌 오거리는 후암동과 소월로, 이태원동을 잇는 교통 요지로서 지금도 골목을 따라 수많은 차량이 오가고 있으며, 생활 밀착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은행, 병원, 약국, 방앗간, 정육점 등이 밀집해 있다. 우사단로는 도로망이 정비되기 전부터 보광동과 한남동 주민들이 이태원으로 움직일 때 거쳐가던 주요 통행로였고, 길을 따라 시장이 형성되어 수많은 상거래가 이뤄졌다.


이태원 생활문화 지형의 거울: 우사단길


1960년대로 접어드는 시기에 보광동을 비롯한 이태원로 배후 지역에 판자촌이 생겨났다. 전쟁 직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서울로 몰려든 지방민들이 도심 주변에 허름한 집을 짓고 살다 강제 철거로 인해 외곽 지역으로 내몰리던 시기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도심과 가깝고 미군 부대와 기지촌이 있는 이태원 지역은 생업을 찾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주거지였다. 이에 도시 빈민과 상경한 지방민들은 지역 내 국유지 임야에 판잣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고, 우사단길 주변 능선에도 판자촌이 들어섰다.


이격거리가 좁은 우사단길 주변 필지


1971년 서울시에서 무허가 건물에 대한 양성화 사업을 진행했다. 요지는 건물을 개축하면 건축 허가를 내주고 대지가 국공유지인 경우엔 불하하는 등 혜택을 주어 판자촌이 개량 주택지가 되도록 유도한 것이다. 주민들은 정책에 따라 필지를 새롭게 구획하고, 벽돌 혹은 시멘트 재질의 연립주택을 지었다. 경사면에 적응하기 위한 형태를 띤 3~4층 규모 주택이 빼곡하게 늘어선 이태원 특유의 풍경은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안정적인 주거 형태가 정착되고 더욱 많은 지방민이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우사단길 중턱에 도깨비시장이 생겨 크게 번성했다. 일반적으로 시장은 물류 조달과 소비자 왕래가 쉬운 평지에 생기는 데 반해 도깨비시장은 언덕을 따라 형성되었다. 그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로망이 현재와 같이 정비되기 전 이태원의 생활 지형을 살펴보아야 한다. 당시 한강과 인접한 저지대에 살던 주민들이나 한강 이남에 살던 사람들이 언덕 너머 후암동과 이태원으로 이동할 수 있는 제대로 된 경로는 보광동길(현 보광로)과 우사단길(현 우사단로10길)뿐이었다. 특히 오늘날 보광중앙교회 주변 건넌말에 살던 주민들과 현 대사관로 주변 한남동에 살던 주민들은 이태원에 갈 때 마을과 가까운 우사단길을 통해 다니는 걸 선호했다. 이와 같은 우사단길의 생활문화적인 기능은 시장이 구릉 지형을 극복하고 형성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2000년대 이후 주한 미군이 재배치되면서 이태원 전역에서 미국적 문화를 담은 공간과 사업이 크게 위축되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그 빈자리를 메운 건 새롭게 정착한 아프리카 문화와 무슬림 문화였다. 특히 아랍 문화권 출신 외국인 노동자들이 다수 유입되면서 이슬람 성원이 있는 우사단길에는 무슬림 거주지가 형성되었고, 이슬람 예배를 보기 위한 외부 방문객도 늘었다. 자연스럽게 관련 생필품과 할랄 음식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으며, 재개발 논의로 인해 우사단길 주변의 상가 임대료가 폭락한 상황에서 무슬림을 위한 식당과 식재료 상점, 이슬람 서점, 여행사, 잡화점 등이 새롭게 영업을 시작했다.


우사단길 능선은 시대상과 생활문화를 반영하며 그 모습을 달리해왔다. 가파른 구릉 지형은 동네의 필지 구획과 생활 방식을 규정했고, 정치, 경제, 사회적 요인의 영향을 받아 변화해온 이태원의 문화는 좁은 골목길과 주변 언덕 마을의 생활상을 빚어냈다. 이태원 소방서 뒤편 가파른 언덕에 가려 있어 낯선 이 길은 다가올 날에도 이태원의 가장 솔직한 민낯을 담아낼 것이다.


언덕 지형 극복을 위한 가파른 계단


권력과 언덕


보광동부터 해방촌에 이르는 이태원 전역에서 ‘언덕’은 일반적으로 주민과 차량의 이동을 어렵게 하는 장애물로 여겨진다. 반면 해밀톤 호텔 뒤편 능선의 정상부인 회나무로44길 주변에는 고급 저택과 맨션이 늘어서 있다. 유사한 지형에 있는 두 동네의 풍경이 이토록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1930년대 당시 용산 일본군 기지 및 일본인 거주지와 가까운 입지 조건에 힘입어 이태원 일대에 대규모 택지 개발이 이뤄졌다. 해방 직전에는 조선주택영단(현 대한주택공사)이 해밀톤 호텔 북쪽 능선에 일본 장교를 위한 고급 주택지를 조성하기 위해 터를 닦고 있었는데, 건물을 짓기도 전에 해방을 맞이했다. 그 결과 6・25 전쟁 이후 이곳에는 UN군 가족 및 장병과 OEC(유엔경제조정관실) 직원 가족을 위한 주택 및 차고가 건설되었다.


회나무로44길 주변으로 UN 소속 군인과 공무원을 위한 주택이 들어선 이유는 같은 위치에 일본군 장교 고급 주택 부지가 조성된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해방 이후 옛 용산 일본군 기지는 그대로 미군 기지가 되었고 덕분에 이 지역은 군인과 공무원이 업무차 미군 부대를 오가기 좋은 입지적 장점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이와 더불어 대한민국의 주요 유관 부처가 있는 종로 일대를 오가기 좋았고, 이러한 장점은 1970년에 남산을 관통하는 터널이 개통되면서 더욱 도드라졌다. 


이후 국내 권력층과 부유층 역시 이곳에 거주하기 시작했는데, 이에 영향을 미친 몇 가지 요소가 있다. 우선 강남 개발 이후 원래부터 빼어난 접근성에 한남대교와 가깝다는 이점이 더해졌다. 그리고 상류층은 아이러니하게도 장애물로 간주되던 언덕 지형을, 주위의 시선을 허락하지 않아 보안 확보에 용이하다고 여겼다. 물론 한강과 남산을 아우르는 빼어난 전망 역시 큰 매력이었다. 끝으로 부유층 대부분은 당시 귀했던 자동차를 이용해 이동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형의 높낮이에 둔감한 편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눈물 젖은 언덕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세상을 굽어보는 시야를 제공했다. 같은 지형적 조건 아래 사회적 권력이란 변수가 연출해낸 극적인 대조. 능선을 따라 밀착한 낡은 건물의 행렬과 끝없이 이어진 저택의 담벼락은 오늘도 같은 하늘 아래 서로를 묵묵히 응시한다.



참고 자료

서울역사박물관 조사연구과(2010), 이태원-공간과 삶, 서울역사박물관.



매거진 <아는동네 아는이태원>을 통해 배포한 콘텐츠입니다




 강필호

사진 조혜원

ⓒ 어반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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