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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mjun Oct 25. 2019

[매그넘 인 파리 ②] 격변 속의 파리

1932 - 1944. 파리는 자유다/1945 - 1959 재건의 시대

   전시실에 들어서자 매그넘 인 파리(MAGNUM IN PARIS)라는 글이 우리를 맞이했다. 양쪽 벽에는 매그넘 포토스 소속 사진 작가들의 사진이 걸려있었고, 수신기를 통해 '매그넘 인 파리' 전시회의 개요에 대한 설명이 흘러 나온다. 아이들에게도 수신기를 하나씩 주었는데 처음으로 나온 내용이라 두 아이 모두 굉장히 집중하며 들었다. 아이들은 파리 여행 때, 베르사유 궁전과 오르세 미술관에서 수신기를 사용한 적이 있어 이제는 제법 사용을 잘하였다. 나와 아내가 설명하지 못하는 내용을 수신기를 통해 듣게 해주는 것이 아이들에게 굉장히 좋은 공부가 되는 것 같아 좋다는 생각이 든다.


매그넘 인 파리, 전시의 시작


   "파리는 이제 프랑스 수도라는 공간적 개념을 넘어서 이제는 자유와 낭만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진다. 혁명의 깃발이 가장 많이 나부낀 곳, 럭셔리 산업과 패션의 본고장, 예술가들이 거장으로 성장하고 스스로 파리지앵으로 불리기를 원하는 곳, 그리고 누구나 평생에 한번은 가보지만 막상 도시를 가보고는 자신이 그렸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다양성과 생동감에 실망을 느끼면서 '파리 신드롬'이라는 말까지 생겨난 곳 역시 파리이다." (매그넘 인 파리)


   파리 신드롬이라는 말을 듣고 구글링을 통해 찾아보았다. '파리 신드롬'은 다른 문화에 대한 적응 장애의 하나이며, 문화 충격의 하나이다. 프랑스를 동경해 파리에 살기 시작한 외국인(주로 일본인)이 현지의 관습이나 문화 등에 잘 적응하지 못해서 정신적 균형감이 붕괴되고, 우울증에 가까운 증상을 보이는 상태로 정의되어 있다. 물론 나도 파리에 가기 전에 세련된 도시일 것이라는 동경이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파리라는 도시 자체가 주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참 좋았던 것 같다. 그래서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오히려 파리로 여행을 다녀온 것에 대한 만족도가 훨씬 더 높아, 여전히 파리를 꿈꾸며 지내고 있다.




파리, 전쟁과 가난으로 물들다 : 파리는 자유다 (1932 - 1944)


   1930년대 프랑스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경제적 공황으로 신음하게 된다. 1936년 우익에 의한 쿠데타의 위험에 직면하자 좌익 정당은 '민중전선'을 형성해 집권하고 이 기간동안 노동자를 위한 유급 휴일제도와 주 40시간 근무제와 같은 개혁을 시행한다.
   또한,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고, 이 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채 히틀러에게 점령당하고 만다. 시간이 흘러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히틀러는 전쟁 말기 파리를 철저하게 파괴할 음모를 꾸미고 파리 방어군의 사령관 티트리히 폴 콜티즈에게 에펠탑, 루브르 박물관, 노트르담 대성당 등 파리의 명소 대부분에 폭탄을 설치하게 하였다. 그러나 콜티즈 장군은 끝내 히틀러의 파리 폭파 명령을 거부하였고, 그 사이 히틀러는 전화로 9번이나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라고 물었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전쟁의 참화 속에서 파리는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매그넘 인 파리)




   다양한 사진을 통해 1930~40년대 파리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위 설명을 통해 본 프랑스의 상황때문인지 모르지만, 낭만의 도시이기 보다는 혼란스러움이 느껴졌다. 특히, 레지스탕스의 전투 장면은 당시 파리의 긴박하고 절박했던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듯했다. 이처럼 제2차 세계대전의 한 가운데 있었던 파리가 히틀러에 의해 파괴되었다면 전 인류의 비극이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1930~40년대 파리의 모습




   아래는 1930~40년대 사진 중 가장 인상깊게 본 로버트 카파의 레지스탕스 사진이다. (수신기를 통해 사진에 대한 설명이 곁들여 져 아이들도 관심있게 보았다.) 위 사진은 그 자체 만으로도 긴장감을 물씬 풍기고 있다. 총을 들고 차 뒤에 숨어있는 그들의 표정에서 금방이라도 총격전이 시작될 것 같은 느낌이 전해진다.  소형 군용차를 가운데 두고 그 뒤에 있는 레지스탕스와 사진 너머에 있는 독일군 사이의 긴박한 상황이 나에게까지 전해진다. 이 사진을 찍은 로버트 카파 역시 그 총격전의 한 가운데 있었을 것이다. 무섭지는 않았을까? 당연히 무서웠을 것이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진가로서의 의무감이 그를 이끌었을 것이고, 그 결과로 이 사진이 태어나게 되었다.


로버트 카파의 레지스탕스 사진을 유심히 보는 아이들


   

재건의 시대 : 도시의 재구성 (1945 - 1959)


1940년대 독일의 침략과 이에 따른 수년간의 상처는 오히려 프랑스인들에게 새로운 의지와 목적의식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 정부와 국민들은 전쟁의 참화를 딛고 프랑스를 재건하기 위한 프로젝트에 몰입한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고속 성장과 현대화에 성공하지만 그로 인해 파리에는 교통난과 빈민문제, 주거문제 등 다양한 사회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 섹션에서는 길거리에서 포착한 인물과 노동자들의 모습을 다루는데 이들은 프랑스 재건 사업에서 소외된 주변인이다. 이와 함께 재건을 통해 과거의 영광을 찾는 파리의 모습이 강한 향수를 일으키는 방식으로 포착되기도 한다. (매그넘 인 파리)



  

   "전쟁이 끝난 파리의 모습을 단 한장의 사진으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는 사진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거리에서 춤을 추고, 가장 중앙에 서서 춤에 몰두하고 있는 남성과 여성이 잘 표현되어 있다. 특히, 남성은 이마에 주름까지 새겨가며 춤에 열중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파리를 바라보는 사진 작가의 따뜻한 눈이 느껴져 더욱 좋았던 사진이다.


파리의 행복과 기쁨'이라는 키워드를 표현하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매그넘 인 파리]에 와서 가장 재미있었던 사진이다. 가게는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는지, 모든 테이블과 의자가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가게 밖에는 한 쌍의 연인이 키스를 나누고 있으며, 그리고 그 상황을 심각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가게 주인이 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두 사람만의 시간을 갖고 있는 두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그를 지켜보는 가게 주인의 심정은 어떨까? 그리고 이런 사진을 찍기 위해서 사진 작가는 이 사람들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것일까? 사진을 보면서 궁금증은 점점 커져가고, 사진을 통해 그 상황을 상상을 해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이런 사진을 보면 참 기분이 좋아진다. 오늘 내가 뽑은 Best 사진 중 하나!


  * 그리고 이 당시에 사용하던 저 테이블과 의자의 형태는 우리가 방문했을 때에도 아직도 파리 음식점 대부분에 자리하고 있었다. 파리에 지내면서 좁은 테이블과 의자가 불편해서 왜 이렇게 사용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는데, 이 사진을 통해 과거를 기억하고 지키려는 파리의 모습을 본 느낌이 들었다.


매그넘 인 파리 전시에서 가장 재미있고, 흥미로웠던 사진




   올해 타버린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찍은 파리의 전경이다. 아쉽게도 공사 중인 노트르담 대성당에 가보지는 못했지만, 이 사진을 통해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바라보는 파리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이 사진을 컬러 사진으로 바꾼다면 지금의 파리 모습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바라보는 파리/센강



   

   매그넘 포토스의 마크 리부가 30살 때 찍은 사진으로 이 사진으로 그는 유명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고 한다. 페인트공은 높은 에펠탑에서 안전장치 하나 없이 작업을 진행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뒤로 보이는 작은 빌딩들이 흐릿하지만 더 눈에 잘 띄는 듯하다. 어떻게 그는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까?


1953년 어느 날, 마크 리부는 파리 시내를 걷다가 우연히 에펠탑을 올려다 보고 에펠탑에서 도색에 집중하고 있는 페인트공을 보게 된다. 페이트공의 모습에서 리부는 우아하지만 절제있고, 때로는 위태롭지만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느낌을 받자마자 리부는 에펠탑에 즉시 올라 페인트공을 근접 촬영하는데 성공합니다. 안전장치도 없이 목숨을 걸고 찍은 그의 사진은 단지 노동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뿐만 아니라 파리의 우아함을 느끼게 해 줍니다. - [매그넘 인 파리]


   저런 설명과 같이 사진에 문외한인 내가 사진을 통해 우아함을 느끼기에는 무리였지만, 저렇게 위험한 상황에서도 본인이 바라보는 광경을 남기고자 하는 의지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광경일 수 있지만 그런 광경 속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찾는 작가의 시선이 감탄스럽기도 하였다. 나도 주변에서 다양한 광경을 보지만 나에게 주는 의미를 얼마나 찾고 있을까? 눈을 뜨고 보고 있지만 실제로는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들게 해준 사진 한장이다.


에펠탑의 페인트공, 마크 리부




   파리의 반가운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오벨리스크가 우뚝 솟아있는 콩코드 광장. 주변의 루브르 박물관과 샹젤리제거리 등 우리 가족이 파리에 머무르면서 몇 번이나 지나쳤던 공간이고, 사진의 모습이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아 다시 파리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을 받아 더 반가웠던 것 같다.


이집트 룩소르 신전에서부터 4년에 걸쳐 운송해온 람세스 2세의 오벨리스크가 우뚝 솟은 콩코드 광장은 파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공간이다. 이집트에서 프랑스로 옮겨오는데 4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1840년 루이 필립 왕에 의해 콩코드 광장이 새롭게 정비되기까지 이곳은 불어로 화합을 뜻하는 '콩코드'라는 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피비린내 나는 장소였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당시 단두대가 설치되어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물론 혁명의 지도자였던 당통, 로베스피에르 등 약 1,300여명이 처형된 장소이다. 1795년 제1공화국 정부는 이 같은 피의 역사를 씻고 국민적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이곳의 이름을 콩코드 광장으로 변경했다. [매그넘 인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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