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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현주 Oct 25. 2020

나의 네브레스카(2)

열여섯 미국 촌뜨기

그래, 내가 이러려고 미국에 온 것은 아니었다. 7막 7장의 홍정욱처럼, 성공적으로 아이비리그에 들어가 한국인의 위상을 높이겠다는 야망을 품고 비행기를 탄 것이지 옥수수나 뜯어먹으려고 온 것은 아니었다. 하얀 얼굴에 금발 머리, 파란 눈을 가진 저 백인들 틈에서 지구 곳곳을 누비는 커리어 우먼이 되리라. 나는 꼭 특별한 무엇인가가 되리라. 

하지만 막상 두 발을 딛고 서있는 이 곳은 온통 옥수수 밭뿐이고 파리만 날리는 작디작은 오마하 공항에는 성공 따윈 아무래도 관심 없는 인상 좋은 소랜슨 가족이 나를 향해 빅스마일을 열심히 날리는 중이었다. ‘그분들도 얼마나 떨리고 걱정이 되었을까’라는 생각이 든 건 한국으로 돌아와, 그러고도 한참 지나 철이란 것이 그나마 어느 정도 들었을 때의 일이었다. 동양인이 거의 없는 그 동네에 한국에서 온 여자 아이를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였을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 막 고1이 된, 아직 중학생 티를 벗지 못한 철딱서니였으니까. 하지만 눈물의 자기 성찰 시간은 나중에 갖기로 하고 다시 그놈의 미쿡 이야기로 돌아가자. 어쨌든 그렇게나 원했던 미쿡 유학은, 생각과는 판이하게 흘러간다. 그러니까 조금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약간 ‘구리게’ 시작되고 있었다는 말이다. 시골 고속버스 터미널 같이 생긴 코딱지만한 오마하 공항에서, 빅 사이즈의 백인들의 틈에서, 아주 강한 신념을 가진 보수적인 기독교인 집안에서, 도시라곤 4-50분 정도 차를 타고 내달려야 간신히 볼 수 있는 마더 네이처 속에서 그렇게 말이다.  

진짜 미국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 길의 햇살은 뜨거웠고 대기는 무척이나 건조했다. 피부가 바싹 쪼그라들며 구워지는 느낌. 네브레스카는 미국의 정 중앙에 위치했기 때문에 바다를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도 차로 족히 10시간 이상이 걸린다고 하니 이렇게 건조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심지어 소랜슨 가족의 딸인 세라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바다를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아니, 해외여행이라는 것은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미국인들이라면 모두 바닷가에서 비키니를 입고 선탠을 하든지, 서핑을 즐기며 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뭐야, 생각보다 촌스럽잖아? 문득 학교에서 언젠가 사면이 모두 육지로 막힌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해조류를 먹지 못해 종종 걸린다고 배웠던 병이 생각났다. 나도 그 병에 걸리는 거 아닌가 싶었다.  

그곳에 살면서 동양인으로서 크고 작은 인종차별 같은 것을 당했겠지만, 나도 실은 이 촌스러운 네브레스칸들을 은근히 무시했다. 나는 한국에서 20층짜리 아파트에서 살았다고. 나는 바다는 매년 다녀왔다고. 나는 해외여행도 종종 가고, 나는 프랑스 영화니, 이태리 영화니 하는 유럽 영화도 엄청 많이 봤다고. 느그들은 네브레스카라는 우물에 갇혀서 여기가 최고인 줄 알지. 자막 있는 영화도 못 보는 느그들보다, 분리수거가 뭔지도 모르는 느그들보다, 근의 공식도 못 외우는 느그들보다 내가 아는 것이 많다고 무시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유치한 생각이긴 하지만 이런 정신상태가 향후 교환학생 생활을 하는데 긍정적으로 작용했음을 부정하지 않겠다. 가끔 들리는 인종차별적인 언행이 나를 의기소침하게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나, 언어도 영어 꼴랑 하나밖에 못하는 것들이 놀고 있네.’라며. 오히려 생각보다 구린 네브레스카가 조금 실망스러웠다고 할까. 여기는 진짜 미국이 아니야라며, 늘 가본 적도 없는 상상 속의 천조국을 그리워했다.  

원래 꿈꾸던 미국이 아니니 점점 아이비리그에 들어가 성공을 하겠다는 야심 찬 포부도, 무엇인가 대단한 존재가 되겠다는 생각도 점점 희미해져 갔다. 아니, 네브레스카 자체가 그랬다. 아이비리그에 진학하는 학생들이 주 전체에 다섯 손가락에 꼽을까. 누구도 대학 같은 것에 관심이 없고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일을 하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순풍 순풍, 하나, 둘, 세엣, 네엣,...... 열 둘(응?)을 낳았다. 소랜슨 가족도 내 성적이 얼마인지, 무엇을 얼마나 잘하는지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냥 그들은 나의 존재를 지켜보며 이따금씩 격려를 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난 이 때다 싶어, 한국에서 부모님이 봤다면 놀라 자빠질, 즉흥적이고 충동적이고 흥청망청인 삶을 살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삶이라면 대뜸, 마약이니 문신이니 하는 것을 떠올릴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여기는 우리 상상 속의 미국이 아니라 ‘네브레스카’라는 점을 다시 상기해 보자. 내가 네브레스카에서 벌인 망나니의 삶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성적 걱정은 하지 않고 숙제가 끝나면 밖에 나가 놀았다. 유치원을 졸업한 이래로 처음 해보는 통제되지 않은 삶이었다. 세라의 골든 레트리버인 ‘에비’를 데리고 산책을 다니느라 한 시간도 넘게 드넓은 초원을 뛰어다니고, 가을, 겨울에는 뒷마당에 장작을 지펴 그 불에 마시 멜로우를 녹여 먹었다. 눈이 내리면 눈에 팥빙수 시럽을 뿌려 거대한 숟가락으로 세라와 함께 퍼먹기도 했다. 한 번은 폭설 때문에 ‘snow day'령이 내려졌는데 눈이 앰 우드(elmwood)를 집어삼킨 것 같은 그날, 나와 세라는 아저씨의 픽업트럭에 썰매를 매달고 마을을 누비고 다녔다. 뒷바퀴에서 흩뿌려지는 눈발 때문에 나와 세라의 얼굴이 벌겋게 얼어붙은 것을 보고 아저씨는 이제는 더 이상 못해준다며 우리를 뒷좌석에 태우고 집에 돌아왔지만 그것이 그렇게 재밌을 수 없었다. 

별이 예쁜 날이다 싶으면 뒷마당 잔디에 누워 하늘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비가 장대같이 쏟아지면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I can only imagine’이라는 노래를 수 백 번 반복해 듣는 게 낙이었고, 소랜슨 부부와 키슬링 부부가 한 집에 모여 스크리블이니, 카탄이니 하는 보드 게임을 할 때 키슬링 가족의 둘째 아들 다니엘, 그리고 세라와 함께 링컨 시내를 하염없이 싸돌아 다니며 팝시클과 소다를 사 먹곤 했다. 금요일 밤이면 어김없이 소랜슨 가족과 함께 영화를 보았고 기분이 내키는 대로 평일 저녁 시내에 나가 가장 좋아했던 패밀리 레스토랑 ‘애플비(Apple Bee)’에서 스테이크니, 수프니 하는 것을 먹었다. 학교에서 발리볼, 농구, 풋볼 매치가 있을 때면 모든 행사에 참석하여 ‘고우, 크루세이더(Go, Crusaders!)’를 외치며 붉은 악마 못지않게 함성을 질러댔다. 학교의 오케스트라 활동과 뮤지컬 활동, 각종 음악 활동에 열을 올렸다. ‘달리기’ 반에도 들었다. 한국에서라면 공부 때문에 하지 않았을 활동들을 모두 해봤다. 그게 나의 비행이었다. 나는 내일에 대한 걱정도 미래에 대한 걱정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순간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날도 시내에서 가족과 함께 즉흥적인 하루를 보내고 ‘엠 우드'(elmwood)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사방은 고요하였고 오직 차의 낮은 엔진 소리만 규칙적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세라와 소랜슨 부인은 잠이 든 것 같았다. 아저씨는 앞만 보며 어두워가는 밤길을 말없이 달렸다. 하늘과 땅이 맞닿아 있는 옥수수 밭의 경계를 보며 난생처음 산이 없는 곳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다시 한번 상기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었기 때문에 네브레스카의 하늘은 오색찬란한 색으로 물들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숨을 죽이고 땅거미가 내리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하늘의 북두칠성까지. 내가 느낀 건 견딜 수 없는 행복감이라기보다는 편안함이었다. 불안이 전혀 없는 정서적인 안정감의 상태. 문득, 결코 알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존재가 나를 보호하고 있음을 느꼈다. 난 어째서 이 곳에 온 것일까. 낯선 타국에서 이렇게 인자한 가족을 만나 걱정도 없이, 눈치도 보지 않은 채 사랑을 받으며 살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렇게 티끌 같이 작고 하찮은 존재인데 왜 알 수 없는 그 존재는 이런 보호와 안식을 주는 것일까. 정말이지 너무 아름다운 날들이었다.      

네브레스카에서의 미국 시골뜨기 생활은 나의 피부를 새까맣게 만들어 놓았다. 미국 같지 않은 미국이라며 실망했는데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비행기 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옆에 앉은 한국인 대학생이 오랜만에 본 한국 사람을 본 탓인지 입이 터졌나 보다. “네브레스카는 참, 지루한 동네예요. 할 게 없어요. 이게 미국인지 저기 외딴섬인지. 이번 여름에 한국에 가서 너무 좋은데 돌아올 걸 생각하니 답답하네요.”하며 쉴 새 없이 뭐라고 말을 걸었지만 나는 건성으로 “네- 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생각보다 이 곳은 내게 너무 많은 사랑을 내주었고 나도 너무 많은 정을 내주었다. 장작 18시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들여야만 하는  이곳에 내가 다시 올 수 있을까. 그리고 다시 올 수 있다 한들, 시간이 자라 어른이 된 내가 같을 수 있을까. 비행기가 이륙하고 멀어져 가는 옥수수 밭을 바라보며 어렴풋이 지나가는 나의 열여섯 살의 시간들을 잊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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