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소란스러운 가을이다. 아직도 다 지나지 않은 가을은 벌써 나를 흔들어놓았다. 나는 원치 않은 낙엽을 바닥에 흩뿌린 채 헐벗은 계절을 보내고 있다. 근 한 달간 팔자에 없던 새로운 여자와의 일이 몇 번 있었는지. 좋았다고는 말 못 하겠다. 사건이 일어나는 내내 내 할 일을 소화해 내기도 벅차서 솔찬히 버겁기도 했고, 연이은 낯섦에 스트레스도 적잖이 받았기 때문이다.
팔자에도 분수에도 맞지 않게 제멋대로 찾아온 바람은 결과도 좋지 않았다. 그 몇 번의 일이 전부 꽝으로 끝나버렸다. 바카라의 수학적 법칙은 독립시행이라지만 바카라에 돈을 부은 이들은 결과를 메모하며 허튼 기대를 품는 것처럼, 나 역시 그 독립된 과정 동안 '이번에는 되겠지'라는 허튼 희망을 품었다. 닿을법한 신기루만큼 여행자들을 걷게 하는 것도 없듯 나 역시 최선을 다해 걸었다. 죽어도 닿지 못하는 신기루만큼 여행자들을 절망시키는 것도 없듯 나 역시 끝에서는 무릎을 꿇었다.
어제는 내게 과분하게 주어졌던 기회들이 다 정리된 날이었다. 정말 마음에 안 들었지만 혹시나 싶어 연락을 이어갔던 사람은 신천지였고, 과팅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고, 친구가 소개해 준다던 여자는 너무 멀리 살아 현실적으로 불가함을 깨달았다. 일전에는 번호를 땄던 사람에게 연애할 생각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개강 총회에서 만났던 여자에게는 책만 전해주고 끝났다. 헤아려보니 다섯 번이었구나. 내가 가능성을 기대했다가 실망한 일이 9월에만 다섯 번이었다.
연락하던 여자가 자신이 신천지임을 고했을 때 나는 끊었던 담배를 샀다. 내가 종교를 전혀 모르는 척해서 쉽게 알아낸 정보였는데, 내가 그간 스트레스받고 시간 쓰고 노력했던 순간들이 모두 '포교활동'이라는 역겨운 이름 하에 정리되었다는 사실에 욕지기가 올라왔다. 무엇으로라도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남근기에 접어들고도 훨씬 시간이 지났을 내가 구강기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게 담배는 일종의 자해다. 나는 햇수로는 3년 정도 흡연했지만 담배를 태우며 즐거웠던 기억은 없다. '텁텁하다', '냄새난다', '맛없다', 목 아프다' 같은 생각을 하면 했지, '맛있다', '향긋하다', '즐겁다', '기분이 좋아진다' 같은 담배를 태우는 이들이 남기는 감상에는 단 한 번도 동의해 본 적이 없다.
단 한 가지, 담배를 태우면 흡연자들과 프라이빗 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기에 나는 담배를 태웠다. 대개 어린 남자의 무리에서 흡연자는 우위 서열을 차지하기에, 내게 담배는 우월한 수컷들과의 교류를 쌓을 수 있는 일종의 티켓 같은 역할이었다. 나는 담배가 불량함과 일종의 권력을 상징하던 어린 시절을 지나자마자 담배를 끊었다.
내가 맛도 없는 담배를 직접 사서 태웠다는 사실은, 내가 으레 흡연자들처럼 '담배를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하겠다'라는 의지를 가졌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는 우아하게 자해하고 싶었다. 담배는 그 욕구에 걸맞은, 이제는 유일한 도구이다. 이전에는 내게 술도 우아한 자해 도구의 하나였지만 이제 술은 즐길 사람이 많아져 버린 탓에 나를 해하지 못한다. 나는 일부러 타르의 밀리그램 수가 높은 담배를 태우며 목구멍이 뻣뻣하게 타들어가는 감각을 느낀다. 한 번도 그어본 적 없는 손목이 간지러워온다. 필요도 없지만 돈이 아까워 차고 다니는 애플워치가 어쩐지 손목의 상흔을 가려주는 듯하다.
자해는 으레 '신체적 고통을 가함으로써 슬픔, 죄책감, 고통스러운 회상과 같은 강한 정서적 스트레스를 덜기 위해'하는 행위라고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 유행했던 귀귀의 <열혈 초등학교>에서 우습게 다뤘던 '역지사지 시술법'처럼, 더 큰 고통으로 자잘한 고통을 잊고자 하기 위함. 그래도 다행이다. 여전히 담배는 맛이 없고, 라이터마저 가격이 올랐다. 나는 담배갑 속에 처량하게 남은 세 개비 담배를 다 태우면 또 살 생각은 없다. 돈 아까워.
어제는 망해버린 과팅을 주선해준 친구와 술을 마셨다. 잘 안 됐다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또 잡아주겠노라 의기양양하게 외치던 친구에게 나는 조용히 거절 의사를 밝혔다. 내게는 이제 쉼이 필요하다. 내 앞가림 하기도 정신이 없는 이 각박한 나날에, 나는 지금같은 시간이 필요하다. 홀로 카페에 나와 글을 쓰는 시간, 어려운 고전을 읽어내릴 시간, 마시면 잠 못 들 것을 알면서도 마시는 쌉싸름한 아메리카노 한 잔, 과제와 일정을 미리미리 소화할 계획, 온전히 찾을 나 자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