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영현 Nov 10. 2020

죽은 자의 집청소

죽음 언저리에서 행하는 특별한 서비스

양손에 납작하고 투박한 검은 상자 두 개를 들고 있습니다. 버튼을 누르고, 저 높은 곳에 머무는 엘리베이터가 내가 서 있는 일층까지 내려오길 잠자코 기다립니다. 현장에 처음 방문하는 날이면 엘리베이터는 아득한 곳에 기거하는 낯선 존재로 느껴집니다. 습관적으로 몇 번이나 고개를 들어 두 자리였던 붉은 숫자가 점점 겸손하고 낮은 숫자가 되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시선은 문 위의 숫자를 향하지만 그 숫자 하나하나의 마음에 스미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엘리베이터 앞에서의 시간이란 모든 이에게 그런 방식으로 공평하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겠군요. 지난달에 돌아가신 당신도 생전에 바로 이 문 앞에서, 짧은 순간이지만 이어 보면 꽤 오랜 시간을 보냈겠죠. 서로 누군지도 모르는 우리는 이 시간을 공유하기 시작했습니다.


두께 사 밀리미터의 강인한 폴리프로필렌으로 만들어진 상자 안에는 여러 가지 보호 장구가 들어 있습니다. 파란색 수술용 글러브와 역시 파란색 신발 덮개, 그 안에 덧신는 투명한 파란색 비닐로 만들어진 또 다른 신발 덮개, 하얀색 방진마스크와 연한 회색의 방독마스크, 그리고 현관문을 여는 데 요긴한 공구 따위가 손잡이가 달린 두 상자에 나누어져 담겨 있습니다. 이런 보호 장구들은 나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는 또 하나의 피부와 같습니다. 콘돔이 생명의 잉태를 막듯 이런 보호 장구의 얇은 막이 나를 감염과 오염,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막아준다고 믿습니다.


낯선 존재였던 엘리베이터는 선뜻 좌우로 품을 열고 정해진 층까지 나와 함께 동반 상승합니다. 이때 코는 어느 때 보다 예민해져서 무심코 그 안에서 뭔가를 수색하기 시작합니다. 나이 지긋한 남자가 쓸 법한 고전적인 화장수 향기, 막 배달된 피자 냄새, 음식물 쓰레기봉투가 머문 듯 아련하고 퀴퀴한 냄새…, 밀폐된 공간에서 후각의 추적 능력이 한껏 고양되었음을 깨닫습니다. 엘리베이터가 문을 열어 나를 내보내고서 이 추적은 더없이 집요해집니다. 사실 내 일은 살아 있는 사람을 괴롭히는, 죽은 사람이 만든 냄새가 가져다줍니다. 그 냄새를 극적으로 없앴을 때 내 비즈니스는 성공하지요. 대가로 살아있는 사람이 나에게 돈을 지급합니다.


용서하세요. 문 앞에 도착하더라도 애써 예의를 갖춰 벨을 누르지는 않겠습니다. 저 안에서 기다리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당신이 남긴 것이니까요. 조심스레 검은 상자를 열어 신발 덮개를 신고 수술용 글러브를 양손에 끼우고는 행여나 빈틈이나 헐거운 구석은 없는지 매만져봅니다. 냄새를 여과 없이 제대로 맡는 것, 그 사실적인 측정이 이 일의 세부적인 과정을 계획하고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데 기준이 되기에 이때만큼은 코를 가리는 어떤 종류의 마스크도 쓰지 않습니다. 이제 나는 완전범죄를 계획한 자처럼 지문도, 발자국도,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나 드나들던 곳처럼 자연스레 손잡이를 잡아 비틀고 서슴없이 집안으로 들어설 작정입니다.


문을 열고 비로소 첫 번째 스텝을 밟습니다. 습관적으로 되풀이하는 ‘초연하자’는 각오가 무색하게 내 코는 이미 죽은 이가 남긴 냄새에 잠식되었고, 심장 언저리에는 어둡고 축축한 그림자가 드리웠습니다. 스위치를 찾아 전등을 켜지만 이 순간만큼은 마음에 빛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태초에 빛이 있기나 했는지, 가로등이 없는 심야의 지방도로 위를 비추는 자동차 전조등의 세계처럼 시야가 좁아졌습니다. 목구멍은 바람이 소금 사막을 스치듯 바삭거립니다. 문득 내가 해저를 느리게 유영하는 심해어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냄새의 진원지는 실낱 같은 빛이 비치는 곳. 물고기를 어둠 속에서 그 희붐한 빛을 향해 천천히 헤엄쳐 가야 합니다. 모래에 감춰진 산호나 심해 곳곳에 좌초된 난파선의 뾰족한 잔해에 찔리지 않도록 가능한 한 느리게 나아갈 것.


‘눈 어둡고 심약한 물고기여,

두려움을 헤치고 그곳에 가야만

비로소 이 지독한 심해의 압력에서 해방될 수 있다’


죽은 사람이 오래 방치된 바닥은 으레 기름 막으로 덮여 있어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워 앞으로 걸어갑니다. 그 방은 바로 당신이 숨을 거둔 곳입니다.


당신은 없지만 육체가 남긴 조각들이 천연덕스레 기다립니다. 침대 위엔 몸의 크기를 과장해서 알려주는 검붉은 얼룩이 말라붙어 있습니다. 베개엔 살아 있을 때 당신의 뒤통수를 이루었을 피부가 반백의 머리카락과 함께 말라붙어 있습니다. 천장과 벽엔 비대해진 파리들이 달라붙은 채 소리 없이 손바닥을 비비고 있겠죠. 이불을 들추면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따뜻한 안식처를 찾아낸 구더기 떼가 뒤엉켜 서로 몸을 들비빕니다. 구더기들이 온몸을 흔들며 춤추는 광경을 보고 있자면 알코올이 담긴 유리 단지 속에서 영원히 박제된 것만 같았던 나의 뇌가 온기를 되찾아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좁아졌던 시야가 비로소 터널을 벗어난 듯 밝게 열리고, 내가 이곳에 방문한 이유가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이곳에서 새로이 탄생한 작은 생명체들은 나에게 스텝을 또 다른 방향으로 옮길 때를 알려줍니다.


방에서 나와 이 집에서 들어내야 할 살림규모를 파악하기 위해 집 구석구석을 탐색하기 시작합니다. 거실을 거쳐 베란다로, 화장실을 거쳐 또 다른 방으로, 부엌을 거쳐 현관 신발장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그 스텝은 빠르고 직선적이죠. 이미 심장에 드리웠던 그림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심장을 옥죄던 어둠은 ‘실체의 구체적인 직시’라는 강렬한 태양을 만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를 감추곤 합니다. 두려움은 언제나 내 안에서 비롯되어 내 안으로 사라집니다. 한 번도 저 바깥에 있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당신은 홀로 숨을 거두었고, 꽤 오랫동안 그대로 머물렀고, 오늘부터 나는 남겨진 흔적은 요령껏 지울 것입니다. 이제 현관문을 열고 나가 일 층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그곳에는 장례를 막 치르고 돌아왔을 당신의 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에게 어떤 말부터 꺼낼지 미리 생각해둬야 합니다.



인간 자살의 아이러니가 있다면 무언가의 도움 없이 혼자서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독극물이든 밧줄이든 무언가 도구를 이용해야만 수월하게 죽음에 이를 수 있다. 맨몸으로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고자 해도 중력이라는 물리법칙에 더하여 자신의 몸에 실질적인 충격을 줄 수 있는 바닥이라는 막강한 보조물이 있어야 한다.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이유는 몸을 맡기는 순간 나 대신 숨통을 끊어줄 깊은 강물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자기 손으로 목을 졸라서 죽을라치면 숨통이 끊어지기 전에 제풀에 지치거나 의식이 혼미해져 반드시 멈추고 만다. 자기 의지로 한순간 호흡을 멈추고 죽는 데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는가? 하물며 자신에게 직접 맨주먹을 휘둘러 죽은 사람은? 그런 무모한 시도는 곧잘 슬랩스틱 코미디의 한 장면이 되곤 한다. 요컨대 인간은 애초에 자신을 쉽게 죽일 수 있도록 탄생하지 않았다.


급기야 인류는 자살의 도구나 보조물 같은 오브제에 대한 집착을 넘어서, 직접 죽음을 도와줄 이를 찾아 나서기에 이르렀다. 이것을 놓고 공동체 의식의 진화로 봐야 할까, 퇴화로 받아들여야 할까?


안락사란 결국 자력만으로는 차마 죽을 수 없어서 의료인 같은 제삼자에게 살인을 청부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연명의료 중단’에 대해선 슬슬 허용하는 쪽으로 법률을 가다듬었지만 적극적인 조력 자살에 대해선 ‘촉탁과 승낙에 의한 살인에 관한 형법’으로 여전히 엄격하게 금한다. 네덜란드와 스위스, 캐나다 등은 명분과 조건을 정하고 일째이 안락사를 합법화했다. 미국 오리건 주는 1997년부터 안락사를 허용했는데,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약 70퍼센트가 ‘자기 선택’에 의한 조력 자살을 찬성했다고 한다. 안락사를 허용하기 전에 사회학자들은 공공보험 인프라에서 소외된 채 노령을 맞은 가난한 자가 몰릴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실상은 오히려 경제력 있는 고학력자들의 우르르 자원했다. 혼자 살기 힘든 것도 인생, 혼자 죽기 힘든 것 또한 우리 인생이다. 세라비 C'est la vie!


그동안 자살이 일어난 곳을 드나들며 목숨을 앗아간 수단이 현장에 그대로 남아 있는 모습을 목도하곤 했다. 베란다 천장이나 가스관에 매달린 빨랫줄의 매듭을 풀고, 캠핑용 간이 화로에 수북이 쌓인 착화탄의 재를 털어서 비우는 일은 고스란히 나의 몫이다. 창문 틈으로 드나드는 바람에 끊어진 밧줄이 흔들리는 장면을 보고 있자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연민이 밀려온다. 유독한 연기를 피우고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한 줌의 재가 봉투 속에 가볍게 떨궈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죽은 이의 선택을 탓하고 싶은 교만 따위는 어느새 흩어지게 마련이다. 죽은 이의 진심을 헤아리지 못하면서 감히 누가 함부로 심판할 자격이 있는가.


죽은 자의 집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직업이라지만 자살에 쓰인 도구를 발견할 때면 고요했던 내 마음에 한순간 파고가 일렁인다. 또 그것이 죽은 이의 직업과 연관된 것이라는 점을 깨달으면 심란해지고, 양가적인 감정이 동시에 밀려온다. 그런 자살 도구는 죽은 이가 맞닥뜨려온 하루하루의 일상과 생계를 밝히는 수단인 동시에, 죽음에 이른 과정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증거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인간의 특성을 지성으로 보고, 기술을 연마하고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호모 파베르’의 지성이 인류를 성공으로 이끈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그 지성이야말로 인류사회를 해체로 이끌 가장 큰 위험 요소라고 봤는데, 만년의 베르그송에겐 양가성을 극복할 방법을 밝히는 것이 가장 큰 철학적 과제였다. 인류를 살리는 것도 지성, 괴멸시키는 것도 지성이라니. 살아 있을 때의 생계 수단이 한순간 죽음의 도구로 전락한 채 발견되는 자살 현장과 일맥상통한다.


지성을 가진 도구의 인간, 호모 파베르가 그 지성으로 자살 도구를 고른다. 참으로 잔혹한 아이러니다. 하지만 본질적인 아이러니는 인간의 생사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등을 맞댔을 뿐, 사람의 생명과 죽음은 결국 한 몸통이고 그중 하나를 떼놓고는 절대 성립하지 않는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쉬지 않고 나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 인생, 인간 존재의 아이러니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한 인간이 그토록 극단적으로 화를 낼 수 있을까? 왜 한 번 솟구친 화는 누군가에게 쏟아내기 전에 절대 가라앉지 않을까? 언제 터질지 예측할 수 없는 우수한 성능의 폭탄은 누구도 손에 쥐려고 하지 않는다. 늘 짧게 깎아 올린 스포츠형 머리에 작은 키이지만 탄탄한 몸집이던 아버지는 누구라도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친구라 부를 만한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의 다정함을 오래도록 동정했다. 폭탄에 묻은 흙을 손수 털어내고 맑은 물에 씻어서 가슴에 고이 품은 유일한 사람이기에, 그것을 만지는 인생은 온통 고통과 상처로 얼룩질 수밖에 없기에.


밤은 청하지 않아도 기어이 찾아온다. 밝아오는 아침을 누구도 외면하지 못하든 어둠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단 하루의 유예도 없이 매일 밤 나를 방문할 것이다. 그것이 자연이 하는 일이다. 때로는 그 무심함에 질리고 때로는 그 변함없음에 안도한다. 그토록 장엄하고 공평무사한 밤이 찾아오면 모든 생각이 작고 부질없다.

-그래도 아버지는 늘 너를 생각하셨다.


느닷없이 어머니가 건넨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처음엔 그 말이 떠오를 때마다 화가 났지만, 또 어느 흐린 날엔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인간 존재의 아이러니는 늘 죽음을 등에 지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무릇 생명이 있는 존재라면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고, 그 사실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삶과 죽음은 양면으로 된 동전처럼 한쪽만으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삶이라는 눈 앞에 펼쳐진 방향만을 보고 걷느라 등짝까지 살펴볼 기회를 얻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날벌레가 물고, 햇볕이 내리쬐어 등이 따가웠지만 오늘 당장 갈 길을 재촉하느라 굳이 뒤돌아보지 않았죠. 행여나 시선을 놓치고 뒤를 힐끔거리다가는 내 등에 바싹 붙어 있는 그 불온하고 무시무시한 것이, 시나브로 앞길을 막고 나서서 당장이라도 걸음을 멈추게 하지는 않을까? 두려움은 우리 시야를 좁게 만들고서 뒤돌아보지 말라고, 좀 더 빨리 달리라고 재촉합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죽음에 대해 경도되고 그 엄숙함에 지나치게 몰입한 탓에 죽음에 관한 언급 자체를 불경한 일로 여겼습니다. 어쩌면 이 기록도 그런 면에는 급진적이라고 할 만하진도 모릅니다. 하지만 죽음을 돌아보고 그 의미를 되묻는 행위, 인간이 죽은 곳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삶과 존재에 관한 면밀한 진술은 오히려 항바이러스가 되어 비록 잠시나마 발열하지만 결국 우리 삶을 더 가치 있고 굳세게 만드는 데 참고할 만한 기전이 되리라 믿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말이 통하기보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