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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허생 Apr 03. 2017

보스를 잃은 문고리 3인방 안봉근에게, 「파도」


    [좁은 서재]

햄토리가 살 것 같은 작은 원룸에 몸을 욱여넣고 살고 있다. 가전과 가구에 대한 욕심은 일찌감치 버렸음에도 책 욕심은 버리지 못했다. 한 권 한 권 사 모은 책이 발로 차일 지경에 이르러, 작은 책꽂이를 샀다. 기껏해야 20권 남짓의 책을 꽂을 수 있는 내 서재다.

작다기보다 좁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그 서재에는, 내가 정말 아끼는 책들만 꽂혀 있다. 이것저것 다 꽂아 둘 여력이 없어 군더더기 없이 내 취향을 듬뿍 반영한 녀석들만 모았다. 고로 이 서재는 아주 편향되고 편협할지도 모른다.






보스를 잃은 문고리 3인방 안봉근에게, 「파도」


봉근이 형,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나ㅇ.. 아차차. 모시던 분이 얼마 전에 구속됐으니 안녕할리가 없겠네요. 안부를 묻는다는 게 그만. 나쁜 뜻은 아니었으니 용서하세요. 형,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언론에 통 나오질 않으니 소식을 알 수가 없어서요. 건강은 하시죠? 


박근혜 씨도 구속됐고, 같이 ‘문고리 3인방’이라고 불린 정호성 씨도 구속됐잖아요. 형이랑 재만이 형 둘 남았어요. 아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형이 경찰 인사에 개입했다느니 어쩌니 하는 뉴스를 봤는데, 형도 얼마 안 남은 거 아닌가 걱정이 되더라고요.


네? 니가 언제부터 걱정을 했느냐고요? 아이고, 이 형님 또 섭섭하게 이러시네. 언제부터긴요. 한참 됐죠. 실은 부끄러워서 말은 못했는데, 저, 엄청 오래전부터 형 유심히 챙겨보고 있었어요. 거짓말 같겠지만 진짜예요. 한참 오래전에 뉴스에 형이 스쳐 지나가는 걸 봤는데, 눈에 팍 들어오더라고요. 압도하는 무언가 있었다고 할까.


나중에 그게 안봉근, 그러니까 형이라는 걸 알게 되고, 이런저런 걸 찾아보다 또 놀랐어요. 형이 박근혜 씨 운전기사 출신이라는 것, 지방대 출신이라는 것에서요. 난다 긴다는 놈들이 설쳐대는 정치판에서 분명 시작이 쉽지 않았을 법한 형이 그 높은 자리에 올라갔다는 거, 대단한 일이잖아요. '대체 저 사람의 힘은 뭘까' 하고 한참을 생각해봤었죠.


그러니까, 그렇게 오래전부터 지켜봤던 형이 곧 감옥에 가게 생겼는데 이 동생이 어떻게 걱정을 안 할 수가 있겠어요. 그나마 날씨가 좀 풀린 다음에 가게 돼서 다행이긴 하지만, 제대로 햇빛이 들지 않을 테니 추울 거예요. 으휴, 뭐 어쩌겠어요. 한창 추울 때 들어온 기춘이 형이나 윤선이 누나에 비하면 다행이구나, 생각하고 버텨야죠.


이렇게 형이 처한 상황을 돌이켜보니 요즘 엄청 바쁘시겠네요. 그동안 저지른, 아니 처리하신 일도 마무리해야 하고, 변호사 만나서 방어 전략도 짜야하고. 그래서 제가 준비했어요. 왜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가라고 하잖아요. 너무 서두르다 큰 실수를 하시진 않을까 걱정돼, 한숨 내려놓고 가라는 의미에서 재밌는 책을 골라봤어요. 토드 스트라서의 <파도>라는 소설이에요.


파도라니, 어쩐지 휴양지에서 펼쳐지는 로맨틱한 사랑 이야기가 나올 것 같지만, 전혀 아니에요. 부제가 '너무 멀리 나간 교실 실험'이거든요. 소설의 배경은 어느 고등학교이고, 파도(The Wave)는 주인공인 벤 로스라는 역사교사가 만든 단체의 이름이에요. 복잡하니 이것저것 빼고, 인물 딱 3명만 정리해 볼게요.


1. 역사교사 벤 로스 

2. 주인공 여고생 로리 (학교 신문부)

3. 주인공 남친 데이비스 (학교 축구부)


간단하죠? 소설은 역사교사인 로스가 수업 중 나치에 대해 설명하다, 로리의 질문에 말문이 막히면서부터 시작해요.


“나치가 그렇게 사람을 잡아다 죽이는데, 같은 나라에서 어떻게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평하게 살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게다가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는 주장까지 해요?”


그는 당시 사회 분위기가 그랬다고 설명하지만, 찝찝했어요. 어딘가 부족하다는 건 로리도 자신도 느끼고 있었죠. 그래서 고안해낸 실험이 파도(The Wave) 실험이에요. 학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나치 체험을 하겠다는 거죠. 어째 벌써 좀 께름칙하죠?


로스의 실험은 수업시간에 학생들의 자세를 교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요. 자세를 꼿꼿하게 펴고 숨을 바르게 마시라고 '명령'하죠. 수업 시간에 각을 잡기 시작한 거죠. 이어 그는 모든 말끝에,  '선생님'을 붙이게 하고 단답형으로 질문하고 답하며 수업을 이끌어요. 카리스마 있는 선생님으로(정확하게는 권위적인) 탈바꿈한 것이죠. 가령, 2차 세계대전은 언제 일어났지?라고 물으면, 1939년이요, 선생님!이라고 군인처럼 답하게 만들어요.


그의 실험은 단순히 수업을 엄격하게 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어요. 로스는 학교 내 사조직인 파도(The Wave)를 만들어요. 조직을 단결시켜줄 로고와 특유의 동작도 고안해내죠. 게다가 '훈련을 통한 힘의 집결!"이라는 해괴망측한 로고까지 만들어요. 장난으로 받아들이던 학생들도 점차 로스 선생님이 장난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아요. 효과도 천천히 드러나기 시작하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벤 로스의 눈앞에 펼쳐졌다. 달팽이 부대는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시작종이 울리기도 전에 아이들은 벌써 교실에 들어와 앉아 있었다.


학생들이 권위적인 리더로 바뀐 로스를 따르기 시작한 거죠. 대체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주인공의 남자 친구이자 축구부 부원이자, 소설의 가장 문제적 인물인 데이비드는 다음과 같은 기분이었다고 해요.


역사 시간에 맞본 ‘일체감’은 너무나 강렬하고 생생한 현실이었다. 다른 일을 할 때는 좀처럼 맛보기 힘든 감동과 설레임을 반 친구들이 모두 함께 나누었다.


같은 동작으로 같은 구호를 외치고 단체 활동을 하는 것에 그는 크게 감화되었어요. 그뿐만 아니라 많은 학생들이 감화되었죠. 하지만 백지에는 색이 선명하게 묻어나듯, 맑은 영혼(?)의 소유자였던 그는 더욱 깊게 파도에 빠져들게 돼요. 축구부 훈련에서도 같은 방법이 효과를 보면서, 가장 열렬하게 로스 선생님을 지지하는 학생이 되고야 말죠.


여자 친구인 로리는, 상황이 점차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느껴요. 많은 학생들이 파도에 가입하며 규모가 커지며 크고 작은 트러블이 생겨났기 때문이에요. 특히 파도 회원이 아니면 배척하는 문화가 생기고, 파도가 가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폭력을 휘두르는 학생들까지 나오게 되자,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해요. 신문부 편집장이었던 그녀는 이러한 문제를 공론화시켜보려 하죠. 하지만 그때마다 우리의 열혈 단원, 데이비드가 나타나서 로리를 방해합니다. 


"로리, 그 따위 글은 이제 집어치워! ‘파도’를 헐뜯는 짓을 그만 두란 말야! 너 땜에 상처 입는 애들 생각도 좀 해보라고!"


자신과 친구들의 소중한 단체인 '파도'를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죠. 파도에 가장 비판적이었던 로리는 파도에 가장 열정적이었던 남자 친구 데이비드와 끝없이 충돌합니다. 둘 사이가 점점 멀어져 가던 그때, 기어코 기사를 쓰겠다는 로리를 데이비드가 밀치고 폭행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됩니다.


갈등은 둘뿐만 아니라 학교 곳곳에서 나타났어요. 파도는 건전한 사조직이 아니라, 공격적이고 배타적, 권위적인 조직이 돼버렸죠. 처음 로스 선생님이 만들고자 했던 나치 조직처럼요. 그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나 정작 중요한 걸 잃어버리고 맙니다. 실험을 고안한 본인조차 열기에 취해, 이 '미친 짓'을 멈춰야 한다는 걸 깨닫지 못한 거죠.

 

학교 안팎에서 파도로 인한 문제가 끊임없이 생겨나자, 학교장과 로스의 부인이 문제점을 지적하고, 로스도 결국엔 잘못을 인정하게 됩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거죠. 이 실험을 완벽하게 마무리해야겠다는 필요를 느낀 그는, 전 파도 회원(대부분의 학생들)을 강당에 모아놓고 연설을 시작해요.


"너희는 저 히틀러 소년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던 거야. 평등한 세상을 위해서 저런 제복도 입었을 테고, 팔을 높이 올리며 ‘하이 히틀러!’도 크게 외쳤을 거야. 같은 편이 아닌 친구들은 감옥이나 수용소로도 보냈겠지.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역사상 벌어진 일이 다시 일어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정작 그들과 얼마나 다르게 행동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자!"


로스의 말이 끝나자, 강당 안은 숨 막히는 침묵만 가득했어요. 파도 회원이었던 학생들은 공허한 눈으로, 자신들이 무슨 일을 했었는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생각하죠.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아이들도 있었어요.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겠죠. 그렇게, 모두에게 묵직한 충격을 남기고 실험이 끝나며 소설이 마무리돼요.


어떤가요. 형 취향에 맞을지 모르겠지만 스토리는 꽤 괜찮지 않아요? 음? 너무 허황된 이야기 같다고요?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이 소설은 실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요. 실제로 이런 실험을 했었죠. 1967년에 미국에서요. 믿기 어렵겠지만, 자기 자신을 단단히 잡는 끈을 놓게 되면 언제든 이렇게 망가질 수 있는 게 인간인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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