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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허생 Oct 27. 2019

모던을 일찍 알아버린 아이

구보

이상 김해경과 구보 박태원. 나는 절망의 무대 경성에서 낭만을 연기한 두 사람을 좋아한다. 이상은 언제나 껄껄 너털웃음을 지었고, 구보는 언제나 헤헤 멋쩍게 웃었으나, 둘은 언제고 울고 있었다. 


홀로 있을 때보다 나란히 놓았을 때 더 잘 보이는 것이 있다. 이상과 구보도 그렇다. 둘은 따로 볼 때보다 함께 있을 때 선명해진다. 천재 이상과 모더니스트 구보. 그들의 불안과 고뇌, 낭만 그리고 문학을 엿보고자 둘을 나란히 놓고 바라보기로 했다.




구보, 변화 속에 태어나다


우리 대한 유자는 부족한 점을 고치라고 하면 불쾌하고 잘못된 일로 생각한다. 그러나 천하의 모든 만물은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오래되면 반드시 폐단이 발생하고, 폐단이 있으면 마땅히 고쳐야 한다. 만약 폐단이 있으면서도 고치지 않으면 끝내 자취도 남기지 않고 없어질 뿐이니 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유교 구신론(1909.1) / 박은식


1909년 12월 7일. 구보가 태어났다. 열강이 틈바구니 속에서 국권을 지키기 위해선 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내부에서 터져 나오던 때였다. 구보의 본명은 박태원(朴泰遠). 클 태(泰). 멀 원(遠). 세상을 크게 멀리 보라는 의미에서 지어준 이름이다. 구보의 할아버지는 세상을 크게 멀리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구보의 본관은 밀양 박 씨. 중인 집안이다. 중인이란 평민으로 태어났지만 기술이나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들이다. 역관(통역), 의관(의술)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지금으로 치자면 전문직 중산층이지만, 사농공상 시대엔 돈은 있으나 근본이 없다고 무시받던 계층이다. 신분제의 비합리성과 폐해를 뼈아프게 느껴온 사람들이다. 당연히 조선의 시스템에 일찍부터 비판적이었고, 개화기엔 그 덕에 누구보다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구보의 할아버지는 약방을 했다. 그냥 약방이 아니라 양약방이다. 서양에서 들어온 약을 판 것이다. 서양의학은 1884년 알렌이 갑신정변으로 부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한 후에야 제대로 알려졌다. 구보의 조부가 양약방을 시작했을 땐 한의학이 주류였다. 서양의학에 대한 불신이 가득했을 때였다. 막연한 두려움에 서양의학을 배척할 때, 실용주의자인 그는 움직였고, 그 판단은 정확했다. 


양약의 약효가 상당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양약방은 상당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특히 성병에 효과가 좋았다). 실용주의자답게 대세였던 한약을 함께 파는 균형감도 있었다. 그의 선구안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첫째 아들은 약방을 이어받게 했고, 둘째 아들은 서양의학을 배우게 했다. 첫째 아들이 구보의 아버지 박용환이고, 둘째 아들이 구보의 작은아버지 박용남이다.


박용남은 경성 의학교 2회 졸업생으로 대표적인 개항기 의사 중 하나가 되었다. 의학이 천대받던 시절에, 그것도 정체도 알 수 없이 '째고 자르고 꿰매는' 서양의학을 배우게 해, 의사를 만든 것이다. 무척이나 과감한 결단이다. 여기에 그가 셋째 딸을 경성여고에 보내 교사를 만들었다는 것까지 더한다면, 구보의 집안이 얼마나 '신식'이었는지 짐작 가능하다.


말하자면, 이들의 삶은 모던했다.


1910년대 서울



모던을 일찍 알아버린 아이


구보는 청계천변에서 태어나 자랐다. 북촌이 궁과 가까운 이유로 예로부터 양반들의 거주지였다면, 청계천은 중인들의 거주지였다. 중인들은 자신들의 기술을 필요로 했던 궁과 그리 멀지 않고, 상업이 발달한 청계천 주변에 터를 잡았다. 이들이 개화에 적극적이었던 덕에 청계천은 경성에서도 일찍 도시의 모습을 갖추던 곳 중 하나였다.


광교 모퉁이, 종로은방 이층에, 수일전에 새로 생긴 동아구락부라는 다맛집과 마지막 손님을 보내고 난 뒤, 점 안을 치우기에 바쁜 이발소와 그때를 만난 평화카페가 잠자지 않고 있을 뿐으로, 더구이 한약국집 함석 반지는 외등 하나 달지 않은 처마밑에 우중충하고 또 언짢게 쓸쓸하다.

천변풍경(1936) / 박태원


금은방과 당구장(다맛집), 이발소, 카페, 약국 등 지금의 도시에서 볼 수 있는 근대 상업시설들이 청계천에 있었다. 구보의 집은 그런 청계천 중에서도 노른자인 광통교 주변에 있었다. 할아버지의 약방을 아버지가 이어받았고, 작은아버지는 그 옆집에 서양의사로 개원을 했다. 그렇게 대를 이어온 가업이 '병원 옆 약국'이라는 현대적 의미의 비즈니스로 완성되었다.


구보는 일찍 변화를 접할 수 있었고, 신식에 둘러싸여 자랐다. 예컨대 해방 전까지도 아플 때 한약을 써야 하느냐, 양약을 써야 하느냐 하는 갈등이 있었는데, 대체로 신세대가 양약을, 구세대가 한약을 선호했다. 구보에겐 그런 갈등이 없었다. 아버지가 약방을 했으니 누구보다 약효를 잘 아는 사람이고, 작은아버지는 세브란스에서 서양의학을 배운 의사다. 고민할 것 없이 양약이다. 새로운 것을 갈등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천해의 환경이었던 셈이다.


일제강점기 청계천 풍경


이 '모던 패밀리'가 구보에게 주어진 배경이라면, 구보가 타고난 것도 있었다. 타고난 이야기꾼, 문학소년의 기질이다. 그는 할아버지에게 말을 배우자마자 옛날이야기를 졸라 들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좋아했다. 공책에 '옛날 얘기' 목록을 써놓고 손수 제목까지 붙여 종일 끼고 다닐 정도였다.


<춘향전>, <심청전> 등 '구소설'은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떼었고, 관심은 이내 '신소설'로 향하였다.


나는 또 나대로 알거나 모르거나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셰익스피어, 바이런, 괴테, 하이네, 위고.... 하고, 소설이고, 시고, 함부루 구하여 함부루 읽었다.

춘향전 탐독은 이미 취학 이전(1940.2) / 박태원


경성이라는, 식민지 수탈을 위해 이식된 껍데기 도시에 출연한 첫 세대로서, 구보는 근대를 흡수하며 자랐다. 특히나 서양문학은 구보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문학은 세상의 집약체이자 세상을 바라보는 창으로써 그를 감화시켜 나갔다.


거기서 구보는 근대를 배웠고, 세상을 향한 시선을 배웠다. 변화를 익혔다. 모더니스트가 되었다.


관찰과 모더니즘은 구보 문학을 구성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구보는 고독을 느끼고, 사람들 있는 곳으로, 약동하는 무리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 생각한다. 그는 눈앞의 경성역을 본다. 그곳에는 마땅히 인생이 있을 게다. 이 낡은 서울의 호흡과 또 감정이 있을 게다. 도회의 소설가는 모름지기 이 도회의 항구와 친하여야 한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1934) / 박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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