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허생 Oct 25. 2019

불안을 일찍 알아버린 아이

이상

이상 김해경과 구보 박태원. 나는 절망의 무대 경성에서 낭만을 연기한 두 사람을 좋아한다. 이상은 언제나 껄껄 너털웃음을 지었고, 구보는 언제나 헤헤 멋쩍게 웃었으나, 둘은 언제고 울고 있었다. 


홀로 있을 때보다 나란히 놓았을 때 더 잘 보이는 것이 있다. 이상과 구보도 그렇다. 둘은 따로 볼 때보다 함께 있을 때 선명해진다. 천재 이상과 모더니스트 구보. 그들의 불안과 고뇌, 낭만 그리고 문학을 엿보고자 둘을 나란히 놓고 바라보기로 했다.




인간은 나약하게 태어나 보살핌을 통해 성장한다. 그 보살핌으로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아이가 걷고, 말하고, 쓰게 된다. 하나의 인격체가 될 때까지 부모에게 모든 것을 내맡기는 것이다. 즉, 한 사람의 인생에 환경이 끼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다.


그러니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가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 어떤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는지 살펴봐야 한다. 그것으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 과정을 빼놓고선 어떤 것도 설명할 수 없다.


이상과 구보 같은 비상한 인물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비상한 인물 뒤엔 비상한 스토리가 있기 마련이고, 비상한 스토리란 비상한 환경에서 태어나는 법이다. 문제는, 그 비상이라는 것이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상과 구보 뒤엔 비범한 스토리, 비범한 환경이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이상은 그 환경이 나쁜 의미로 비범했고, 구보는 그 환경이 좋은 의미로 비범했다는 것이다.


 

이상, 가난 속에 태어나다


한국 황제 폐하와 일본국 황제 폐하는 두 나라 사이의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시키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자고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면 한국을 일본국에 병합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확신하고 이에 두 나라 사이에 합병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하여 한국 황제 폐하는 내각 총리 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을, 일본 황제 폐하는 통감(統監)인 자작(子爵) 사내정의(寺內正毅,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각각 그 전권 위원(全權委員)으로 임명하는 동시에 위의 전권 위원들이 공동으로 협의하여 아래에 적은 모든 조항들을 협정하게 한다.

1.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함.

- 한일 병합 조약 (1910.8.29)


1910년 9월 23일. 이상이 태어났다. 국권을 피탈당한 경술국치로부터 한 달이 지나지 않은 어수선한 때였다.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金海卿). 바다 해(海). 벼슬 경(卿). 바다를 다스리는 넓은 사람이 되라는 뜻에서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다. 정작 그 이름을 지어준 할아버지는 벼슬을 하지 못했다. 어느 집안이나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기 마련인데, 이상의 할아버지 김병복은 내리락을 담당하는 인물이었다.


이상의 본관은 강릉 김 씨. 그런대로 한 자락 하던 가문이었다. 이상의 증조부 김학준은 정 3품에 해당하는 당상관을 지내기도 했다. 지금으로 치자면 장관, 못해도 차관급은 되는 고위공무원이다. 300평 저택이 있는, 먹고 살 걱정은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 이상의 할아버지가 벼슬에 오르지 못하며 가세는 서서히 기울어갔다. 거기에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바꿔 말하자면, 일제의 수탈이 시작되었다. 조선인이라면 특별한 친일을 하지 않는 한 먹고 살기 빠듯해졌다는 것이다.


이상의 아버지 김영창은 궁내부에서 일했다. 벼슬직이 아니라 인쇄소의 말단 직원이었다. 그마저도 오래 하진 못했다. 절지기 칼에 손가락을 셋이나 잃었기 때문이다. 그는 궁여지책으로 이발소를 개업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외가에 손을 벌릴 수도 없었다. 이상의 어머니 박세창이 고아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들의 삶은 궁핍했다.


신당리(新堂里) 버티고개 밑 오동나뭇골 빈민굴에는 송장이 다 되신 할머님과 자유로 기동도 못 하시는 아버지와 오십 평생을 고생으로 늙어 쭈그러진 어머니가 계시다.

동생 옥희 보아라(1936) / 이상 


일제강점기의 토막촌



불안을 일찍 알아버린 아이 


이상은 큰아버지 집에서 자랐다. 이상의 할아버지 김병복의 결정이었다. 친부모의 삶이 궁핍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큰아버지에게 자식이 없던 탓이다. 이상의 큰아버지 김연필은 총독부 건설 기사다. 벼슬은 아니지만 기술로 내리막을 걷던 집안의 가세를 오르막으로 만들어낸 인물이다. 첫째 아들에게 자식이 없으면 으레 둘째의 자식을 양자로 보내 가문을 잇게 하던 시절이다. 이상은 나이 셋에 가문을 위해 차출되었다.


다행히 이상은 애정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가족들은 똘똘한 아이 이상이 가문을 다시 일으킬 적임자라 생각했다. 문제는 할아버지 김병복이 1년 후에 생을 마감하며 시작됐다.


이상이 4세가 되던 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큰아버지는 출장으로 중국에 갔다 웬 여인을 데리고 왔다. 첩을 들인 것이다. 첫째 부인은 그 길로 집을 나서 돌아오지 않았다. 이상에게 애정을 듬뿍 주던 큰어머니가 떠났지만, 새어머니가 그 자리를 메워줄 수 있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새로운 큰어머니 김영숙에게 아들이 딸려있었던 것이다. 이상의 이복동생 김문경이다.


김연필은 여전히 똘똘한 이상을 아꼈지만, 김영숙의 애정은 이상보다 자신의 아들인 김문경을 향하는 날이 많았다. 이상과 함께 자취를 하기도 했던 친구 문종혁은 이상의 큰어머니를 이렇게 기억했다. 


상의 백모님은 이북 분이었다. 미모의 여인이었다. 어느 편이냐 하면 좀 독기가 서린 것 같은 얼굴이시다. 깔끔하고 다루기에 조심되는 성격이셨다.

그러나 이 어른도 남편에게는 물론이요 시어머니나 조카 상(이상)에 대해 간섭하거나 대립하는 것을 본 일이 없다. 다만 그의 아들 문경이를 나무랄 때 보면 옆에서 보고 듣기에도 따금하시다.

심심산천에 묻어주오(1969.4) / 문종혁


잔소리도 애정이 있어야 나오는 법이다. 어린 이상은 무관심과 질시 속에서 자라야 했다.


이때 이상의 위치는 20여 년 후 큰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결정을 통해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상이 아니라 이복동생 김문경이 호주 상속을 한 것이다. 심지어 이상은 큰아버지 호적에 이름을 올리지도 못했다. 껍데기와 같은 위치였던 셈이다.


큰아버지 집에서 뛰쳐나와 친부모에게 갈 수도 없었다. 경제적, 정신적으로 절대자의 위치에 있던 큰아버지가 허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애가 사직동이나 적선동으로 제 부모와 남매를 찾아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거기에 간다는 것을 알면 우리 어른에게 호통을 만났지요.

이상의 큰어머니 김영숙


망국. 식민 지배.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친부모. 친부모와 이별. 똑똑하고 재력 있는 큰아버지. 그러나 첩을 들인 큰아버지. 자신에게 무관심한 큰어머니. 이복동생. 3살에 집을 떠난 이상은 23살이 될 때까지 이 혼란 속에서 지내야 했다. 자라는 내내 이상은 결핍과 불안에 시달렸다.


그러나 이상은 자신을 감춰야 했다. 다시 가난으로 떨어질 수 없었으므로. 


이상이 19살에 그린 자화상


거기서 이상은 고독을 배웠다. 자신을 숨기는 법을 배웠다. 포즈를 배웠다.


고독, 위장, 포즈는 이상 문학을 구성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너는누구냐그러나문밖에와서문을두드리며문을열라고외치니나를찾는일심이아니고또내가너를도무지모른다고한들나는차마그대로내어버려둘수는없어서문을열어주려하나문은안으로만고리가걸린것이아니라밖으로도너는모르게잠겨있으니안에서만열어주면무엇을하느냐너는누구기에구태여닫힌문앞에탄생하였느냐 

정식(1935.4) / 이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