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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soda Mar 31. 2016

싱가포르 거닐기

2015년 여름 #9 마지막 날 

마지막 날 아침이 밝았는데 하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그리 꼭두새벽에 일어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바깥이 어둡다 했더니, 범인은 하늘을 가득 뒤덮은 먹구름이었다. 시커멓고 묵직한 먹구름이 내려앉은 하늘과 세찬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야자수들. 조식을 먹으러 내려간 샹그릴라 리조트의 레스토랑은 너무도 을씨년스러웠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바람에 날려온 나뭇잎들이 레스토랑 안팎을 굴러다니고, 굵은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수영장에는 당연히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비행기 타기를 무서워하는 나는 겁에 질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기념으로 사진 한 장 찍어두었더라면 좋았을걸 싶지만, 당시에는 너무도 당황스러워서 카메라를 꺼내어 들 정신조차 없었다. 우울한 기분으로 레스토랑의 뷔페 코너를 돌면서 계속해서 바깥 상황을 흘끔흘끔 확인했다. 오믈렛을 만들어주는 직원은 이곳의 날씨 변화에 대해 잘 알 것 같아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슬그머니 물어보았다.

"날씨가 너무 이상하지?"

"그러네, 유감이야."

"네 생각에는 갤 것 같아?"

"글쎄. 그러길 바라지만 모를 일이지."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쿨한 표정과 미소뿐이었다.


그렇게 불안한 마음으로 꾸역꾸역 밥을 먹기 시작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하늘이 밝아지고 있었다. 검은색에 가까웠던 구름이 하얗게 변하고, 심지어는 햇빛까지 언뜻 비칠 듯한 날씨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아침 날씨만큼이나 변덕스러운 내 마음은 또 이내 놀러 온 기분을 되찾고, 심지어는 옆 테이블 한국인 관광객들의 "망고스틴을 잔뜩 가져다 먹어야 해!"라는 말을 참고 삼아서 망고스틴을 몇 개 더 가져다 먹기까지 했다.


아침을 다 먹고 나니 수영장에도 언뜻언뜻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얀 구름이 빽빽하게 깔리긴 했지만 햇살이 내리쬐는 날씨였다. 엄마는 수영장 선베드에서 책을 읽기로 하고, 나와 M은 역 앞에 있는 toast box에서 카야 잼도 살 겸, 어제 사지 못한 코코넛 아이스크림을 사기 위해서 Beach Station까지 산책을 가기로 했다. 걸어가다가 정류장에서 트램을 마주치면 탈 생각이었는데, 애매한 위치에서만 트램과 조우하는 통에 결국 걸어서 거기까지 갔다.


드디어 아이스크림

어제저녁에 코코넛 아이스크림 원정을 나왔던 곳에서 조금, 정말 아주 조금만 더 갔을 때 가게를 발견하고는 엄청난 허탈감과 동시에 엄청난 달성감을 맛보았다. 아직 가게 문을 여는 시각이 아니었기에 일단은 역에 가서 카야 잼을 사기로 했다. 카야 잼 세 개(14.4)와 땅콩 잼 하나(6.2)를 사고 신나게 돌아와서 아이스크림을 세 개(16.5) 샀다.


문제의 코코넛 아이스크림.

나는 그 아이스크림이 정말로 맛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맛이다. 아무래도 이 아이스크림에 대해서는 이래저래 취향을 탈 것 같기는 한데, M은 그 난리를 피우면서 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시원하고 좋다는 정도의 반응이었고, 엄마는 간단하게 맛있다고 하는 걸로 봐서 그렇게나 맛있지는 않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말 기온이 순식간에 훅 올라가는 바람에 엄마에게 아이스크림을 배달했을 때는 반쯤 녹아 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M은 거기서 아이스크림을 사면 덤으로 한 잔씩 주는 코코넛 워터는 맛이 없다고 했고, 나는 마실 만은 했으며, 엄마는 시원하고 나름대로 맛있다고 했다.


거의 지나다니는 길로만 썼던 실로소 비치

집에 돌아갈 시간이다.

어중간한 오후 시간대 비행기를 잡는 바람에 어디 다른 일정을 넣기도 애매해서 그냥 샹그릴라 주위에서 몇 시간 정도 어슬렁거리기로 했다. 사람들의 평이 좋은 실로소 비치(Siloso Beach) 입구 쪽에서 한바탕 사진을 찍고, 사온 잼 따위를 가방에 챙겨 넣고 나자 슬슬 공항으로 갈 시각이 다가왔다. 짐이 많아서 비보시티까지 나가 MRT를 타는 게 번거로울 것 같아서 호텔 쪽에 택시를 잡아달라고 했다(26.7).


공항 안에 입점해 있는 대중식당(?) 같은 곳에서 점심을 해결했는데, 어느 공항이든 안에서 먹는 음식이 늘 그러하듯 가격대에 비해 그리 맛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못 먹을 맛도 아닌 그럭저럭 괜찮은 식사였다.  그렇게 얼마 동안 공항에서 시간을 보낸 뒤에 비행기를 타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두 번 나왔던 기내식은 응당 그런 종류의 음식이 그러하듯 별다를 것 없는 기내식 맛 기내식이었는데, 중간에 나누어줬던 꽝꽝 얼린 킷캣 아이스크림이 어찌나 맛있던지 모른다. 지금까지 비행기 안에서 얻어먹어 본 음식들 중 가히 최고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참, 너무 심하게 얼려 있어서 이가 약간 아프긴 했으니, 평소에 딱딱한 걸 잘 못 먹는 사람이라면 시간을 조절해서 천천히 먹어야 할 듯했다.

살짝 감동해서 사진까지 찍었다.


이렇게 싱가포르에서의 모든 일정이 끝났다.

싱가포르에 대해서는 마지막 출장의 기억뿐이었는데, 엄마와 M과 함께 다녀오고 나니 뭔가 이미지가 조금쯤 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불어오던 강가의 풍경이나 목적 없이 이리저리 걸어 다니던 밤거리도 일이라는 시공간 속에서의 추억이 아니라 조금 더 특별하고 사적인 여행의 추억으로 변화했다. 여행이 주는 이러한 감각 때문에, 나는 또 다시 비행기를 타고 어딘가로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준비가 부족해서 실패했던 경험이나 소소하게 마음이 상했던 일들, 여행지에서 만난 어떠한 종류의 이상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은 불과 반년도 지나지 않아서 빛이 바래 사라지고, 남는 것은 기분 좋은 여운과 좋았다는 잔상, 그리고 얼굴을 쓸던 바람의 촉감뿐이다.


그래, 또 어딘가로 여행을 가보자.

비록 얼마 전에 두 달에 한 번은 여행을 다니고 싶다고 말했다가 M에게 타박을 듣기도 했지만 말이다. 실제로 가는 것도 아니고 꿈도 못 꾸냐며 반박을 하긴 했지만, 나를 둘러싼 환경이 그럴 만하지 않다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여건을 바꾸는 것. 그리고 또 여행을 다녀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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