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mmersoda Apr 11. 2016

제주도 겉핥기

2016년 봄 #2 첫째 날 저녁

프런트에 부탁해서 택시를 불렀다.

여행 계획을 세울 때 몽상 드 애월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그렇게 좋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일단 가볍게 그쪽으로 가서 차도 한 잔 하고 저녁도 먹을 생각이었다. 택시를 타서 "몽상 드 애월로 가주세요." 했더니, 생전 처음 들어보는 언어라는 듯이 "뭐라고? 어딜 간다고?" 하셨다. 동네에 있는 카페 이름까지는 당연히 모를 수도 있겠다. 나는 "카페 이름이 몽상인데요……." 하고 말꼬리를 흐렸고, H는 옆에서 "내비게이터에 몽상이라고 쳐보시면 안 되나요?" 하고 넌지시 말했다. 하지만 그는 "나 참, 아가씨들, 애월이 좁은 곳이 아니에요. 넓다고. 그러니까 애월에서 어디를 갈 건데? 관광객들이 뭘 모르고 무조건 애월로 가자고 하는데, 여기가 넓어."라며 지극히 당연한, 하지만 조금 살살 말해주면 안 되나 싶은 말투로 물었다.

애월의 어디를 갈 거냐고 거듭 채근하는 말을 들으며, 나는 갈 곳을 표시해 놓은 지도를 불러내서, 이곳은 알까, 만약 이곳도 모른다고 하면 어디로 가자고 해야 하나 걱정하며 조심스레 "저기, 그러면 봄날 카페는 아세요?" 하고 물었다. 이번에는 "알아. 근데 아가씨들은 거길 어떻게 알아?"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보지도 않았던 드라마의 제목을 주워섬겼다. 


다행히 택시는 목적지를 정하고 달리기 시작했지만 차 안의 공기는 뭔가 혼이 나는 듯한 분위기로 축 가라앉았다. 해안을 따라가는 도로에서는 내내 왼쪽 편으로 카페와 펜션, 오른쪽 편으로 바다가 펼쳐졌다. 석양이라 부르기에는 아직 은빛이지만 바다 위에 반짝거리는 빛의 선을 길게 늘어뜨린 태양이 줄곧 따라왔다. 아마도 어떤 종류의 석양 포인트 이리라 짐작되는 곳에서는 차를 세워놓고 삼각대를 설치해서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었다.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모르겠지만, 말하자면 '청춘들의 멋진 제주도 여행 사진' 같은 게 완성될 법한 장면이었는데, 아쉽게도 우리는 택시를 타고 있었기에 내리지 못했다. 


봄날 카페에 점점 가까워지자 그때까지 묵묵히 운전만 하시던 택시 아저씨가 갑자기 "아가씨들, 맨도롱 또똣의 의미는 알아?"라고 물어보았다. 모른다고 했더니 이러저러한 뜻이라며 설명해 주셨고, 내릴 때에는 "원래는 콜 비를 천 원 더 받아야 하는데, 내가 특별히 안 받을게." 하셨다. 택시를 타고 오는 내내 불편한 기분이었는데 천 원이 다 무슨 소용이 있나 싶기도 했고, 그래도 나름 친절하려고 애쓰는 분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지인들의 말에 따르면 나는 생각하는 게 얼굴에 다 드러나는 사람이라 하니, 어쩌면 아저씨는 백미러에 비친 내 얼굴에서 '이 분위기에서는 물만 마셔도 체하겠다.'는 생각을 읽어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택시에서 내리자 바로 바다가 보였다.

썰물이다.

바다를 왼편에 끼고 약간 올라가니 봄날 카페가 바로 보였는데, 옆을 슬쩍 확인하자 골목 어귀에는 인터넷에서 유명한 가게인 듯한 놀멘도 있었다. 아쉽게도 '재료가 다 떨어졌어요'라는 표지판이 내려와 있었는데, 다른 곳에서 먹은 해물라면이 딱히 별로 맛이 없었던지라 여기는 과연 맛있을지 이제는 더 궁금하다. 참고로, 마지막 날에도 애월에 들렀는데, 그때도 놀멘은 '재료가 다 떨어졌어요' 상태였다.


카페는 유명한 관광지가 된 모양이라, 앞과 옆으로 사람이 많았다. 모든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고, 우리도 사진을 찍었다. 간판 앞에서 한 장, 카페 왼쪽 옆에서 한 장, 카페 마당 앞에서 한 장……. 주인인 듯 보이는 남자분이 마당 앞에 서서 "안에서 드시려면 저쪽에서 음료를 먼저 주문해 주세요." 했다. 우리는 우선 몽상까지 올라갔다 내려오기로 하고 일단은 지나쳤다. 몽상은 카페 오른쪽으로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 사막처럼 거친 황토색 흙 둔덕 위에 자리 잡고 있는데, 듣던 대로 안쪽은 만원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밖에서 사진을 찍으며 놀고 있었다.

남의 청춘을 내 카메라에 담아 보자.


그제야 어디선가 '애월 쪽 바다는 석양이 질 무렵이 예뻐요.'라는 글을 본 기억이 났고, 우리는 봄날 카페로 돌아가서 따뜻한 차를 한 잔 하기로 했다. 다시 카페 이용 안내를 읽어보니 실내에 자리가 없다 해도 테이크 아웃으로 커피를 구매하면 마당으로는 들어갈 수 있는 모양이었다. 저녁이 되자 날씨가 추워져서 그러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한라봉차와 자몽차를 사서 실내로 들어갔다. 신발을 신긴 아이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자기 아이의 신발에 묻은 흙까지 사랑스러운 건 부모뿐이라는 걸 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참에 그들이 나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해왔다. 사람 당황스럽게……. 사진을 약간 대충 찍어주는 걸로 소심한 응징을 하고, 치즈 수플레를 추가 주문해서 먹었다.

좋은 의미에서 상상 그대로의 맛이다.


봄날 카페에서는 바다 쪽 창가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해가 완전히 떨어지는 걸 기다리면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옆 테이블에 앉은 남자분이 스케치북으로 그림을 그리시길래 나도 냅킨에 슥슥.


바다 위에 안개인지 미세먼지인지 구름인지 뭔가가 뿌옇게 깔려 있어서 해가 뚝 떨어지는 장면은 보지 못했다. 옆 골목을 돌아가면 있는 봉봉이라는 빵집에서 내일 아침에 먹을 한라봉 빵을 두 개 사고, 조금 많이 걸어서 수제 버거와 해물라면을 파는 식당으로 갔다. 여기는 나름 인터넷에서 유명한 곳이기는 했는데, 수제 버거는 차가웠고 맛이 없었으며 H는 "애가 햄버거 먹고 싶다고 하면 엄마들이 '그거 대신 이거 먹어.'라며 만들어주는 버거 같은 맛"이라 평했다. 나도 기본적으로 그 말에 동의했다. 정말 '햄버거를 못 먹어서 먹는 대체품'이라는 의미에서 그랬다는 말인데, 솔직히 햄버거를 대체할 만한 정크함 and/or 맛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해물라면은 그냥 해물을 넣고 끓인 라면 같은 맛이었는데, 이건 '해물라면'에서 '그냥 해물을 넣고 끓인 라면' 이상의 뭔가를 기대한 내 잘못이지 싶다. 결론적으로 함께 나온 갓 튀긴 감자튀김(H가 말하기로는 '개중 원가가 가장 싼 것')이 가장 맛있었다는 건 뭐, 비밀은 아니다.

그리고 H가 원가 이야기를 하며 나에게 해물라면에 들어있는 해물을 건져주다가 내가 낙지 종류를 먹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신선한 낙지를 먹지 않는다는 건 다시 말해 이 정도의 해물라면이 먹고 싶다면 집에서 해물 좀 사다가 끓여먹으면 그만이라는 건데, 다른 해물라면 전문점에서 먹었더라면 그 이상의 뭔가를 먹을 수 있었을까 진심 정말 궁금하다. 제주도에는 해물라면 전문점이 많은 모양이던데.


아무튼 이제 숙소로 돌아올 시각이 되었다.

고민하던 우리는 출발지와 목적지를 미리 입력할 수 있는 앱을 이용하기로 결심하였고, 그때 만난 택시 기사님은 이 여행을 통틀어서 가장 좋은 분이셨다. 좋다는 게 기준이 애매한 일이긴 한데, 일단 과도하게 친절하려 하시지도 않고 그렇다고 과도하게 퉁명스럽게 대하시지도 않았다면 전달이 될까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제주도 겉핥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