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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soda May 03. 2016

제주도 겉핥기

2016년 봄 #4 둘째 날 오후

주상절리를 보러 가는 건 좋은데, 또 교통수단이 문제다. 버스를 타려면 제주도에서 늘 그랬듯 애매하게 걸어야 하는 데다 택시는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택시가 보인들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이 거리를 태워 달라 하겠나. 그렇다면 이제 남은 선택지는 도보뿐이다.


출발 전의 대화가 생각이 났다. "올레길 걷고 싶으시면 한 구간 정도는 같이 걸어도 돼요."라는 H의 말에 나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딱히 안 걷고 싶은데요."라 대답했었다. H도 물론 걷는 건 싫어한다고 했고. 그런데 막상 제주도에서 올레길을 걷게 될 줄이야. ……이렇게 말하면 엄청 많이 걸은 것 같겠지만, 현실은 1킬로미터도 안 걸었지 싶다. 하지만 중간까지는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고, 붉은 고무를 깔아놓은 것 같은 길은 아무런 멋도 없고, 해는 쨍쨍 내리쬐는 데다 바람까지 불어왔으니, 정말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여보게들, 빌어먹을 악마가 길을 얼마나 늘여놨는지 아는가? 걷고 또 걷고 했지만 끝이 없었지! 마치 누가 내 다릴 부러뜨린 것만 같았다구.(오월의 밤)"


그런데 막상 사진을 정리하고 있노라니 무척이나 좋았던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실은 신났던 게 아닐까, 스스로의 기억이 약간 의심스럽다. 그렇다면 표현을 바꾸어 보자. 사람이 없어 한적하고, 길은 고무를 깔아 폭신하고, 햇살은 따사로운 데다 바람까지 산들산들 불어왔다…….


아무튼 그렇게 걷다 보니 길에 사람이 점점 많아졌고, 마침내 눈앞에 매표소가 나타났다. 입장료는 어른 이천 원. 드디어 주상절리대에 도착했구나 기뻐했던 것도 잠시, 우리는 단지 매표소에 도착했을 뿐이었다. 키 큰 야자수를 잔뜩 심어놓은 공원 안으로 한참을 걸어 들어가니, 그제야 저 멀리 주상절리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올망졸망 귀엽다.


H가 이번 여행에서 꼭 가고 싶었던 곳이 테디베어 박물관이었다면, 주상절리대는 내가 이번 여행에서 꼭 가고 싶다고 지목한 곳이었다. 이유는 예전부터 지구의 화산 활동에 깊은 흥미를 느끼고……, 뭐 그런 학구적인 건 물론 아니다. 사실은 정말 오래전에 어떤 지인이 제주도를 다녀온 뒤에 주상절리대가 가장 좋았다고 말했기 때문으로, 당시 그녀가 보여준 사진은 줄곧 내 기억에 남아있었다. 사진에는 주상절리가 자세히 찍혀 있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단지 그녀가 새초롬하게 앉아 있는 뒷모습과 햇살을 반사하는 바다, 그리고 아마도 살랑살랑 불어오는 것 같은 바람만 기록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그 사진의 분위기가 나를 이곳으로 인도한 셈이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왼쪽 주상절리와 오른쪽 주상절리.


결론부터 말하자면 분위기는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섬 출신이라 이런 탁 트인 바다 같은 것에 익숙하지만, H는 육지 한복판에서 자라난 터라 거대한 바다를 보면 항상 어떤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고 했으니 그녀도 나름 인상 깊게 즐긴 것 같았다. 엄청나게 바람이 불어오는 터라, 온갖 방향으로 머리카락이 죄다 흩날리는 사진을 찍을 수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생생했던 현장을 기록으로 남기는 데 성공한 셈이다. 다만, 햇살에 비치는 잔잔한 먼 바다와 검고 갈라진 절벽을 철썩철썩 때리는 역동적인 파도가 동시에 가져다주는 평온함과 두근거림은 단지 가슴속에만 기록해두는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면 늘 생각나는 <더블린 사람들>의 <구름 한 점>.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만 느끼고 쓸쓸히 돌아서는 법이다.


주상절리를 보고 나서 어디로 갔냐 하면, 

제주 컨벤션 센터는 그냥 지나가기만 했다. 빙 둘러서 버스 타러 가다가 유채꽃이 예쁘게 피어 있어서 찍었다. 주상절리대 반대편 주차장 쪽으로 나와서도 한참을 더 걸어가서 컨벤션 센터를 돌아 정문 건너편으로 가면 버스 정류소가 나온다. 가는 길에는 제법 예쁘게 꽃들이 피어 있었고, 사람들이 잘 걸어 다니지 않는 길인지 인도에는 꽤 잡초가 나 있었다. 그리고 차도에도 차가 별로 안 다녔는데(그런 길이 으레 그러하듯 가끔 오는 차는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지만), 저 멀리 차도 한복판에 앉아 있는 웬 여성분이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위험한 거 아닌가 싶었는데, 사진을 찍는 듯하더니 다시 도보로 올라서는 것이다. 이제 보니 남자도 하나 있었다. 둘은 커플인 듯했는데, 우리가 그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점점 말다툼이 격화되고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둘이 싸우다가 너무 화가 난 여자가 차도에 들어가는 바람에 더 크게 싸우고 있거나, 여자가 차도에 들어가서 남자가 너무 화가 났거나, 혹은 차도와 그 싸움은 전혀 무관하거나. 이유가 뭘까 약간 궁금했지만, 곁을 지나가면서 들려온 말이 외국어라서 결국 단서조차 잡지 못했다.


버스를 십여 분 기다리다가 이중섭 거리로 향했다. 조사할 때에는 미술 거리라서 각종 수제 공예품 같은 특이한 기념품을 살 수도 있고, 맛있고 특이한 카페도 많으며, 심지어 벚꽃까지 꽤 많이 피어있을 거라는 이야기였는데, 도착해서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는 게 결론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다녀온 사진을 보니, 어디를 어떻게 돌아보면 좋을지 더욱 자세하게 조사하고 왔더라면 회피가 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이중섭 거주지와 미술관 주변 산책로는 무척 좋았다. 봄이 그대로 내려앉은 것 같은 분위기.

돌담길을 어슬렁어슬렁.

잠시 봄을 만끽하다 보니 어느새 비탈길을 다 내려왔다. 여기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한 것 치고는 짧은 여정이었다. 그렇다면 어딘가 걸어서 갈 수 있는 다른 곳을 한 군데 더 가볼까 해서, 저녁을 먹기 전에 정방폭포에 들러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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