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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soda May 08. 2016

제주도 겉핥기

2016년 봄 #5 둘째 날 저녁

고작 2박 3일 다녀오고선 뭘 이렇게 쪼개 쓰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둘째 날 저녁에 대해 써보자.


이중섭 거리에서 아주 가깝게 걸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방폭포로 향했다. 걸어서 갈 만한 거리이기는 했지만 그다지 가깝지는 않았고, 중간에 '정방폭포 여기서 150m' 표지판을 발견하고 좋아했더니 거짓말 안 하고 10미터는 넘게 더 간 곳에서 똑같은 표지판을 또 발견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돌아가진 않겠지만, 표지판으로 사람을 속이다니 제법이다. 저런 건 소풍으로 산에 갔을 때 교사들이 주로 치는 거짓말인데.


폭포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절벽에서 물이 떨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즉 바다로 바로 떨어지는 폭포라는 것은 해안가가 절벽으로 되어 있다는 거고, 다시 말해 그 폭포를 보려면 절벽을 내려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계단은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가 무릎이 더 아프다. 게다가 이렇다 저렇다 해도 오늘 참 많이 걸어서 무릎이 욱신거렸다.

중간까지 내려왔다. 아직도 까마득하다.

H는 계단을 내려갈 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폭포 옆까지 가지 않고 그냥 계단 아래쪽 바위에 진을 친 것을 보니 아무래도 그녀 또한 지친 것 같았다.

일단 계단을 다 내려오면 큼지막한 바위를 넘어서 폭포로 다가가 사진을 찍으면 된다. 바위 하나에 앉아서 멍하게 폭포를 보고 있으면, 뒤에 온 사람들이 똑같은 자세로 비틀비틀 폭포로 다가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시원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석양도 아주 아름답다. 남는 시간이 있다면 편하게 쉬기에 딱 적당할 것 같았다. 그래서 딱히 다른 계획은 없는 우리는 거기 앉아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바위 위에 앉아서 보는 바다와 폭포.

마치 멍 때리기 대회라도 나온 것처럼 석양과 폭포와 바다를 보고 있으니, 어디선가 커흡 소리가 들린다. 설마설마했더니 폭포 바로 앞의 큰 바위(아마도 촬영 포인트)에서 사진을 찍던 긴 머리의 예술가풍 아저씨가 영혼까지 긁어모아 물에 침을 뱉는 중이었다. 늘 생각하는 건데 침을 뱉지 않는 사람의 정신적 물리적 건강을 위해서 침 뱉는 사람들한테 타구라도 보급해야 하는 거 아닐까 싶다.


아무튼 더 쉬어갈 만한 환경이 아니라서, 나와 H는 정방폭포에서 올라와서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갔다. 이 거리가 또 상당해서, 시외버스에 탑승하고 나서는 완전히 잠에 푹 빠져들고 말았다. 물론 나만.


저녁은 관광객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있다는 갈치구이 전문점에서 먹었는데, 뭐, 맛있었다. 소금 간이 약간 덜한 듯하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갈치는 크고 잘 굽혔고, 직원이 살을 깔끔하게 발라주고, 입에서 살살 녹았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택시를 기다리자.

저녁을 먹고 나니, 해가 넘어가고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숙소 옆에는 차를 타면 1분, 걸어가면 7분이 걸린다는 편의점이 있다고 들었지만 가로등도 제대로 없고 외진 곳이라서, 미리 식당 옆에서 내일 아침에 먹을 빵 등을 사기로 했다. 물론 식당도 외진 곳에 있는 터라 정말 오래간만에 동네 슈퍼 같은 곳에서 빵과 과자를 구입했다. 음료는 기념품을 판매하는 곳에서 한라봉으로 만든 뭔가를 샀고.

식당 앞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택시를 부르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숙소 근처로 가서 택시를 타는 방안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번거로운 데다 오늘 하루 내내 너무 많이 걸어서 피곤했다. 거리도 제법 되니 택시가 잡히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앱으로 택시를 요청하자 금방 답변이 왔다.


"맛있게 잘 드셨어요?"

택시에 타자마자 아저씨가 물었다. 맛있게 잘 먹었던 우리는 꽤 기분이 좋았던 터라 이구동성으로 "네!" 하고 대답했다.

"잘 드셨으면 됐고, 이건 그냥 후일담인데 앞으로는 가지 마세요."

택시 문도 닫기 전에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갈치의 원산지와 가격, 관광객 맛집과 현지인 맛집 등 쉴 새 없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일반적인 관광지 택시 아저씨들의 어드바이스라고 생각했는데, 중간부터 어쩐지 비효율적이게 여행을 하고 있다는 잔소리로 이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마지막에는 제주도의 땅값에 대한 이야기까지 엄청난 장르를 넘나드는 스펙터클한 이야기로 뻗어 나갔다. 숙소까지 돌아오는 길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모른다. 그렇게나 피곤했는데도 잠도 한숨 못 잤다. 그리고 맛있게 잘 먹은 갈치는……, 어쩐지 맛없게 잘 먹은 갈치로 변질된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나름대로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라는 뜻에서 해준 이야기겠지만, 어쩔 수 있겠나. 우리는 내일 출발이고 갈치구이를 다른 곳에서 다시 먹지는 못할 텐데.


호텔로 돌아와서 H는 TV를 보고 나는 일찌감치 잠이 들었다. 중간에 눈을 뜨니, H는 이미 방으로 들어가고 내가 자는 침대가 있는 거실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그녀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듯, 나지막한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간간히 방에서 새어나왔다. 커튼을 친 방은 캄캄했고, 그러고 보니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잠을 자는 건 오랜만인 듯하기도 했다. 멍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그녀의 통화 소리가 영어 같다는 생각을 한 것 같은데, 아무튼 내일은 제주도를 떠나는 날이고 그날의 나는 실컷 걸어서 피곤했기에, 그대로 다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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