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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soda Mar 24. 2016

싱가포르 거닐기

2015년 여름 #5 둘째 날  싱가포르 슬링

서늘하게 냉방이 돌아가는 쇼핑몰에서 빠져나오자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한낮의 열기가 몸을 감쌌다. 싱가포르에 도착한 이후로 줄곧 높은 빌딩만 본 것 같은데, 널찍한 차도 건너편에는 불그스름한 지붕을 한 나지막한 하얀 건물이 모퉁이를 따라 쭉 뻗어 있었다. 깨끗하게 맑은 하늘은 아니었다. 그러나 안개처럼 하얀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하늘색과 한여름의 무성하고 생기 있는 나뭇잎의 풀색이 건물과 어우러져서, 더할 나위 없이 한가로운 오후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횡단보도 건너편에 보이는 건물은 래플스 호텔(Raffles Hotel).

우리는 이 호텔의 2층에 있는 롱 바(Long Bar)에 싱가포르 슬링을 마시러 왔다.


함께 신호를 기다리던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막상 길을 건너 호텔의 지붕 아래로 들어가니 전혀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는 이른 오후, 호텔의 하얗고 깨끗한 벽은 햇살을 반사하여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하얀 기둥이 세워진 호텔의 바깥쪽 통로를 따라 계단을 올라가고 있으니, 어쩐지 여름을 피해 짧은 피서라도 온 것처럼 느껴졌다. 서늘하면서도 춥지 않은, 한여름의 그늘이 주는 습한 쾌적함.


싱가포르에 온 것 자체가 이미 여행이었으니, 롱 바로 가는 길은 여행지에서의 작은 여행이라고 해야 할까.

계단을 하나씩 올라갈 때마다 나지막한 소란스러움이 귀를 간질였다. 그 소리는 목적지로 가까이 다가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와도 같았다. 그냥 싱가포르 슬링을 한 잔 하러 가는 것인데, 호들갑스러울 정도로 긴장되고 설렜다. 슬그머니 문 한쪽이 열려 있는 롱 바 앞 복도에 서서 남몰래 마음속으로 한 번 심호흡을 했다.


방금까지 밝고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복도에 있었던 통에, 막상 바 안으로 들어가자 한순간 눈앞이 어두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순간적인 어둠이었을 뿐이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위로 올라가는 나선형 계단과 널찍한 카운터, 그리고 천장에서 줄지어 한들한들 흔들리고 있는 부채가 눈에 들어왔다. 시간이 이곳에서만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딱히 안내를 해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우리가 계단 옆의 비어 있는 자리에 앉으니 직원이 눈빛으로 인사를 했다. 유리가 깔린 테이블 위에는 땅콩이 가득 들어 있는 자루가 놓여 있고, 나무를 엮어 만든 테이블 구석구석과 의자, 그리고 바닥에까지 땅콩 껍질이 잔뜩 떨어져 있었다. 아, 듣던 대로 운치 있는 테이블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 홀로 감탄하던 그때, 소파에 앉으려던 엄마가 갑자기 화들짝 몸을 피했다.


"뭔가 가루 같은 게 너무 많이 떨어져 있는데, 톱밥인가? 다른 자리로 옮길까?"


그러고 보니, 엄마한테 땅콩 껍데기가 떨어져 있는 곳이라는 정보를 말하는 걸 잊었다. 조사를 하면서 그것이 온 사방에 떨어져 있을 거라는 주의사항을 미리 보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 몸을 바르르 떨며 "이게 뭐지?" 하고 의심의 눈길을 보냈을 것 같았다.


"여기 든 게 땅콩인데, 이렇게 테이블이나 바닥에 대고 그냥 까먹어도 돼."


마치 땅콩을 가져다 놓은 사람이 나인 것처럼 자랑스럽게 말했다. 톱밥과도 비슷하게 생긴 정체 모를 가루의 정체를 알게 된 엄마는 그제야 소녀처럼 배시시 웃으면서 "이걸 다 먹어도 되는 거야?" 하셨다.

다 못 먹을 게 뻔할 정도로 땅콩이 가득 담긴 자루를 앞에 두고 우리는 까르르 웃었다.


메뉴판을 볼 것도 없이 싱가포르 슬링을 두 잔 고르고, 술을 거의 못하는 내 몫으로는 프루트 펀치를 골랐다. 그러고 나서도 한참 동안 더 선택할 것도 없는 메뉴판을 들여다보다가 주문을 결정했다.


M의 몫을 딱 두 모금 얻어 마신 싱가포르 슬링의 맛은 너무도 신선하고 달콤하고 맛있었다. 다른 곳에서도 싱가포르 슬링의 맛을 보았지만, 여기서 맛본 두 모금의 맛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리고 자루에서 갓 꺼낸 땅콩.

엄지손톱으로 땅콩 껍데기가 봉곳이 튀어나온 부분을 살짝 누르면 작은 소리를 내면서 껍데기가 툭 벌어진다. 알맹이를 꺼내어 꼼지락꼼지락 속껍질을 까고 입에 넣으니, 고소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나에게 땅콩이란 있으면 먹고 없어도 그리 곤란하지 않은 음식인데, 그 땅콩은 달랐다.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습관적으로 땅콩을 까서 입에 넣고, 목이 말라서 프루트 펀치를 마셨다. 그러고 나면 싱가포르 슬링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텁텁한 달달함에 질려서 다시 땅콩을 입에 넣게 된다.

술을 한 잔도 채 마시지 못한다는 건 이럴 때에 아쉽다. 바를 쓱 한 번 둘러본 결과, 나와 똑같이 프루트 펀치를 마시고 있는 것은 우리 뒷자리에 앉았던 가족 네 명 중 어린아이 둘뿐이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도 크면 다른 사람들처럼 싱가포르 슬링을 마시며 땅콩을 먹게 되리라 생각하니 살짝 부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싱가포르 슬링을 비우는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흘러갔다.

우리는 별 대화도 나누지 않고, 남는 게 시간뿐인 사람인 것처럼 느긋하게 롱 바에 앉아 있었다.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녔던 시간들도 재미있었지만, 어쩐지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롱 바에서의 이 한가롭던 시간이다. 잔이 바닥을 드러내고도 얼마의 시간이 더 흐른 뒤에야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 위의 자루에는  마치 누구도 땅콩을 전혀 먹지 않은 것처럼 여전히 땅콩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리고 래플스 호텔에서 나와 다시 널찍한 차도를 건너 쇼핑몰로 돌아갔을 때, 우리는 다시 일반 여행의 궤도로 돌아온 것처럼 바쁘게 다음 일정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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