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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soda Mar 23. 2016

싱가포르 거닐기

2015년 여름 #4 둘째 날  낮

싱가포르에서 보내는 휴가. 둘째 날 아침이 밝았다.

커튼을 걷고 창문 너머로 밖을 바라보자, 저 멀리 바다 건너에서 머라이언이 물을 뿜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른 아침인데도 벌써부터 주위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괜히 자극을 받은 우리는 모름지기 여행을 왔다면 그래도 조금쯤은 서둘러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에 얼른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조식을 포함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방에서 간단하게 차를 한 잔씩 하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마리나 베이 샌즈에서 숙박을 하기로 결정한 이유 중 90%는 옥상의 인피니티 풀 때문이었기 때문에, 어젯밤과는 달리 밝을 때의 경치도 보고 싶었다.

풀 너머로 빌딩군이 보인다.

나는 물에 들어가지 않고, M과 엄마는 물에 들어갔다. 

아침이라 그런지 물은 어젯밤에 비해 상당히 깨끗해 보였고, 사람 수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덕분에 선 베드도 많이 비어 있었다. 어딘가 한가한 리조트 같은 풍경이라 어젯밤과 비교해도 상당히 좋았다. 어제 체크인을 했을 때부터 호텔에 대해 그리 좋은 인상을 받지는 못했기 때문에, 이날 아침에 풀에 들린 건 상당히 잘한 일이었다. 덕분에 잘 묵었다는 기분으로 체크아웃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참, 풀에서 보는 경치는 밝은 아침에도 여전히 좋았으며, 타월은 변함없이 따뜻하고 포근했다.

풀 반대편에는 물이 따뜻한 자쿠지가 있는데, 그쪽의 난간 너머로는 엄청나게 많은 배가 떠 있는 바다 풍경을 볼 수 있었다. 풀에서 잠시 느긋한 시간을 보낸 뒤, 우리는 체크아웃을 하기 위해 일단 방으로 내려왔다. 


체크아웃을 했다.

시간에 늦지 않도록 서둘러 로비로 내려와 보니, 어제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우리가 묵었던 곳은 타워3 쪽이었는데, 줄이 너무도 길고 카운터에 직원은 별로 없어서 상당히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어차피 낮 동안에는 짐도 맡겨 두어야 했던 데다, 택시를 타든 지하철을 타든 다시 돌아왔을 때 타워1 쪽이 움직이기 편할 것 같아서 미리 그쪽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타워3에 비하면 카운터가 넓었지만 이쪽도 엄청난 인파였다. 얼리 체크인을 하는 줄까지 길고도 길게 늘어서 있어서, 대체 언제쯤 일을 끝낼 수 있을지 짐작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내가 대표로 기다리고 엄마와 M은 짐을 맡기러 갔는데, 그 잠시 동안에 다른 곳에서 홀연히 직원이 하나 나타나더니 체크아웃 줄 쪽으로 다가왔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저를 따라오세요."

딱 내 앞에 서 있던 커플부터 몇몇 사람을 지목하는지라, 엄마와 M에게 말을 걸 겨를도 없이 그를 따라 움직였다. 교사를 따라가는 학생이 된 기분으로 로비를 가로질러 졸래졸래 따라가 보니, 일반 카운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한산한 VIP카운터에 도착했다. 그리고 운 좋게도 금방 체크아웃을 끝낼 수 있었다.

즐거운 기분으로 신나게 되돌아가자, 벌써 짐을 맡긴 엄마와 M이 날 찾고 있었다. 자칫하면 미아 되기 딱 좋은 곳 같았다.


아무튼 짐도 맡겼으니, 아침을 먹으러 toast box로 갔다.

어제 한 번 가봤다고 이번에는 주문할 때에도 그리 망설이지 않았다. 블랙커피 세 잔(6.6)에 butter sugar(thick, 2.2)와 kaya(thick, 2.3)를 시켰는데, 어제 먹었던 얇은 빵도 물론 맛있었지만, 오늘 먹은 두꺼운 빵이 훨씬 폭신하고 좋았다. 커피도 여전히 진하고 괜찮았는데, 어제도 그러더니 직원은 또 커피를 컵에 따라줄 때 주위에 반쯤 쏟아 버리면서 잔 주변에 자국을 남겼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그러는 모습이 또 나름 풍취가 있고 좋으니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다.

아침은 카야 토스트와 블랙커피다. 


Bayfront - (Chinatown) - Clarke Quay

아침을 먹었으니 점심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논리가 이상한 것 같지만, 여행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 아닌가.

어제 걸어 다니느라 고생한 것도 있어서, 오늘은 당장 지하철을 타기로 했다. 엄마는 신고 온 샌들이 아니라 내가 비상용으로 들고 온 삼선 슬리퍼로 갈아 신으셨다. 아무래도 내가 어제 너무 무리하게 걷게 했던 모양이다. 그 때문에 이날부터 엄마의 사진에는 대부분 예쁜 샌들이 아니라 회색의 슬리퍼가 찍혀 있다. 그래, 지금도 우리 집 현관에 놓여 있는 저 회색의 몇 천 원짜리 슬리퍼 말이다.


원래는 강가를 쭉 산책하다가 어디 빌딩 높은 데 있다는 중화 레스토랑을 가려했는데, 일단은 내가 "또" 길을 잃는 바람에 아무리 걸어도 강가가 아니라 골목밖에 안 나왔고, 가까스로 강가를 찾아 빌딩을 찾아 또 레스토랑을 찾아갔더니 단체 손님 때문에 일반 손님은 들어갈 수 없는 상태였다.

골목과 강가, 강가와 골목


결국 그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갔다.

한참을 헤맨 끝에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가기로 했다. 내가 저번에 출장 때 동료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갔던, 그러니까 내가 선선한 저녁 바람을 맞으며 어떠한 종류의 형언할 수 없는 성취감에 젖었던, 바로 그 레스토랑이었다. 몇 년의 세월이 지나서 다시 그 강가에 앉아 점심을 먹으려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내 말수가 줄어든 것에 엄마와 M이 위화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테이블에 앉은 우리에게 이탈리아에서 왔다는 남자 직원이 다가왔다. 머리를 묶은 그의 모습이 어딘가 낯이 익게 느껴졌다.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예전에도 여기서 근무를 했었다 하고, 그렇다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때의 그 남자 직원으로 보인 게 착각이 아닌 것도 같았다. 그리고 계산을 할 때 진지한 얼굴로 미인이시라는 말을 하는 걸 보고 확신을 얻었다.

싱가포르에서 먹는 이탈리안은 맛있다.


링귀네(20.20)와 라자냐(20.20), 마스카포네 피자(21.50) 그리고 음료수로는 생수 두 병(5)과 하이네켄 생맥주 두 잔(17.80), 레드 오렌지 주스(4.5)를 주문했다. 아침으로 토스트를 먹은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더운 날씨에 길을 잃어버리는 통에 상당히 배가 고픈 상태였던 듯하다. 우리는 음식을 거의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점심을 해치웠다.


Raffles Place - City Hall

배도 부르고 다리는 아프니 MRT를 타고 다음 이동 장소로 향하기로 했다. 비록 한 정거장이기는 했지만, 또 길을 잃을 수는 없으니까.



강을 따라 걷고 있을 때, 강가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을 때, 난간 너머로 자주 모습을 드러내던 노란 부리와 노란 발이 인상적이었던 까만 새. 뭐가 그리 신기한지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더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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