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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soda Mar 22. 2016

싱가포르 거닐기

2015년 여름 #3 첫째 날  저녁

호텔 방에서 뒹굴거리고 있으니 어느새 해가 지기 시작했다.

점심과 애프터눈 티 세트를 배부르게 먹은 탓에 저녁은 생략하기로 하고, 노을이 내리는 거리로 쇼를 보러 내려갔다.


쇼는 마리나 베이 샌즈 앞 쇼핑몰을 통과하면 있는 공터 바닷가에서 열린다. 저녁을 먹지 않는다는 선택을 한 덕분에, 우리는 일찌감치 나가서 좋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습하면서도 낮보다는 제법 선선해진 바람이 불어왔고, 빌딩의 불빛은 어스레한 저녁 하늘까지 밝은 남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앞자리를 비워두면 그 앞에도 사람들이 앉는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쇼를 그 시간과 공간의 모든 요소와 함께 느끼고 있노라니 여행지에서의 느긋함과 비일상적인 감각이 가슴을 채웠다. 


쇼는 짧다.

물과 레이저와 비눗방울을 아낌없이 쏟아붓는 쇼가 끝나고 나니,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마리나 베이 샌즈 쪽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마침 바로 이어지는 시간대에 가든 바이 더 베이 쪽에서도 쇼를 하기 때문인데, 사람들이 이동하는 쪽으로 따라 움직이면 쇼에서 사용했던 물이 쇼핑몰 안의 수로로 도로 빨려 들어가는 나름의 장관도 볼 수 있고, 혼자서는 절대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엘리베이터와 육교를 따라 쇼를 볼 수 있는 전망대 쪽으로 이동할 수 있다. 거듭된 길 찾기 실패로 자신감을 상실한 나는 몇 걸음 걷고 길을 물어보고 또 몇 걸음 걷다가 길을 물어보기를 반복한 끝에 무사히 전망대를 찾았다.


가든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우리는 가든 쪽으로  내려가지는 않고 전망대에서 쇼를 감상하기로 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쇼를 볼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우리도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시끄럽지는 않지만 적당히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모두가 눈으로 슈퍼트리를 응시하는 가운데, 멀리서 음악이 들려오고 쇼가 시작되었다.

음악에 맞춰서 트리의 색깔이 계속 바뀐다. 지금 보니 수평을 못 맞춘 사진도.

가든 안으로 들어가서 가까이에서 쇼를 볼 수도 있는 것 같았지만, 이렇게 멀리서 지켜보는 것도 무척 좋았다. 하늘 저 높은 곳에는 달이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무들 사이로 나 있는 길에 종종 사람 그림자가 나타났다. 쇼를 보는 동안에는 트리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올라가나 싶었는데, 나중에 찾아보고 그것 또한 관광할 수 있는 시설의 일부라는 걸 알았다. 입장료를 내면 올라갈 수 있는 길인 모양이다. 나 같으면 계단 위로 다 올라가기도 전에 아마 울어버렸을 텐데. 아아, 저런 높은 곳에 멋모르고 올라갔다가 울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이제는 안 되겠다 싶으면 아예 올라가지도 않지만.


드디어 옥상 수영장에 갔다.

쇼를 다 보고 난 뒤에는  마리나 베이 샌즈에서 숙박을 하기로 결정한 계기가 되었던 옥상으로 올라갔다. 밤중이었는데도 사람들이 많았고, 한쪽에 위치한 테라스 바도 떠들썩하게 영업 중이었다.

옥상에서는 야경이 잘 보인다.


수영장 안에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고, 그 모든 사람들이 사진기를 하나씩 들고 있는 것 같았다. 소문대로 물은 마치 빌딩 밖으로 바로 떨어지는 것처럼 찰랑거리고 있었고, 용기를 내어 끝쪽으로 가까이 다가가고 나서는 그래도 옥상 바깥까지는 꽤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영을 못하는 나는 수영장 가장자리와 M을 딱 붙잡고 서서, 어떻게든 야경 한 번 구경해 볼 거라며 애를 쓰고 버텼다. 한 오 분 정도는, 아마도. 그리고 나만큼이나 겁이 많은 엄마는 가장자리 끝으로는 아예 와보시지도 못했다.


인피티니 풀 자체의 야경도 그렇고 거기서 보이는 싱가포르의 야경도 무척이나 멋있었지만, 라이트업된 물을 내려다보니 물속에 떠다니는 부유물이 너무나도 잘 보였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곳이니 당연히 물은 어느 정도 더럽겠지만, 그게 물밑에 설치된 밝은 조명을 반사하며 둥둥 떠다니는 모습을 보는 건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금세 물 밖으로 나와버린 것은 빨리 가서 씻고 자야겠다는 피곤함 때문이기도 했지만, 분명 물의 더러움을 한껏 두드러지게 하는 조명 탓도 있었으리라.


아무리 덥고 습한 곳이라 해도 물에서 나오니 꽤나 몸이 추웠기에, 막 건조되어 나온 것 같은 보송보송하고 따뜻한 타월은 정말 반가웠다. 내일 아침에 밝을 때 다시 한 번 와보자고 이야기를 한 뒤, 우리는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름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자칫하면 일본의 좁은 비즈니스 호텔 객실 크기는 될 것 같은 큼직한 욕실에는 샤워기가 없었다. 천장 부근에 달린 큼직한 해바라기 모양의 샤워 꼭지를 제외하면, 그 어디에도 손으로 들고 씻을 수 있는 샤워기가 보이지 않았다. 즉 발만 씻고 싶든 머리만 감고 싶든, 일단 무조건 머리부터 발끝까지 샤워를 해야 한다는 운명이라는 것이다. 아침에도 머리만 감는다는 선택지 따위는 없었다. 씻으려면 무조건 샤워다. 어떻게 생각하면 얼마나 사치스러운 일이란 말인가.


아무튼 우리는 기분 좋게 샤워를 하고, 이렇게 지나치게 길고 긴 첫날 일정을 마쳤다. 큼지막한 킹 침대에서 나란히 잠에 빠져들며, 내일은 조금 더 널널하고 여유로운 날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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