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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soda Mar 21. 2016

싱가포르 거닐기

2015년 여름 #2 첫째 날  오후

마리나 베이 샌즈에 도착해서 맡겨놓았던 짐을 찾은 뒤 체크인을 했다. 아침과 비교하면 상당히 한가해졌지만, 육상 경기를 해도 좋을 정도로 넓은 로비에는 그래도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게나 트리플 룸이라고 컨펌 메일까지 보냈는데, 엑스트라 베드가 없었다. 프런트에 있던 서글서글한 인상의 직원은 전혀 미안한 기색도 없이, "엑스트라 베드가 남는 게 없거든. 그런데 내가 높은 층 방을 줄게. 전망이 끝내줄거야. 킹 사이즈 베드가 놓여 있으니 셋은 충분히 잘 수 있을 거고, 경치도 좋으니 이걸로 이해해줄래?"라고 말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확하게 몇 층에서 묵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전망은 정말 좋았고, 킹 사이즈 베드는 세 명이 나란히 누워서 자기에는 좁았다. 그리고 방은 정말 넓었다. 

잘 보면 저기 멀리 사진 한가운데에 머라이언이 있다.


창문으로는 물을 뿜는 머라이언과 그 주위에 모여 있는 사람들까지 보였다. 꽤나 높은 층이었기 때문에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나는 창문 가까이에 가기만 해도 건물이 기울어질 것 같아서 무서웠다. 옥상에 있는 인피니티풀을 잠깐 갈까 하다가, 애프터눈 티 세트를 예약해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좀 쉬다가 다시 호텔 밖으로 나갔다. 그 잠깐 동안 M은 싱가포르까지 쫓아온 업무 메일에 답장을 쓰느라 여념이 없었다.


애프터눈 티 세트

저번에 홍콩에 갔을 때 먹었던 애프터눈 티 세트의 맛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번 여행에서는 반드시 엄마와 애프터눈 티 세트를 먹으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겠다고 결심했었다. 한국에서 여기저기 알아본 끝에 플러튼 호텔 코트야드의 티 세트가 괜찮다는 평이 많은 듯해서 미리 예약을 해두었기에, 이번에도 느긋하지 못하게 황급히 택시를 탔다(5).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번에는 예약 명단에 이름이 없단다. 다행히도 컨펌 메일을 받아두었기에, 종이를 보여주었더니 빈자리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예약하지 않고 가면 먹을 자리가 없을 수도 있다는 인터넷 사람들의 협박을 많이 보았던지라 미리 예약을 해둔 것인데, 막상 가보니 군데군데 빈자리가 있고 조용한 분위기였다.

애프터눈 티 세트


샴페인이나 다른 음료가 딸린 세트도 있었지만 우리는 기본적인 걸 주문했다(151.85). 사실은 아까 점보 레스토랑에서 먹은 점심이 채 소화가 다 되기도 전에 차를 마시러 왔기 때문에, 그리 디저트를 많이 먹을 수 있는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직원들은 지나치게 자주 오거나 지나치게 내버려두지도 않는, 적당한 시간 간격을 두고 테이블을 돌아다니면서 "케이크 좀 더 먹겠어?", "샌드위치는 어때?", "더운물 필요하니?"라며 끊임없이 음식과 차를 권했다.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느긋하게 티 세트를 즐기면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차는 맛있고 케이크는 달았다. 스콘은 사람들이 절찬한 대로 따뜻하고 달달한 잼과 잘 어울렸다. 호텔 로비의 약간 묵직하게 가라앉은 조명과 널찍한 공간에서 소리가 웅웅거리는 느낌도 좋았다.


머라이언을 보러 갔다.

조금 더 앉아있고 싶었지만, 관광을 하러 가야 하겠다는 의무감에 무거운 엉덩이를 억지로 들어 올렸다. 플러튼 호텔에서 머라이언까지는 구글에 따르면 도보 10분이 안 걸린다고 했다. 나는 예전에 걸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앞장서서 머라이언으로 엄마와 M을 안내했다.

이렇게 강가를 따라 쭉 걸어간다.


강가를 따라 걷고 있노라니, 예전에 출장을 왔을 때 걸었던 길이라는 게 새록새록 생각이 났다. 저 멀리 보이는 마리나 베이 샌즈의 모습까지 어쩌면 그렇게나 기억 속에 새겨진 이미지와 똑같던지. 그때는 해가 질 무렵이라 하늘이 남색이었고, 지금은 구름 때문에 회색이라는 게 다를 뿐이었다. 그때 함께 왔었던 동료 중 하나는 싱가포르에 출장을 함께 오기로 결정이 났던 순간부터 "머라이언은 보러 가실 거죠? 세계 3대 실망스러운 관광지 중 하나라는데. 절대로 기대하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라며 몇 번이나 확인을 했다. 우리는 기대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렸고, 그럼에도 눈앞에 나타난 물도 뿜지 않는 머라이언을 보고 실망을 금치 못했다가, 그것이 그저 새끼 머라이언에 불과하고 진짜는 나무 뒤에 가려져 있다는 걸 알게 된 후 환호했다. 물도 엄청 뿜어대고, 무엇보다 귀여웠으니까. 


그 생각이 났던 나는 그때의 그 동료처럼 엄마에게 절대로 기대하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다짐을 받았다. 그리고 그때 나를 실망에 빠뜨렸던 새끼 머라이언이 나타나자, "이거야!" 하고 거짓말을 했다.

"뭐?"

"정말 이거야?"

엄마와 M의 순간적인 반응을 즐긴 뒤, "사실은 저 뒤에 있어!" 하고 마치 내가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선언했다. 엄마와 M이 그 순간의 놀람을 즐겨주었기를 바랄 뿐이다.

다시 봐도 귀엽다.


사진을 찍으려면 기다려야 한다.

사람들이 정말 정말 많다. 머라이언만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면 꽤 오래 서성거리면서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남의 사진 속에 찍히는 걸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내가 찍은 머라이언 사진 중에는 난간에 기대 포즈를 잡는 흰 원피스 차림의 여인과 머라이언을 찍고 있는 남자 관광객이 마치 커플처럼 찍혀 있는 사진도 있다. 그들을 불러다가 사진을 주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로 좋은 사진이었지만, 그럴 깜냥은 없기 때문에 그저 내 사진첩에 고이 남아있을 뿐이다. 누군가의 사진첩에도 나의 좋은 얼굴이 큼지막하게 남아있다면……, 부디 인터넷에 사진을 올릴 때에는 내가 그랬듯이 내 얼굴은 성심성의껏 지워주기를 바라본다. 비록 그 때문에 머라이언의 구도가 이상해질지라도.


10 더하기 20은 30이다.

머라이언을 보고 나서, 이제 본격적으로 나의 멍청한 판단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쇼를 보기 위해서, 그리고 시간이 남으면 인피티니 풀에 들어가기 위해서 일단 호텔로 돌아가기로 했다. 택시를 타거나 MRT를 타면 되었을 텐데, 나는 10 더하기 20은 30이라 주장했다. 무슨 소리냐면, 구글로 지도를 검색한 결과 마리나 베이 샌즈에서 플러튼 호텔까지는 이십 몇 분이 걸리고, 플러튼 호텔에서 머라이언까지는 10분이 안 걸리니까, 합하면 30분 걸린다는 이야기다. A지점에서 B지점으로 갈 때 30분이라면 B지점에서 A지점으로 갈 때도 30분이 걸리는 게 당연한 이치다.


그래서 나는 엄마와 M을 꼬드겨서 호텔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관광을 왔으니 30분 정도 가볍게 산책하는 기분으로 걷는 것도 좋지 않나. 나는 엄마에게 지도를 보여드렸다. 엄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지금 이 지도로 판단하면, 우리가 온 길이 아니라 저쪽으로 돌아가는 게 더 가까울 것 같은데?"

"아니야, 엄마. 내가 구글에서 찍어 봤는데, 그쪽은 길이 아예 없었어. 우리는 왔던 길로 돌아가야 해."

"저쪽에는 정말로 길이 없어?"

M까지 나를 의심하고 나섰다. 그러자 나는 도리어 이유를 알 수 없는 확신에 사로잡혀서, 반대쪽으로 돌아가는 길은 없고 우리는 무조건 왔던 길을 되짚어서 마리나 베이 샌즈까지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를 따르라!

그런 기분으로 길을 나섰지만, 기다란 ㄷ자 길의 한쪽 면도 다 오지 못했을 때에, 나는 빨리도 마치 반지 원정대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주위의 경치를 보는 것도 지쳤고, 목적지는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다. 바다 건너편에서 마리나 베이 샌즈는 엄청난 존재감을 뽐내며 우리를 굽어보고 있었다. 저 멀리 사우론의 탑이 보이는데, 가도 가도 길은 끝이 없다. 

구글의 도보 거리를 측정하는 사람은 아마 과장 좀 보태서 다리 길이가 내 키만큼은 되는 사람일 것이다. 그들의 주장보다 두 배는 시간이 걸리는 듯했다. 원정대는 점점 지쳐갔지만, 이제 와서 MRT나 버스를 타는 것도 싫었다. "탈 거면 아까 탔어야지. 지금 타면 아깝잖아." 하고 조금 더 걷다 보면, "아, 아까 탈 걸 그랬어. 이제 타는 건 진짜 좀 그렇다."라는 대화의 반복. 누구나 이런 기분은 다 알 거라고 생각해 본다.


아무튼 한 시간 걸려 호텔에 돌아왔다.

아마 3박 4일의 싱가포르 여행에서 엄마가 가장 지쳐버린 날일 것이다. 그리고 다들 그렇겠지만, 첫날의 피로는 남은 일정의 피로를 좌우한다. 다 내 잘못이다.

풀은 무슨 풀이냐며, 우리는 침대와 소파에서 뒹굴거리며 피곤을 풀기로 했다. 그 사이에 살짝 낮잠을 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소파에 비스듬히 드러누워서 멍하게 시간을 보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M은 그 사이에 도착한 업무 메일에 대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저녁의 쇼가 시작되기 전까지 호텔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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