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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철우 Aug 05. 2019

광복(光復)의 그늘.

광복과 한반도 분단.

초등학교 입학 전 어린 시절, 신작로(新作路)에서 놀다, 말을 타고 옆구리에는 긴 칼을 찬 일본 군인을 보았다. 


무섭긴 하지만 호기심에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근처 학교로 들어선다. 


잠시 후 태극기를 손에 든 선생님을 잡아끌고 나온다. 그리고 참혹한 광경이 벌어진다. 

1945년 8월 15일, 광복(光復)이 찾아온 날이다. 


해방의 기쁨에 선생님은 태극기를 그리다 일본 군인에게 살해됐다. 


철수하던  일본군이 밀고(密告)를 받고, 이 학교로 달려와서 패전의 분풀이를 한 것이다. 애꿎은 선생님이 희생당했다. 


며칠 더 그 기쁨을 참았더라도 선생님은 화를 입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나는 광복을 맞는다. 


다음 해, 나는 그 학교에 입학했고, 2학년이 되어 인천에 있는 초등학교로 전학한다. 

     

해방은 되었지만 어른들 표정은 밝지가 않다. 


남북이 분단되고 시국이 어수선하여 불안한 나날을 보내니, 삶이 행복할 수가 없다.  


북에서 보내던 전기마저 끊어져 암 흙속에서 살아야 했다. 발전소 대부분은 북쪽에 있었다. 북에서 38선을 지나던 송전선을 모두 끊어버린 것이다.


38선. 지금은 휴전선으로 바뀌었지만.  

    

비무장지대 같은 완충지역도, 철조망도 없었다. 38선은 표지판으로 그어진 금(線)에 불과했다.  북위 38도는 당시 분단 한반도 남북 경계선이었다.    

다시 찾은 빛(光復)은 38선 그늘에 가려졌다.  


해방의 기쁨을 누려보지도 못한 채 분단의 아픔이 찾아온다.


나는 5학년이 되었다. 6월 말 새벽, 굉음(轟音)에 잠을 깬 식구들, 큰길이 보이는 창가로 모여든다.      


시커먼 탱크들이 줄지어 달린다. 북한 인민군이 인천에 들어온 것이다. 


잠시 후 골목에서 뛰어나오는 국군들이 보인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못 보게 창문을 닫아 버렸다. 요란한 총성이 들린다. 국군들의 생사가 궁금하다.      

한국전쟁(6.25)이 시작됐다.


한반도 분단을 미국의 작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북위 38도선을 미국이 제안했고 소련이 받아들인 건 사실이다.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 미국이 굳이 한반도를 소련과 나누려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과 전쟁에 뒤늦게 뛰어든 소련,  미국이 들어오기 전에 발 빠르게 만주와 한반도를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주의 일본 관동군(關東軍)을 소련군이 상대해준 것은 고마운 일이나, 한반도까지 밀고 내려오는 것은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한반도의 공산화는 일본도 위험해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미군이 한국까지 오는 동안 소련은 한반도를 통째로 삼킬 기세였다. 한국으로 보낼 미군 병력은 한국에서 1000킬로 떨어진 오키나와에 있었다.      


더 내려오기 전에 이를 막아야 했다.      


미국은, 소련에게 서울이 있는 북위 38도 남쪽은 미국 점령지니 들어오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소련은 의외로 이를 쉽게 받아들이고 개성까지 진입한 소련군을 38선 이북으로 철수시킨다. 개성은 38선 남쪽에 있었다.      


미국이 38선으로 소련군을 막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탄생할 수 없었다.
지금쯤, 대한민국 국민들은 김 씨 왕조, 조선 인민공화국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유럽전선은 당초 영국, 소련 그리고 프랑스 연합군이 독일군을 상대로 전쟁을 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독일에 패하고 그동안 전쟁물자만 대던 미국이 연합군에 합세를 한다.     


반면 태평양 전선은 장개석 군대가 중국에서 항전하고 있었지만 고전(苦戰) 중이다. 


일본은 자금성에서 쫓겨난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앞세워 만주국을 만들고 관동군(關東軍)을 주둔시켜 식민지로 삼는다. 


진주만 습격을 받은 미국이 본격적으로 태평양 전선에 뛰어든다.


그러나 소련은 이 전쟁에 나서지 않았다.  소련은 일본과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고 있었기 때문 이기도 하다. 


결국 태평양 전선은 미국 홀로 싸운 외로운 전쟁이었다.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했다. 그러나 일본은 아직도 항복할 생각이 없다. 


연합국이 포스담에 모여 포스담선언이라는 것을 한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것이다. 항복을 거부하면 연합군이 총공격을 하기로 했다. 


연합국들은 공격의 시기를 9월경으로 생각하던 중, 미국이 8월 6일 히로시마에 핵폭탄을 투하한다. 


이 소식을 접한 스탈린은 일본 항복이 임박했다고 느낀다. 태평양 전선에서 전리품  하나 못 건진 스탈린이 급해졌다. 


스탈린의 8월 폭풍 작전


소련은 폭풍 작전이란 이름으로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8월 9일 만주의 일본군을 동시다발로 공격한다. 한반도에 진입한 것은 8월 11일. 

1945년 8월 15일. 미국은 일본 천황의 항복을 받아내고 본토를 점령한다. 소련군은 8월 19일 힘 빠진 관동군의 항복을 받아 내고 만주, 한반도, 그리고 쿠릴열도와 사할린을 점령한다. 


이렇게 2차 대전은 마침표를 찍는다. 


이때 소련군은 이미 한반도 개성까지 들어온 상태다.      


만일 미국이 38선이 아니라 한반도 전부를 반납하라고 했다면?     


소련이 38선을 조건 없이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38선 남쪽을 양보했으니 일본의 북해도를 달라고 했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미국의 거부로 이 사후 협상은 무산되었다.       


스탈린은 언제나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이기는 협상을 하는데 능한 사람이다.      


사실 소련이 탐낸 건 한반도보다 일본 영토로 보인다.      


소련은 만주와 한반도를 빠르게 점령하고 일본본토를 공격할 생각이었으나 만주에서 관동군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늦어지는 사이 미국이 먼저 일본본토를 차지했다.      


한반도에서 소련군 철수를 요구했다면 일본 땅 상당 부분을 달라고 했을 것으로 보인다.       


만일 이것이 성사 되었다면, 일본이 분단국이 되고, 한반도는 통일 대한미국이 됐겠지만, 미국은 한반도의 가치를 그 정도로 높게 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두 명의 미국 대통령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미국에는 두 명의 대통령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운명을 쥐고 있던 인물들이다. 


한 사람은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또 한 사람은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이다. 

전쟁 중 루스벨트가 죽자 부통령이던 트루먼이 이어받았다.  이들은 영국과 소련 그리고 중화민국과 협력하여 2차 대전을 이끈 인물들이다.   


같은 미국 대통령이지만 두 사람은 달랐다.  


그들은 어떤 지도 자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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