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미국에는 두 명의 대통령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운명을 쥐고 있던 사람들이다.
한 사람은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였고, 또 한 사람은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이다. 전쟁 중 루스벨트가 죽자 부통령이던 트루먼이 이어받았다.
이들은 영국과 소련 그리고 중화민국과 협력하여 2차 대전을 이끈 인물들이다.
대공황과 뉴딜,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루스벨트는 대공황으로 경제위기에 처한 1932년, 대통령에 당선된다.
중병에 걸린 미국 경제, 그의 처방은 뉴딜(New Deal)이었다. 정부가 나서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구조와 관행을 개혁해 침체된 경제를 소생시켜 보겠다는 것이다.
자율경제가 아닌 정부의 개입이다. 그동안 미국이 신봉해온 자율경제는 개혁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미국 의회는 그 처방을 의심했다.
"결과가 안 좋으면 처방을 바꿀 테니 걱정 말아요!" 다행히 첫 임기중 악화일로의 미국 경제가 안정되며 1936년 재선에 성공한다.
그러나 좋아지는 듯하던 경제가 다시 나빠진다.
루스벨트가 좀 더 강력한 2단계 뉴딜을 만지작 거리고 있을 때, 그에게 행운이 찾아온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진 것이다.
전쟁 특수로 경제가 제대로 살아난다.
2차 대전 초기, 미군 파병 대신, 미국은 연합군 진영에 군수물자를 제공했다.
덕분에 1940년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 뉴딜의 성과를 대대적으로 선전한다. 경제개혁으로 삶의 질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 경제를 확실하게 구한 것은 사실 전쟁 특수로 보인다.
결국 그는 3선에 성공한다.
그리고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시작된다.
2차 대전은 유럽전선에다 태평양 전선이 가세하며, 전 세계를 전쟁터로 만들었다.
전쟁이 한창인 1944년 다시 4선에도 성공 하지만 다음 해 1945년 4월 12일, 2차 대전 종전을 앞두고 뇌출혈로 사망한다. 그가 죽고 한 달이 안 되어 독일이 항복한다.
얄타회담은 루스벨트가 죽기 두 달 전 소련 흑해 연안에 있는 크림 반도의 얄타에서 열렸다. 루스벨트(가운데)는 건강이 안 좋아 보인다. 4선에 12년, 그가 죽지 않고 임기를 마쳤다면 16년을 집권할 수 있었다. 미국 최초이자 마지막 장기집권 대통령이다.
그의 장기집권은 공황과 전쟁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당시 미국에는 이를 막는 법(法)이 없었다.
루스벨트와 스탈린의 미묘한 관계
미국 정치권은 소련과 공산주의를 경계하는 분위기였지만 루스벨트는 스탈린과 미묘한 관계를 유지했다.
공산주의를 용인하는 듯하고, 스탈린을 신뢰하는 미국 대통령이다.
그는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존경받는 지도자 상위권에 오르는 인물이지만, 역사가들은 그의 애매한 소련과의 관계를 비판한다.
루스벨트는 소련과 외교에서 국무성을 배제하고 자신의 친구(모겐소)를 보낸다. 국무성 관료들이 반공주의자들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정상회담에서 처칠과 스탈린이 충돌을 할 때면 루스벨트는 항상 스탈린 편을 들었다.
소련군의 동부전선(스탈린그라드)의 전세(戰勢)가 수세에서 공세로 바뀔 때. 유럽 서부 해안에 전선을 열라고 스탈린은 영국을 압박을 한다. 자신의 싸움터인 동부에서 독일의 시선을 서부로 돌리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영국의 처칠은 대부분 병력이 지중해 연안에 있다며 그 제안을 거절한다. 처칠은 서부전선을 열라는 스탈린의 속셈을 알아 차린 것이다.
그런 스탈린의 속셈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스벨트는 스탈린의 뜻에 따라 프랑스 서해안에서 서부전선을 열기로 하고, 사령관에 아이젠하워를 임명한다. 이것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다.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이 만 명 이상 사상자를 내는 힘들고 치열한 전투를 하는 동안, 소련군은 동유럽 여러 나라에 무혈입성(無血入城), 이들을 손쉽게 손에 넣는다.
독일 패망 후 소련은 유럽의 절반이 넘는 동유럽을 점령, 유럽 공산권을 형성한다. 위성국들로 소련의 영토(세력권)를 넓힌 것이다.
반공주의자들이 가장 우려했던 결과다.
루스벨트는 이미 죽은 다음이지만, 그가 살아 있었다면 이런 비난에 “그게 어때서? 전쟁으로 소련이 얻은 땅인데”라고 반문했을지도 모른다.
루스벨트의 그런 태도가 훗날 냉전시대를 불러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루스벨트는 1943년부터 유엔(United Nations) 창설을 추진한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도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이 있었지만, 2차 대전을 막지 못하고 해산됐다. 이런 경험으로 연합국들은 대부분 유엔에 소극적이었다. 루스벨트와 스탈린이 적극 나서며 1945년 10월 24일 유엔이 발족한다. 그러나 르스벨트는 유엔(UN) 탄생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오랜 수습기간이 필요한 한국.
이승만(전 대통령)이 루스벨트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들어주지 않았다.
이승만의 말대로 임시정부를 인정해주고 한국인에게 군사훈련을 해 주었으면 전쟁에 도움이 되었을 텐데, 루스벨트는, 임시정부도, 한국사람도 믿지 않았다.
미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국가로 승인 해주고, 2차 세계대전 참전국이 되었더라면 남북분단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이를 거부했다.
그는 일제강점기의 한국인을 노예상태(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라고도 했다.
한국인을 동정은 했지만 무능하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노예로부터 해방은 해 주겠지만 독립은 수습기간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을 것이다. 독립할 능력이 안 된다는 뜻이다.
무능하여 나라를 빼앗긴 건 사실이니 자존심 상하지만 할 말은 없다.
1943년 루스벨트, 처칠, 장개석 3국 정상은 카이로에서 만나 일본 점령지 처리방안을 의논한다.
다음은 카이로 선언문 일부다.
일본이 탈취한 만주와 대만은 중화민국에 반환한다.
삼국 정상은 한국인의 노예상태에 유의, 한국을 해방하여 적절한 시기에 독립시킨다.
(원문: The afore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루스벨트가 직접 기안한 것이라고 하는데, 한국을 바로 독립시킨다는 것이 아니다. 시기를 봐서 독립을 해 준다는 뜻이다.
이어진 테헤란 회담에서 그 “적절한 시기”가 무엇 이였는지 드러난다.
스탈린은 신변안전을 이유로 카이로 회담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카이로 회담이 끝나자 바로 루스벨트와 처칠은 테헤란으로 장소를 옮겨 스탈린을 만난다.
루스벨트는 한국인에게 완전한 독립을 주기 전에 약 40여 년간의 수습 기간(apprenticeship)이 필요하다고 했고, 이에 스탈린은 구두로 동의를 했다고 한다.
인도를 식민지로 두고 있는 영국이 한국의 독립을 반대했을 수도 있지만, 루스벨트 역시 한국의 즉시 독립은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오랜 세월 노예로 살아서 수습을 받지 않으면 자립할 수 없다는 것인데, 무려 40년이라니 그 역시 식민지배와 뭐가 다른가.
망명정부이긴 하지만 임시정부도 있었고 독립 운동가들이 활동하면서 독립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국제사회는 그걸 인정하지 않았다.
힘없는 나라와 그 백성들이 국제사회에서 무시당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 가지다.
한국은 경제발전으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며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달리 방법이 없자 핵무기로 능력을 인정받으려 한다.
핵폭탄으로 세계를 제압한 트루먼
루스벨트가 죽고 부통령 트루먼이 대통령을 이어받는다.
같은 민주당 출신이지만 루스벨트와는 달랐다. 반공 주의자였으며 스탈린을 신뢰하지 않았다. 한국에 대한 인식도 루스벨트와는 다르다.
트루먼이기 때문에 그나마 한반도 반쪽은 공산화를 막았지만, 루스벨트라면 한반도 공산화도 묵인했을지 모른다.
그가 스탈린을 처음 만난 것은 1945년 7월 17일 포스담 회담에서다. 포스담 회담은 독일 패전 후처리 문제를 의논하기 위하여 모였다.
회담은 8월 7일까지 이어지는데, 그사이 영국의 처칠도 선거에 패해, 회담 도중 철수한다. 그리고 새 총리 애틀리(Clement Attlee)가 합류한다.
스탈린 앞에 나타난 새로운 정상들은 모두 그에게 낯선 인물들이다. 그런데 트루먼은 물론 영국의 애틀리마저 스탈린을 좋아하지 않았다.
포스담 회담 사진 : 오른쪽부터 스탈린, 트루먼, 영국 총리 애틀리. 스탈린은 독일이 항복하자 바로 포스담 회담을 소집했으나 트루먼은 시간을 끌다가 7월 17일에야 회담에 참석한다.
핵실험이 끝나는 7월 16일까지 미룬 것이다.
그에겐 전쟁이 종료된 유럽보다 일본 문제가 더 시급했다.
유럽 전쟁에서 스탈린의 행태를 본 트루먼은 일본과의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있을 스탈린의 각종 속임수를 경계했다. 결국 일본 열도를 넘보는 것은 막았지만 한반도 진입은 막지 못했다.
회담 후 7월 26일 중국 장개석을 포함한 4개국이 서명하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촉구하는 포스 담 선언문을 발표한다. 아울러 트루먼은 일본이 거부하면 연합국이 모두 참전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핵폭탄 투하 계획은 연합국 참가자들에게 극비로 하여,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했다.
일본이 이를 거부할 것을 예상한 트루먼은 모두가 놀랄만한 중대한 결심을 한다.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한다.
일본은 공황상태(恐惶狀態)에 빠졌다.
항복하면 일본 천황은 보호해 주겠다는 미국의 암시에, 8월 15일 히로히토 일본 천황은 항복 선언을 전국에 방송한다. 항복 선언에 반대하는 봉기가 있었지만 곧 숙으러 들었다.
4만여 명의 미군으로 히로시마를, 2만 7천 명의 병력은 나가사키를 통해 일본 본토를 점령했다.
핵폭탄에 놀란 것은 일본뿐 아니다. 다른 연합국들도 마찬가지다.
트루먼은 핵폭탄으로 다른 연합국들에게도 미국의 힘을 보여 준 것이다.
연합군(영국, 미국, 중화민국, 소련)은 9월경 일본에 총공세를 하고, 일본 본토와 그 점령지들을 분할 점령할 계획이었지만 트루먼은 생각이 달랐다.
태평양 전선은 미국이 일본과 싸워 많은 희생자를 낸 전쟁이다. 연합국이라고 대가 없이 넘보는 것을 트루먼은 허용하지 않았다. 특히 소련은 이 전쟁에 불난집 불구경하듯 했다.
태평양 전선은 미국이 일본과 싸워 많은 희생자를 낸 전쟁이다. 다른 연합국들은 예상치 못한 핵폭탄으로 분할점령은 무산된다.
그러나 소련은 포기하지 않았다.
전리품을 획득하려면 행동에 나서야 했다. 핵폭탄 소식을 들은 스탈린은 즉각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와 한반도 그리고 사할린을 점령한다.
사할린은 루스벨트 생전에 소련에 반환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러나 만주는 소련이 아닌 중화민국에 반환될 땅이다.
이에 장개석이 카이로 선언을 이유로 반환을 요구하자, 일본이 남기고 간 산업시설들을 모두 해체하여 소련으로 옮긴 다음, 마지못해 만주를 중국에 돌려주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돌려받은 만주를 지키지 못했다. 모택동과 싸움(국공전)에 패하여 대만을 제외한 모든 중국 땅은 모택동의 공산국가 중화인민공화국이 되었다.
한반도는 돌려받을 주체가 없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참전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요인들이 해방의 기쁨을 안고 귀국은 했지만 이 땅의 주인이 아니다. 카이로 선언 때문이다. 적절한 시기를 기다려야 했다.
트루만은 3년의 군정기간 중, 남북 총선거로 통일정부를 만들어 주려 했지만 소련의 반대로 무산된다. 결국 남쪽만의 단독정부(대한민국)를 만들고 철수한다.
독립은 했지만 반쪽자리 독립이다.
트루만은 한국전쟁(6.25)에도 참전, 사라질뻔한 대한민국을 되찾아주고 지금까지 동맹국으로 한국을 지켜주고 있다.
루스벨트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한반도의 운명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속단할 수는 없으나, 대한민국이 탄생하기는 쉽지가 않았을 것 같다.
38선. 지금은 휴전선으로 바뀌었지만.
비무장지대 같은 완충지역도, 철조망도 없었다. 38선은 표지판으로 그어진 금에 불과했다. 북위 38도는 당시 분단 한반도 남북 경계선이었다.
다시 찾은 빛(光復)은 38선 그늘에 가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