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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철우 Apr 02. 2020

흑사병이
중세 유럽에 남겨준 선물.

중세 유럽에서 창궐했던 흑사병은 1331년에 중앙아시아에서 처음 발병한다

흑사병은 중세 유럽의 붕괴를 가져온 동시에, 인본주의와 르네상스, 자본주의를 낳는 산파 역할을 했다. 

    

원래 병명은 페스트다. 흑사병이란 별명을 갖게 된 것은 환자의 몸에 나타나는 증상 때문이다. 말 그대로 몸이 까맣게 되면서 죽는다 해서 이름이 흑사병이라 붙여졌다. 처음에는 열이 나다가 림프종이 붓는 증세가 나타나고, 조금 지나면 피부의 조직이 괴사, 까맣게 썩으며 사망에 이른다.     

 

중세 유럽에서 창궐했던 흑사병은 1331년에 중앙아시아에서 처음 발병한다.     


원래는 중국 서남부 운남 지방의 풍토병이었다. 그 지역의 쥐에게서 많이 발생하는 병인데, 몽골군은 흑사병으로 죽은 군인들을 투석기에 담아 성벽을 공격할 때 사용하면서 중앙아시아에 전파되었다고 한다.       


흑사병은 뱃길을 통해서도 유럽으로 퍼졌다. 


1347년, 흑해에서 출발한 상선들의 첫 기항지는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섬이다.     


갑판 아래 선실은 시신으로 가득했다. 그나마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간신히 숨을 쉬고 있을 뿐이었다. 위험을 느낀 주민들이 섬에서 떠나 달라고 요구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들은 쥐벼룩이 흑사병을 옮긴다는 사실을 몰랐다. 배 안의 쥐들은 부두에 묶인 밧줄을 타고 육지로 올라와, 곳곳에 병을 퍼뜨리고 다녔다.     

흑사병은 지중해 연안에서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이르기까지 빠른 속도로 확산됐다.      

마치 지금의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파를 보는 듯하다.      


쥐가 들끓는 더러운 도시 환경, 목욕을 자주 하지 않는 당시 유럽인들의 생활 습관은 흑사병이 퍼지는데 최적의 환경이었다.      


1347년 이탈리아 피사에서 하루 5백 명, 오스트리아 빈에서 하루 6백 명, 프랑스 파리에서 하루 8백 명씩이 죽어나갔고. 시신을 매장할 토지와 일손이 부족해, 미처 매장되지 못한 시신들이 강과 거리에 넘쳐났다.     


유럽 인구의 절반을 죽게 만든 흑사병. 르네상스 이전까지 중세 유럽은 1,000여 년간 신(神)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 가톨릭 사제들이 의사보다도 더 신임을 받던 시절이다.      


흑사병이 유행하자 사람들은 사제의 조언대로 신에게 빌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심지어 일반인의 사망률이 약 30%였지만 사제의 사망률은 42∼45%에 이르렀다. 교회가 치료는커녕 사제가 먼저 죽어가는 현실을 보며 일반 대중들은 교회와 신에 대한 믿음을 거두기 시작했다.     


신권이 하락하는 것과 달리 왕권은 강화됐다. 흑사병 대유행을 끝낸 것은 간절한 기도가 아닌 국가가 만들기 시작한 위생과 검역 절차였다. 15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 각국은 방역 시스템과 여행증명서를 발급했다. 현재까지도 전 세계 모든 공항과 항만에서 이뤄지는 검역은 흑사병 유행이 시초가 된 셈이다.     


이처럼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흑사병의 공포는 1351년에 이르러 마침내 수그러드는데,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절반이 줄어든 것이다. 당연히 이에 따라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난다.     


인구감소는 노동력 부족으로 이어져 임금이 상승하고 많은 사람들이 흑사병으로 숨진 친척들의 재산을 물려받으면서 재력을 가진 중산층이 늘어난다.      


결국 늘어난 임금을 견디지 못한 영주들은 몰락하고, 한편 신도들은 교회를 외면하게 되었다. 봉건사회가 무너지고 유럽식 자본주의로, 그리고 문화혁명과 종교혁명으로 연결되는 단초가 된다.      


전염병이 유럽을 살렸다. 중세 유럽의 암흑기를 거두고 새로운 발전의 길을 열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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