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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녜스 Oct 13. 2020

패러다임

: 다중 세계는 가능한가


<과학기술학의 이해> 수업 제출용 에세이임을 밝힙니다.




누군가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사실을 믿는 이유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본다면, 당신은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혹자는 지동설이 세계를 가장 잘 설명함을 과학자들이 증명해냈기 때문이라고 답할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과학자들이 천동설 대신 지동설을 세계에 대한 사실로 만들어내는 과정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과학철학자 토머스 쿤은 과학자 사회가 특정한 지식의 확실성에 합의하는데 ‘패러다임’이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패러다임은 세계를 보는 틀거리이자 “지식의 확실성을 담보하는”1 이론, 실험 방식, 표준, 기구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쿤에 따르면 과학은 누적적 진보를 하지 않고 다만 정상과학과 과학혁명기가 반복될 뿐이다. 세계를 가장 잘 설명하는 패러다임이 한 번 정립되면, 과학자들은 자연과 현상을 그 패러다임 속으로 “꾸겨 넣”2 는다. 일반상대성 이론이 포섭하지 못하는 현상을 설명하고자 ‘암흑 물질’ 등의 개념이 등장하는 데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더 많은 현상을 포섭하는 과정에서 특정 분야의 과학은 점점 더 정교해지고 복잡화되며 진입장벽을 높인다. 이에 과학자 간에도 서로의 분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꾸겨 넣어지지 않는 변칙 사례들이 누적되면,  기존 패러다임보다 변칙 사례를 더 잘 설명하는 패러다임 후보가 등장하여 기존 패러다임과 경쟁한다. 어느 순간 새로운 패러다임이 기존 패러다임을 대체하고 세계를 자신의 방식대로 재해석하는데, 이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기존 패러다임보다 모든 부분에서 ‘더 낫기’ 때문은 아니다. 천동설과 지동설, 뉴턴의 고전역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각각 서로 ‘완전히 다른 것’에 대해 말한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을 단일한 기준으로 비교 및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천동설은 '태양이 행성이던 세계'를 나름대로 잘 설명하는 이론이었다.


현재의 패러다임이 정교화되는 양상을 보면, 패러다임이 담보하는 객관성은 인간의 의도나 활동과 완전히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언제든지 또 다른 혁명이 도래할 수 있다는 쿤의 이론은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해석—혹은 해석이라 믿었던 것—이 달라질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때 교과서적 과학(core science)과는 달리 테크노사이언스 및 인문사회과학에서는, 혹은 순수과학 분야여도 ‘분야 간’에는, 정상과학 시기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여러 패러다임이 경쟁하는 가운데 어느 하나가 승리하지 못하는 탓에 패러다임의 완전한 전환 또한 어려워 보인다.


꼭 과학자 사회 내부가 아니어도 세계를 해석하는 다수의 틀이 존재하는 상황을 각종 ‘네트워크의 경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떤 목표를 가지고 세계를 해석할지, 어떤 지식이 확실한 지식인지는 자신이 어떤 네트워크 속에서 누구와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달려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교과서적 과학에 편입되지 못한 분야나 인문사회과학 분과에서는 네트워크 간의 대립이 훨씬 빈번하게, 그리고 다층적으로 발생한다. 예컨대 각종 질병의 진단 기준과 치료 방식에 관한 논쟁이 있다. 갑상선암의 경우, 20세기 후반 도입된 초음파 기술을 통해 초기 단계인 아주 작은 크기의 종양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임상 현장의 의사들은 초기 단계의 갑상선암에 대해서도 수술 치료를 권고해왔다. 반면, 역학 데이터를 분석하는 전문가들은 초기 단계 진단과 갑상선암으로 인한 사망률 간에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나타나지 않는다며 의사들의 과잉진료를 문제 삼았다. 역학 전문가들은 다량의 데이터 및 통계 프로그램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반면, 의사들은 환자 및 병원 시스템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세계를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그에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교육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표방하는 교육심리학 분과에서도 이러한 네트워크 간의 충돌이 빈번하다. 특히 학습이론 중에는 행동주의 및 인지주의라는 고전적 이론과 구성주의 간에 학습자의 학습 과정을 해석하고 그에 따른 교수법을 개발하는 방식에 큰 차이가 있다. 때로는 각각의 이론이 제시하는 교수법 간에 한 수업 내에서 절충이 어려운 경우도 존재한다. 교육철학 분과에서도 학생 개인의 성향과 행복감을 우선시할지 아니면 교과지식의 습득을 우선시할지, 혹은 학생에 대한 교사의 훈육은 어느 정도 수준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등을 두고 첨예한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서로 대립하는 네트워크들은 양쪽에서 단일한 세계를 보는 것일까? 심오한 존재론적 논쟁으로 넘어가지 않더라도, 확실한 지식은 세계를 그려내고 각각의 네트워크는 다른 지식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각 네트워크 속 사람들은 서로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고 판단할 여지가 충분하다. 이 가운데, 충돌하는 두 개의 세계를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가능한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격렬해져 가는 네트워크의 대립을 중재할 이는 두 세계를 구성원만큼 잘 알면서 동시에 철저히 외부자여야 하는 것인지, 어떻게 하면 각각의 네트워크를 속속들이 잘 알면서도 한쪽에 설득되지는 않을 수 있는지에 의문이 남는다. 경계인이 그 역할을 하는 것일까?


또한, 한 네트워크가 다른 네트워크를 완전히 굴복시키지 못한 채 절충적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러한 절충은 필연적인지, 절충적 해결안이 얼마나 실효성을 갖는지 논의하고 싶어 졌다. 제3의 지점에서 수렴된 해결책은 각각의 네트워크가 바라보는 세계가 아닌 제3의 세계를 위한 것이 아닌가? 그 해결책은 어떤 세계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가? 예컨대, 갑상선암 진단 시기 및 기준을 임상 의사와 역학 전문가들의 입장을 절반 정도씩 절충한 지점으로 변경하게 되었을 때, 그 변화는 의사와 역학 전문가가 바라보는 각각의 세계의 차이를 좁히는 데 어느 정도의 실질적인 효과를 갖는가. 의사는 여전히 자신이 관계 맺고 있는 환자에 대한 책무성으로 인해 초기 진단의 중요성을 입증하고자 노력할 것이고, 통계의 정당성에 기대는 역학 전문가는 더욱 정교화된 통계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양질의 데이터를 수집하여 초기 진단 및 수술이 갖는 문제점을 밝혀내고자 애쓰지 않을까?


각각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네트워크에 포섭되어 각기 다른 세계를 바라보고 살고 있음을 인지하는 태도는 분명 특정 의견을 강요하는 폭력적 사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중요한 열쇠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성에 안주하고 무한한 상대주의에 천착하는 데서 그치는 것 또한 문제가 된다.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과 변화하는 가치관 및 윤리 속에서 그 누구도 좋은 사회를 향한 획일적인 정답을 제시해주기는 어려워진 만큼 나와 타인의 네트워크를 모두 존중할 수 있는 감수성과 동시에, 첨예한 논쟁에 지쳐 무의미한 절충안을 내놓는데 그치지 않을 수 있는 인내가 요구된다.




1. 홍성욱, "포스트휴먼 오디세이", 휴머니스트, 2019, p.178.
2. 홍성욱, "홍성욱의 STS, 과학을 경청하다", 동아시아, 2016, p.178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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