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학과 학부생의 영화 읽기
들어가며
우리는 어떤 이유로 누군가를 신뢰하고 일을 맡기게 될까? 권위의 원천으로는 여러 요인이 제시되어 왔으나, 그 중 ‘전문성’은 늘 권위 형성에 있어 빠지지 않는 주제였다. 이때,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개인의 전문성을 판단하는가? 기존에는 일정 시간 동안 형식교육과 제도화된 훈련을 이수한 증거인 학위, 혹은 시험을 통과해 얻는 자격 등으로 한 사람의 전문성을 인증해왔다. ‘자신이 많이 배웠다는 사실’을 제도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 곧 전문가였다. 그러나 네트워크 사회로의 진입과 시시각각 변화하는 기술 트렌드로 세상은 점점 더 불확실 해져만 간다. 기존의 지식과 주류 집단이 만든 제도상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문제들이 속속들이 등장하는 상황에서 학위가 말해주는 점은 무엇인가? 학위는 어떤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는가? 심지어 배타적으로 전문성을 인정받은 이들의 도덕성, 진실성이 온라인 공론장을 통해 실시간으로 검증되면서, 기존의 중앙집권적인 전문성 인증 방식을 향한 신뢰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통해 타인의 전문성을 평가해야 할까? 초점을 잠시 배움으로 넘겨보자. 대학이라는 형식교육기관에서의 배움, 그리고 배움에 대한 인증 장치인 학위는 무엇을 의미하고, 또 의미해야 하는지 진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 사회는 어떤 배움을 추구해야 하며, 누군가의 배움에서 눈여겨봐야 하는 점은 무엇일까. 배움에 있어서 진정성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부단히 배우는 일은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하는가. 학문의 상아탑이라 불리는 대학의 의미와 역할은 무엇이며 왜 누군가는 당장 눈 앞에 닥친 일이 아닌 미래를 위한 끝없는 고민에 천착해야 하는가. 쏟아지는 질문들에 대한 실마리를, 과거로 돌아가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영국 서튼 후의 한 사유지에서 진행된 발굴 작업을 다룬 영화 <더 디그>를 통해 탐색하고자 한다.
필자는 지도교수님께 곧잘 질문을 드리는 편이다. 올 3월 말, 지도교수님께 잘 지내냐는 안부메일을 받았다. 여느 4년 차 대학생이 그렇듯 앞으로 무엇을 배우며 살아야 하는지 고민에 빠져 있었고, 그런 가운데 학문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지 교수님의 의견이 궁금했다.
“학문을 하는 사람은 진중하고 고독할 수 있어야 할까요?”
답신에는 영화 제목 하나가 적혀 있었다.
영화 <더 디그>는 2007년 5월 출간된 존 프레스턴의 동명 소설, ‘The Dig’를 원작으로 한다. 주인공인 배질 브라운(랄프 파인즈)의 발굴 작업 끝에 의뢰인 이디스 프리티(캐리 멀리건)의 사유지에 있던 둔덕에서는 앵글로 색슨의 것으로 추정되는 배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선박 외에도 각종 귀금속 등이 발견됨에 따라, 영국 고고학계는 ‘암흑시대(Dark Age)’라고 불리며 그 흔적을 찾기 어려웠던 5-6세기 영국인의 삶에 한 발짝 가까워질 수 있었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제목과 간략한 소개를 통해 느꼈겠지만, 이 영화는 치열한 갈등의 전개 속에 주인공이 화려하게 적을 제압하는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카타르시스를 준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더 디그>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한, 어찌 보면 초라했던 인물에게 가장 환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췄다. 제도 교육 밖에서 꿋꿋하게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주인공 배질 브라운이 영국인의 역사를 밝힌 위대한 유산을 발굴하는 과정을 찬찬히 따라가면서, 우리가 제도와 전문성, 배움을 이해해 온 방식을 돌아볼 것을 권한다.
전문성의 제도적 인증
<더 디그>의 주인공 배질 브라운은 12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변변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발굴 현장을 찾아다니며 현장에서 필요한 기술을 익힌다. 그뿐만 아니라 혼자서 온갖 책을 섭렵하며 이 세상이 만들어져 온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밤낮으로 애쓴다. 배질의 아내만은 그의 배움에 대한 열정을 존중하는 지원군이 되어주지만, 실제 배질은 지역 박물관의 작업을 도우며 턱없이 적은 일당을 받고 있을 뿐이다.
진실한 열정은 자연스레 드러나는 법. 배움에 대한 의지로 자신만의 학습을 이어왔던 배질은 이디스를 만난다. 넓고 적막한 사유지에서 홀로 아들을 키우는 이디스는 남편이 살아있을 당시 광활한 들판의 둔덕들을 파헤쳐 보고자 땅을 사들였다. 남편을 잃은 뒤 자신마저 병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이디스는 서튼 후 지역의 입스위치 박물관에 발굴 작업을 의뢰한다. 그러나 박물관 측에서는 전쟁이 임박하여 기존의 발굴 작업에만 집중해야 한다며 의뢰를 거절한다. 이후 이디스는 배질을 소개받는데, 배질이 제도 교육을 받지 못했음을 알면서도 개의치 않고 배질에게 모든 결정권을 위임한다.
서튼 후 지역 박물관 담당자들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 하루라도 빨리 발굴 작업을 마무리해야 하는 상황에서, 배질이 자신들의 발굴 작업을 돕던 것을 중단하고 이디스에게로 가자 그를 설득하러 찾아온다. 그들은 배질을 향해 “노력의 결과물이 고작 그거요?” “자기가 하면 다를 줄 아나” 등으로 그의 독자적인 결정을 깎아내린다. 그러나 그들의 로마 빌라 발굴 작업에는 배질의 실력이 꼭 필요했고, 배질에게 ‘그만하면 됐다’며 임금을 2파운드로 올려줄테니 돌아올 것을 제안한다. 그들은 절대 배질의 현장 전문성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그를 설득하지 않는다. 또한, 배질이 이디스의 발굴 작업에 착수한 것을 그들을 향한 임금 인상 시위 정도로 해석할 뿐이다. 그러나 배질은 애당초 이디스의 사유지에 있는 둔덕들이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 관심을 두고 있던 상태였다.
고고학적 탐구에 대한 배질의 열정, 혹은 자신의 전문성에 대한 자신감은 ‘국가가 인정한 전문가’를 마주했을 때 크게 흔들린다. 이디스의 사유지에서 선박이 발굴되고 있다는 사실이 사유지 밖으로 퍼져 나가면서, 대영박물관 소속 고고학자인 찰스 필립스가 다른 연구원들을 이끌고 찾아온다. 그가 배질에게 누구인지 묻자, 배질은 스스로를 “고고학자(archaeologist)”가 아닌 “발굴가(excavator)”로 소개한다. 반면 찰스는 배질의 자기규정을 비아냥대듯 자신은 '고고학자'임을 강조한다. 이후 찰스는 배질에게 발굴 작업에서 손을 뗄 것을 지시한다. 배질은 처음 둔덕의 비밀을 발견했음에도 자신의 전문성을 주장하지는 못한 채, 고용주인 이디스의 권위에 기대어 이디스가 중단을 요청하지 않는 한 자신 또한 철수할 수 없음을 밝힌다.
우리 사회는 누군가의 전문성을 중앙집권적인 제도를 토대로 인정해왔다. 일정 시수의 수업 이수 여부, 혹은 특정 분야에 대한 연구 능력의 여부는 대학이 학위라는 이름으로 독점적으로 인증한다. 구체적인 훈련이나 시험을 거쳤다는 사실은 국가나 협회가 공인한 자격증에 의해 배타적으로 증명된다. 우리는 제도를 통해 인증된 배움만을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것, 혹은 신뢰할 만한 것으로 여기는 문화 속에서 자라왔다. 그 문화는 객관적인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제도가 배움과 전문성의 질을 관리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독점적이고 일률적인 관리에 대한 신뢰는 전문성이 권위 형성의 요인으로 기능하도록 한다. 그러나 배움에 대한 공식적 인증을 받았다고 해서 타인 위에 군림할 자격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제도권 안에서 배울 기회를 가진 사람들은 이러한 사고를 가장 경계해야 한다.
졸업장과 자격 뒤에 숨기
대영박물관에서 파견된 고고학자 찰스는, 발굴 작업에서 보조적인 역할만 하기에는 배질의 능력이 아깝다는 이디스에게 배질은 자격이 없다(not qualified)고 말한다. 그는 이디스의 둔덕들이 ‘뭔가 의미 있는 것’임을 발견한 배질을 제도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현장 보조 정도로 취급하며, 자신의 허락 없이는 배에 발도 들이지 말라는 식으로 명령을 내린다. 그 뿐만 아니라 중대한 일은 자기와 같은 대영박물관 소속 사람이 해야 함을 누누이 강조하고, 무덤에서 발굴된 유물을 모두 대영박물관으로 가져가는 데 집착한다. 이디스는 그런 찰스를 향해 “속물적”이라는 말로 응수한다. <더 디그>가 비판하고자 하는 점이 잘 드러나는 대사이다.
현장 경험이 많지 않았던 고고학자 페기 피곳이 발을 헛디뎌 발굴 현장이 조금 망가지자, 찰스는 페기를 어서 빼내라며 대체 어디서 그렇게 배웠냐고 다그친다. 그와 비견되는 것은 “햇볕이 너무 내리쫴서 덥죠?”라고 물어오는 배질의 섬세함이다. 찰스는 대학과 국가를 통해 인정받은 자신의 전문성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람을 좌지우지하는 데 사용한다. 물론 찰스가 보여주는 오만함은 그 자신의 기질적 성향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제도가 인증한 전문성이 그를 타인과 차별화하며, 그 전문성에 흠집을 내는 것 또한 어렵다는 것에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문화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더 디그>의 배경이 되는 시점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의 영국이지만 전문가들의 권위주의는 2020년대 대한민국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갑질을 하는 유명 대학 교수들, 국민 위에 군림하고자 하며 범법자들의 돈을 받는 법조인들뿐 아니라, 학위나 자격을 앞세워 타인에 대한 자신의 우월함을 뽐내고자 하는 이들은 주변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그들은 배움에 대한 제도적 인증을 통해 ‘권위’ 또한 획득했다고 생각할 테지만, 이는 착각이다. 진정한 권위는 학위와 자격에서 나오지 않는다. 착각에 빠진 채 제도를 통해 타인을 짓누르려는 태도는 비겁함만을 드러낸다.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배움의 진정성’
배움에 대한 제도적 인증이 갖는 효과가 지나치게 광범위하거나 견고할 경우, 한 번 학위나 자격을 획득한 사람은 절박하지 않아도 되고,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서도 되고, 권위주의적으로 행동해도 된다는 등의 사고를 심어줄 수도 있다. 제도적 인증은 되려 한 사람을 그 인증 뒤에 숨게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사회에서 배움과 배움에 대한 인증이 작동하는 방식을 자세히 톺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왜 배우는가? 배움은 대체로 제도적 인증이 가져다줄 효과를 기대하며 이뤄진다. 초등학교 때부터 우리의 배움은 수단화되기 십상이다. 좋은 고등학교를, 좋은 대학교를, 그리고 좋은 회사를 가기 위한 수단 말이다. 이러한 이유로 제도적 차원에서 인증받지 못하는 배움은 부수적인 것으로 전락해버렸고, 제도적으로 인증되는 학습 현장에서도 진정으로 배움을 즐기는 태도는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그러니 졸업장과 자격증이 배움의 진정성까지 인정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때, 진정성은 무엇인가? 미학이나 상담학, 철학 등에서는 “진실된 태도로 임하는 것” 등의 개념으로 사용된다. 배움에 있어서 진정성은 배움의 대상을 좋아하는 마음, 수단화하지 않는 마음, 탐구 대상이 주는 앎에 대하여 겸손할 줄 아는 마음으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배울 수 있는 기회에 감사하고, 앎을 통해 세상 위에 군림하려 하는 대신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배움을 더욱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것, 나아가 배울 수 있게 해준 세상에 겸손 하는 것. 배움의 진정성은 배움의 결과에 대한 ‘소유가 아닌 공유’를 추구할 때 실천된다. 이디스의 둔덕에서 배질이 처음 발견한 배를 두고 ‘자신의 배’에 발도 붙이지 말라고 말한 찰스가 아닌, 오랜 기간의 공부를 통해 대중을 위하여 쉽게 쓰인 책을 펴낸 배질은 그 누구보다도 진정성 있게 배움을 추구했다.
학문의 의미
학문은 왜 필요한가? ‘상아탑’이라는 표현이 때로는 풍자적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을 바꾸지 못하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학문을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배질 브라운과 그의 아내의 대화 장면을 통해 학문의 의미 역시 엿볼 수 있다. 배질이 발굴 작업의 지휘권을 찰스에게 뺏긴 뒤에 자신의 공에 대해서는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자, 그의 아내는 이렇게 답한다.
“그건 몰라. 현장에 끝까지 남아야 기억될 가능성이라도 있지. 발굴은 과거나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일이라고 했잖아. 후대에 그들의 뿌리를 알려주는 일이니까. 후대와 선대를 잇는 일이라고 입이 닳도록 얘기하지 않았어?”
“온 나라가 전쟁 준비로 바쁜데 왜 당신들은 흙에서 뒹구는데? 다 의미가 있어서잖아. 곧 시작될 전쟁보다 더 길이 남을 일이니까(Something that’ll last longer than whatever damn war we’re heading into)”
대화 이후, 배질은 발굴 현장으로 돌아간다.
학문은 현재를 살아가기 바쁜 사람들, 자신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잊고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작업이다. 오랜 시간 천착하지 않으면, 끈기 있게 탐색하지 않으면 못 보고 지나칠 수많은 이야기를 수면 위로 드러내고 기록하는 것이 학문의 역할이다. 이런 점에서 학문을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배움의 진정성이 그 어떤 분야보다도 강력하게 요구되어야 하지 않을까.
다만, 대단한 ‘학문’을 하지 않아도 모두가 배움을 수단으로만 삼지는 않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배움 그 자체에 애정을 갖고 진실 되게 임할 여유가 있고, 제도적 인증과 상관없이 타인의 모든 배움을 존중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기를 바란다.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에는 이디스 부인 같은 사람이 더 많이 필요하다. 누군가의 배움의 진정성을 알아봐 주는 사람, 제도 바깥의 사람을 눈여겨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누군가의 배움과 전문성을 배타적으로 인증하는 기득권 세력은, 때때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만 관심 있을지도 모른다. 예컨대 입스위치 지역 박물관이 “사소한 도전”으로 치부했던 이디스의 작업을 배질 또한 포기했다면? 영국인들의 뿌리는 영영 밝혀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다시 묻다
영화는 배질 브라운과 그를 돕는 두 명의 일꾼이 파헤쳐진 무덤에 다시 흙을 덮는 조촐한 장면을 비추며 끝난다. 이디스 프리티가 사망한 후, 발굴 작업의 성과와 관련해 배질 브라운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 그의 노력이 영국 고고학계에 큰 발전을 가져왔다는 사실은 최근에서야 알려졌다. 오늘날에는 배질의 이름도 대영박물관 상시전시관에 기록되어 있다. 배질 브라운이야말로 진정한 배움의 의미를 실천한 사람이 아닐까? 자신에게 탐구할 기회를 준 세상에 겸손한 마음으로 임하는 것. 자신이 얻은 성과로 명성을 떨치려 하기 보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신의 공헌을 묻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광활한 들판, 그와 대조되는 무덤과 배질 브라운의 언뜻 초라한 모습. 학문과 배움의 진정성을 그려낼 수 있다면, 그 모습은 <더 디그>의 엔딩 씬과 닮아있지 않을까.
*<중앙문화>에 기고한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