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녜스 May 14. 2021

UN은 분쟁 피해자를 환대하는가?

영화 <내부고발자>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고”, “인종·성별·언어 또는 종교에 따른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의 인권 및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을 촉진하고 장려 …” 헌장 제1조에 담긴, 국제연합의 목적이다. 그리고 국제연합은 “이러한 공동의 목적을 달성함에 있어서 각국의 활동을 조화시키는 중심이 된다.”


가정폭력을 당한 여성을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구제하지 않는다. 종교적 갈등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대신 간섭을 중단하라고 말한다. 터전을 잃은 무슬림 여성들은 평화유지군과 현지 경찰에게 성가신 존재일 뿐이다. 직접 소통하고 해결하려는 대신, 여자인 경찰을 불러 상황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온몸에 멍이 든 소녀가 왜 다쳤는지를 궁금해하는 군인과 경찰은 없다. 알고 싶지 않거나, 아니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일 테다. 아이들의 성을 매수할 뿐만 아니라 학대하고, 납치 행위에도 가담한다. 평화유지를 사명으로 삼는 군인과 경찰이 그러하다. 평화를 간절히 기다리던 공간을, 국제연합의 휘하에 있는 사람들이 잔혹한 범죄로 다시 물들인다. 영화 <내부고발자>가 그려내는 진실이다.


국제연합 헌장의 제1조를 곱씹다 보면, 생각은 어느새 환대의 개념으로 흘러가 있다. 환대는 어떤 사람이 사람답게 대우받으며 특정 자리에 있을 권리를 무조건적으로 인정하는 행위다. 그렇다면 평화와 안전, 인권과 자유 등은 모두 환대를 함축하는 개념이다. 그 누구라도 배제당하고 차별을 받거나,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불안에 떨거나 두려움에 매몰되는 대신, 특정한 장소에 안심하고 서있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평화이고, 안전이고, 인권과 자유의 보장이지 않은가.  


영화 속에서 평화유지군을 포함한 평화감시단은 과연 누구를 환대했는가. 그들이 감시했던 것은 환대의 개념이 들어내진 명목상의 평화였다. 그들은 현지 민족 개개인의 삶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외적인 분쟁과 사건사고가 없는 상태, 그 정도가 그들이 상정하는 이념적 평화의 한계였다. 현지 민족의 공간을 빌려 쓰고 있으면서 공간 안에서 그들과 조화를 이룰 생각은 하지 않는다. 간간히 지뢰를 처리하고, 남은 시간에는 술을 마시고 게임을 즐기면 그만이다. 지속적으로 가정폭력을 당해온 여성이 도움을 청하러 왔을 때, 평화감시단은 피해 여성을 구제하기 위한 철저한 조사를 진행하는 대신 현지 경찰로 보이는 이들의 눈치를 보았다. 안전하게, 사람답게 서 있을 수 있는 자리를 얻기 위해 평화감시단을 찾아온 여성에게 그들은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는 현지 경찰만이 ‘사람’이었다.


여성은 사람이 아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떨쳐낼   생각이었다. 가정폭력을 당한 여성을 아무도 적극적으로 도우려 하지 않았던  약과에 불과했음이 후반부로 갈수록 명백하게 드러났다. 여성은 환대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이모부에 의해 인신매매의 대상이  라야는 성착취와 폭력을 피해 감시단의 초소로 도망쳐왔다. 역시 사람답게 있을  있는 장소를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감시단은 라야의 자리를 온전히 보장해주지 못했다. 아니, 보장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성착취의 가해자였기 때문이다. 결국 라야는 포주와 , 경의 범죄를 증언하려던 것에 대한 보복으로 죽임을 당한다. 온갖 성착취가 발생한  술집에서는 ‘사람이 아닌 존재로서 자리하기 위해서도 조건이 필요했다. 반항하지 않는 고분고분한  노리개로 존재할  있어야만, 살아서 머무를 공간딱딱하고 더러운 매트리스 보장되었다.


여성은 전 세계를 관통하는 기나긴 전쟁 역사 내내 성착취의 피해자였다. 영화 속 국제연합 소속의 남성이 아무렇지 않게 말하듯 여성은(those girls) ‘늘 존재하는 전쟁의 노리개’였다. 많은 전쟁 성범죄가 지금까지도 제대로 처벌되지 않아 왔다. 이는 사건에 대한 해석의 권리, 혹은 서사 편집의 권리가 가해자에게 있어 왔기 때문이다. 국가 간 전쟁이 만연하던 당시, 군인들의 승리가 곧 국가 전체의 생존으로 귀결된다는 논리에 따라 전쟁으로 인한 정서적 스트레스를 해소하거나 전장에서의 사기 증진 등을 이유로 여성이 동원되는 양상—국가 차원에서 계획적으로 동원하든, 군인들이 임의로 피정복국가 여성을 강간하든—은 전쟁을 주도해온 기득권에 의해 정당화되어 왔다. 여성을 희생한 결과 국가가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방식의 서사 편집이 동서를 막론하고 계속되어 온 것이다. 그들의 알량한 정당화 시도에도 나는 그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평화를 지키겠다는 명목으로 파견된 사람들이 어린 소녀들의 납치에 관여하고 가학적인 성폭력을 저지른 건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정합성 이론은 학습 이론의 한 갈래로, 이론에 따르면 학습자는 외부에서 어떤 자극이 가해지든 자신의 방식대로만 경험을 해석하여 내적 정합성을 유지한다. 그리고 기존 정합성에 따라서는 도저히 외부 경험을 이해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러야만 학습자는 자신의 정합성을 재구조화하기 시작한다. 민간 기업에 외주를 맡기거나 회원국 차원에서 각자 평화유지군을 파견하게끔 하는 방식으로 감시단을 모집한 국제연합은, 평화 감시단 개개인의 정합성이 국제연합이 목표하는 이념적 평화—모두를 향한 절대적 환대가 전제된—를 담아내도록 하는데 실패했다. 감시단이 모집되는 방식이 국제연합 차원의 일련의 이념적 교육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권력을 쥐어 준다는 것은 약자를 어떻게 대우할지에 대한 결정 권한 또한 넘겨주는 것이다. 즉, 권력에는 누구를 환대할지 결정할 권한 또한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국제연합은 국제법을 통해서 평화유지군과 감시단에 각종 권력을 위임하고, 이에 따라 감시단은 파견된 지역에 통제력을 발휘하며 누구에게 총을 겨누고 누구를 안전한 장소에 이송할지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를 환대해야 하고 왜 그들을 환대해야 하는지에 관한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애초에 가치가 아닌 자본을 토대로 성립한 계약 관계에서 서로의 가치관과 정합성에 영향을 주는 것이 가능키나 할까? 아무리 국제연합이 모집된 군인들에게 ‘진정한 평화’를 감시해줄 것을 명시적으로 요청한다 한들, 내적 정합성이 변하지 않은 채—단언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여성이 성적 대상화되는 문화를 체화한 채—로 권력을 쥐게 된 이들이 국제연합의 이념대로 행동하길 기대하기는 어렵다. 국제연합과 미 정부, 그리고 민간 기업 간의 ‘평화를 위한 계약’에서, 현지 민족과 여성은 중요 주체로서 인정받지 못한다.



평화 유지라는 목적 아래 별다른 절차 없이 권력을 위임해 온 국제연합이 헌장을 통해 상정하는 평화란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평화 유지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어서 국제연합이 전 세계의 중심이 되어도 괜찮은지 우리 모두의 재고가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는 국제연합이 평화유지군을 통해 분쟁 피해자를 환대할 제도적 준비가 되어있는지 면밀히 따져 보아야만 한다. 존재 자체로 사람답게 머무를 수 있는 공간, 즉, 환대받을 수 있는 공간을 간절히 기다리는 분쟁과 폭력의 피해자들에게 ‘국제연합의 조치를 기다리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지 스스로 되묻게 되는 순간이다.



작가의 이전글 “평양에 갔다 왔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