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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녜스 Oct 05. 2020

“평양에 갔다 왔는가?”

의도는 묻지 않은 국가권력: 동백림사건과 권력의 통치기술


* 학부 1학년 당시 <한국 현대사의 이해> 과목 기말 보고서로 제출했던 추적 기사임을 밝힙니다.




 아이론 밑 와이셔츠 같이

 당한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 ……     

 내 살과 뼈는 알고 있다.

 진실과 고통

 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내 마음 하늘

 한편 가에서

 새는 소스라치게 날개 편다


 <그날은 새> - 천상병   

  


       1993년 4월 28일, 자신이 좋아했던 시어인 ‘새’처럼 이승을 훨훨 떠나간 천상병은, 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아이론 밑 와이셔츠”처럼 당했다. 세 차례에 걸친 전기고문이었다. 이후, 그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몸이 되어 사회로부터 고립됐다. 어눌해진 말솜씨로 정신병원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이런 그는 “67년 7월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내 인생은 사실상 끝났던 것”이라고 회상했다. 끝내 살아난 천상병에겐 주홍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간첩 행위를 한 친구를 알면서도 고지하지 않은 죄, ‘불고지죄’를 저지른 죄인. 순진무구한 시인에게 이런 낙인을 찍은 동백림사건은 대체 무엇인가. 천상병은 누구를 위하여 낙인찍혀야만 했는가. 1967년 시작된 동백림사건이 당시의 국가권력에 대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지, 또 당시 남한 사회를 어떻게 재구성했는지 본 기사를 통해 추적해보고자 한다.



◇ 대규모 간첩 사건이 발생했다     


    1967년 7월 8일,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은 공식담화를 통해 남한 사회를 들썩이게 할 사건을 공개했다. 「동백림을 거점으로한 북괴대남적화공작단 사건」이었다. 발표문에 따르면, 북한은 동백림에 공작거점을 설치하고 서독 등지에서 유학 중인 남한 학생이나 유명인사들을 중심으로 심리전 공작을 벌였다. 북한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유학생과 예술가들에게 호의를 베풀며 상대적으로 전후 복구가 잘된 북한 사회를 홍보했고, 이에 사상적 흔들림을 경험한 지식인들이 공작금을 받고 간첩 활동을 벌여왔다는 것이다. 김형욱은 첫 발표부터 사건을 “대규모 간첩 사건”으로 규정했다.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인물들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건 발표의 파급력은 엄청났다. 그런데 중앙정보부는 이상하리만치 사건과 관련된 발표에 집착했다. 10일간 7차례에 걸쳐 사건의 경과를 국민에게 ‘보고’했고, 언론은 중앙정보부의 발표를 매번 대서특필했다. 중정은 67년 7월 3일부터 사건 관계자 66명을 4차례에 걸쳐 검찰에 송치하기 시작했고, 이 중 23명에게 간첩죄를 적용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 과정에서 서독, 프랑스, 미국 등지에 있던 교민들과 유학생들이 귀국 조치를 당했다. 중앙정보부는 ‘자진 귀국’이었다고 주장했으나, 체포와 관련하여 사전 협의는 일절 없었기에 서독과 프랑스는 ‘주권침해’를 주장했다. 재판 절차를 무비 카메라로 찍어 갈 정도로 본 사건은 세간의 눈길을 끌었다.  

   

     검찰에 의해 기소된 인원만 41명이었다. 11월 9일, 서울형사지법 제 3부에서 김영준 판사를 재판장으로 하여 시작된 재판은, 1년 4개월이 지난 재상고심에서야 끝이 났다. 검찰은 1심 구형 공판에서 간첩죄 등으로 사형과 무기징역 등 중형을 구형했다. 국가보안법 제2조와 형법 제98조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최종심인 재상고심에서 간첩죄가 인정된 경우는 존재하지 않았다. ‘간첩 없는 간첩 사건’이었다. 1969년 2-3월부터 다수의 피의자가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었고, 심지어 사형 선고를 받은 정규명과 정하룡까지도 1970년 12월 23일 모두 석방되었다. 간첩이라는 누명은, 법적으로는 아무에게도 씌워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상병이 이미 자신의 삶이 끝났다고 말하고, 윤이상이 고국에 다시는 돌아올 수 없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이들에게는 사건의 ‘전개 과정’에서부터 이미 주홍글씨가 새겨지고 있었다.     



◇ 간첩(間諜), 그 의미의 시작점     


     사람들은 동백림사건을 박정희 정권 때 발생한 여러 ‘공안사건’ 중 하나로 인식한다. 공안이라 함은, ‘공평할 공(公)’에 ‘편안할 안(安)’으로 ‘공공의 안녕과 질서가 편안히 유지되는 상태’를 뜻한다. 즉, 공안사건은 공공의 질서가 위협을 받은 경우를 말하는데, 한국 사회에서는 공안사건에 늘 ‘간첩 담론’이 동반된다. 그렇다면 ‘간첩’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한반도의 간첩 담론은 타국의 것과는 다를지도 모른다. 1945년 해방의 공간에서는 한 민족이 외세 간 견제와 내부의 이념 논쟁으로 인해 반으로 갈라져 서로를 ‘적’이라 부르게 되었다. 누군가가 우리나라를 전복하기 위해 기밀을 수집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들을 간첩이라 부르고 처벌하는데, 문제는 북한의 경우 생김새도, 언어도 똑 닮은 사람들이 간첩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감시의 시선을 외부자가 아닌 ‘내부’로 돌려야 하고, 서로가 서로를 끊임없이 의심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부를 향한 의심의 시선은 한국 현대사에 많은 아픔을 남겨왔다. 남한의 경우 1948년 제주 4.3 사건 때부터 국민에게 칼을 겨누었다. 남조선노동당 제주 지부가 중심이 되어 단선 단정을 반대하자, 국가와 언론은 ‘빨갱이’라는 개념을 앞세워 그들을 처단해야 할 대상으로 삼았다. 직접 무장봉기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나 유족까지도 예비검속 대상으로 두어 지속적인 감시를 하기도 했다. 같은 해 10월, 여수에 주둔 중이던 국방 경비대 내부 남로당원들이 제주도 진압을 거부하며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여수와 순천을 점령했다. 인민군이 남하하거나 사전에 상부와 협의가 있었던 것이 전혀 아님에도, 진압군은 지역을 탈환한 뒤 마을 주민이나 우익세력으로 하여금 ‘간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게끔 했고, 많은 사람이 좌익세에 동조했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이념의 차원이 아닌 개인적 원한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정식 재판을 받지 못한 채 처형 당했다. 간첩을 처형하는 과정은, 합법적 절차를 따르지 않아도 ‘간첩’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 하나만으로 정당화된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1948년 12월 1일, 여순 사건을 직접적 계기로 하여 국가보안법을 제정 및 공포했다. ‘빨갱이’에 대한 공포심을 도구 삼아 정권에 대항하는 세력의 강화를 막고자 한 것이다. 이는 국가보안법 제1조와 이승만 정권이 국가보안법을 적용한 사건들을 통해 추측할 수 있다. 국가보안법 제1조에서는 ‘국헌을 위배하여 정부를 참칭하거나 그에 부수하여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구성한 자는 좌에 의하여 처벌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목적으로’라는 표현이다. 어떤 행위를 하는지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닌 ‘어떤 마음을 갖는지’에 초점을 두고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수사기관으로 하여금 자의적 판단을 가능케 함으로써 권력이 법을 초월할 여지를 제공한다. 이승만 정권은 이 법의 적용대상을 확대하며 자신을 비판하는 언론을 통제하기도 했고, 정권 연장에 있어서 걸림돌이 되는 진보당 세력이나 소장파가 그 세를 넓히려 할 때마다 그들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주장했다. 절차에 있어 문제가 제기되어도 국가는 눈 깜빡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혹시 그들이 간첩인게 사실이라면…’ 하는 마음, 혹은 자신도 빨갱이 취급을 받으면 어떡하지라는 마음 탓에 국민이 용기 있게 나서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은 국가권력의 모든 행위를 정당화하는 마법의 카드였다. 유명 정치인들이 마구잡이로 잡혀가는 시국 속에서, 대중 속 ‘빨갱이’ 혹은 ‘간첩’이라는 낙인에 대한 공포는 점점 더 강화되었다.     



◇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서로를 의심할 수는 있었지만, 박정희의 등장 전까지 그 의심은 개개인에게서 ‘내면화’되지는 않았다. 3·15 부정선거 이후,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떠오른 것을 기점으로 하여 전 국민이 정권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전국적 시위는 ‘간첩’이라는 낙인을 찍고 처벌함으로써 해소될만한 규모가 아니었고, 시위의 근거 또한 너무나 명확했다. 결국, 이승만 정권은 물러났다. 4·19 혁명 정신은 통일 운동의 고양을 통해 1950년대 국가의 통치 방식에 결정적인 규정력으로 작용한 분단체제를 해소하고자 했고, 이에 따라 사회가 국가에 대해 자율성을 가지게 되는 듯했다.     


      그러던 1961년 5월 16일 새벽, 3600명의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박정희의 등장이었다. 박정희와 그의 세력은 5·16 혁명공약의 첫 번째로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으로 구호에만 그친 반공체제를 재정비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1961년 6월 10일 중앙정보부를 설치하며 “공산세력의 간접침략과 혁명과업수행의 장애를 제거”를 목표로 삼았고, 그해 7월 3일에는 반공법을 공포하여 반공체제를 더욱 강화하고자 했다. 반공법은 수사기관의 자의적인 법률 해석을 더욱 더 가능케 함과 동시에 강화된 형량을 포함하고 있었다. 일련의 행동을 통한 반공체제 강화는 자신의 좌익전력이 논쟁거리로 올라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박정희가 국민에게 씌운 눈가리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백림사건의 전개 과정을 조금 더 살펴보면, 박정희의 강력한 반공체제 구축 시도는 단순히 자신의 좌익전력을 덮으려던 것이 아닌, 특정한 통치기술을 실행하기 위함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자진 귀국이라니…     


     다시 동백림사건으로 돌아가, 전개 과정마다 드러나는 박정희와 중정의 통치기술을 살펴보고자 한다. 1967년 5월 14일, 「제5회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를 취재하러 체코에 입국한 서독 주재 조선일보 이기양 특파원의 실종사건이 국내신문에 보도되었다. 이를 본 국내 대학교수 임석진은 불안에 휩싸였다. 이기양의 실종이 북한과 관련 있을 거라 판단되는 가운데, 임석진 자신이 서독 유학 당시 이기양에게 북한 대사관에 가볼 것을 추천했었기 때문이다. 임석진은 60년 4월 북한대사관을 처음 방문한 뒤, 3년 후에는 북한 노동당 가입원서를 작성하는 등 북한과 자주 접촉했었기에 자신 또한 납치를 당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생겼고, 자수를 통해 신변을 보호받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임석진은 1967년 5월 17일 박정희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자신의 대북 접촉 전력만을 밝히지 않고 다른 인물들을 거론하며 유럽 유학생들의 전반적인 대북 접촉 실태를 고발한다. 그는 이런 고발이 ‘그들’을 위한 것이었다고 회고한다. 한편, 임석진에 대한 조사 결과 40여 명의 대북 관련 혐의자 명단이 만들어졌고, 중정은 조사를 토대로 6월 초 「V-318 공작」과 「GK-6717 공작 계획」을 수립한다. 이는 국내외 혐의자를 체포 및 수사하기 위한 계획을 담고 있었다. 짚고 넘어갈 것은, 중정이 처음부터 혐의자를 구속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해외 거점에서 역공작하는 방안” 또한 검토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앙정보부는 6월 19일 검찰, 경찰, 군방첩대까지 포함하는 합동수사본부를 발족하고, 이튿날인 20일부터 해외 혐의자를 소환하기 시작한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재외국민 또한 통치의 대상으로서 중정 앞에 놓이게 된 것이다.     

    

     1904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1958년 파리에 건너간 이응로 화백은 어느 날 친하게 지내던 한국 대사관의 공사가 찾아와 “이번에 대통령께서 해외에서 활약하면서 한국의 민족문화를 선양하는 데 공헌한 유공자를 모국에 초대하여 조국의 발전상을 보여주겠다고 한다”고 말했다며 1967년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예정된 일정에도 불구하고, 고국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 탓에 대통령의 초대를 비밀로 해달라는 공사와 함께 도쿄에 도착했다. 호텔에서 친척에게 전화하려는 이응로에게 공사는 자신이 연락하겠다며 그를 만류했다. 김포공항에 도착해서도 손녀와 함께 가려는 그를 미리 준비된 검정 자동차에 태워서는 중앙정보부 건물의 지하실에 “유폐시켰다”.


     1967년 6월 17일 7시, 서독에서 현대음악의 거장으로 이름을 알리던 윤이상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는 이렇게 말했다. “난 박 대통령의 개인 비서입니다. 대통령께서 당신 앞으로 친서를 보내셨습니다 … 가능한 빨리 사보이 호텔로 와주십시오.” 호기심에 사보이 호텔에 간 윤이상은, 친한 친구였던 최덕신 본 대사가 쓴 편지를 받았다. 친서는 최덕신이 갖고 있기에 본에 와달라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베를린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신분 증명서가 필요했으나, 사보이 호텔에서 윤이상과 함께 있던 남자들은 여권은 필요 없다고 말했다. 함부르크 공항에서 출발하여 도쿄에 도착했을 때도, 서울에 가기 위해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도쿄를 떠날 때도 여권은 필요 없었고, 윤이상은 약물의 영향 탓인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서울에 도착하여 낡은 지프차에 태워진 그는 중앙정보부 건물로 연행되었다.


     이러한 소환 과정은 국제적 비난을 야기했다. 없지만 실재했던 대통령의 친서로 거물급 인사를 유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독, 프랑스 등지에서 많은 혐의자를 소환하면서 해당 국가 기관과 아무런 사전 협의를 진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독의 비난과 경제적 제재 등에 대해 중정은 혐의자들이 “자유의사로 귀국”했다고 주장함과 동시에, 그들의 통치기술을 명백히 드러내는 발언을 덧붙인다. “모든 국민들은 공산주의자에 대하여 뼈에 사무친 증오감을 가지고 있으며 … [간첩 행위 등 국가보안법의 처벌 대상인 행동에 대한] 국민의 지탄이 특히 날카로운 것임.” 6·25 전쟁이라는 동족산장의 비극을 경험한 민족만이 갖는 특수한 감정을 통해 자신들의 모든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 행위가 거짓으로 가득 차 있거나 타국의 주권침해를 유발하는 막무가내의 행동이었어도 말이다. 민족 감정에 대한 호소를 토대로, 중앙정보부라는 당시의 국가권력은 국민에게 초합법적으로 작용하여 어디에서나 정당성을 확보했다.      



◇ 행위는 곧 의도     


     1967년 7월 8일, 김형욱 정보부장은 동백림사건에 대한 첫 발표부터 이 사건을 ‘간첩사건’으로 규정했다. 혐의자들의 얼굴과 이름, 가족관계는 선고공판이 있던 12월까지 신문지면을 통해 계속해서 대중에게 알려졌다. 무죄 추정의 원칙은 중정의 담화문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권력의 의지는 동백림사건에 대한 발표와 심문과정에서 분명하게 발현되었다. 1964년 6·3 사태로 국민의 결집 의지를 단단히 경험한 박정희와 중앙정보부는 더 강력한 통치기술을 찾고자 했고, 이에 한국 사회가 맞닥뜨리기 쉬운 안보위기를 통해 ‘국민 길들이기’를 시작했다. 동백림사건의 피의자들은 ‘본보기 처형’의 안타까운 피해자였다.


     국가권력은 동백림사건 전개 과정에서 ‘간첩’에 대한 담론을 끊임없이 생산해냄으로써 감시가 일상화되도록 만들었다. 앞서 말했듯이, 중정은 이례적으로 10일간 7차에 걸쳐 사건에 대한 발표를 거듭했다. 중정과 검찰의 수사과정에서, 수사관들은 피의자에게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아니, 물었지만 묻지 않았다. 당국의 수사와 재판은 ‘국가’의 안보를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응로는 죽은 줄 알았던 아들에게서 온 편지를 받은 뒤, 동백림에 가면 아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지인의 말에 여러 차례 동백림을 방문하였다. 이런 이응로에게 검찰은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윤이상은 독일에서 오래 지냈고 동포를 돕는 데 유리한 사회적 지위를 가졌기에 파독 광부나 간호사, 유학생과 자주 만남을 가졌다. 또한, 북한 측으로부터 예술 활동 지원 명목으로 돈을 받은 적이 있어 북한의 초대에 응하여 옛 친구를 만나고 고분 벽화를 탐방하고 오기도 했다. 이러한 내용과는 상관없이, 중정과 검찰은 윤이상이 북한에 방문하여 지령을 받은 뒤 남한 사람들에게 공산주의 사상을 주입하는 등 간첩 행위를 했다며 사형을 구형했다. 그들의 행위에는 국가보안법이 처벌하고자 하는 ‘목적의식’이 부재했는데도 불구하고, 중앙정보부의 관심은 목적의식에 있지 않았다. 그들은 “행위는 곧 의도”라는 논리로 접근했다.


     ‘국가 안전’이 아닌, ‘인텔리 간첩’을 만드는 것이 당국의 최우선과제였다. “’안보위기’를 통해 국가 통치성의 군사적 측면을 강조하고자”했던 것이다. 국가권력의 유지 및 팽창을 위해서는 공동의 적이 필요했다. 그러나 권력은 공동의 적을 만드는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중정은 제5차 발표문을 통해 시인 천상병이 국가보안법 제9조인에 명시된 불고지죄를 저질렀다고 밝혔다. 서울대 상과대학 동문 강빈구가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으로 그 목적 수행을 위하여 암약 중인 간첩이란 정을 충분히 지실(知悉)하였음에도 이를 수사정보기관에 고지치 않”았다는 것이다. 순진무구한 시인 천상병을 통해 다시 한번 수면 위로 떠오른 불고지죄의 존재와, 끝내 집행된 형벌은 국민으로 하여금 자신이 맺고 있는 모든 관계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관계에 대한 일상적인 의심은 생각의 공유와 결집을 단단히 제한했다. 국가권력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했던 목표는, 전 국민의 자기검열을 통한 순종적인 국민 만들기였다. 그리고 그들은 ‘동백림사건’을 매개로 자신들의 메시지를 국민에게 전달했다.      



◇ 내 인생은 사실상 끝났던 것…     

 

    1967년 7월, ‘대규모 간첩 사건’으로 화려하게 막을 올린 동백림사건은 ‘간첩 없는 간첩 사건’이 되어 끝났다. 이 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물론 간첩 판결을 받은 사람이 없다고 해서, 이 사건이 실체조차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 A-3를 통해 북한의 지령이 전달된 적도 있고, 난수표가 발견되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박정희 정권과 중앙정보부는 동백림사건 처리 과정에서 권력의 우월성을 과시함(본보기 처벌)으로써 권력의 활성화(감시의 내재화, 국민의 결집 저지)를 달성했다. 또한, 관계나 의미에 개의치 않는 절대적 복종을 위한 국민 길들이기를 시작했다. 즉, 장기집권을 위한 초석을 쌓았다.


     그렇다면 주홍글씨가 새겨졌던 이들은 동백림사건에 연루됨으로써 무엇을 감내해야 했을까. 조사 과정에서 정신적 충격 탓에 담배 재떨이로 자신의 머리를 내리치기도 했던 윤이상은, 고향 땅을 다시 밟지 못한 채 독일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렇지만 제발 제 작품들이 자유세계를 돌아다니며, 자유세계 음악 청중들에게 소개될 때 제발 ‘간첩’의 작품이라는 누명을 쓰지 않도록 재판장님께서는 다른 죄를 저한테 주셔서…” 1968년 3월 28일 2심 결심 공판에서 앞과 같이 최후진술을 한 윤이상은, 끝끝내 정부의 어떤 사과도 받지 못했고, 남한에서 그의 작품은 한동안 ‘간첩’의 작품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야만 했다. 성공한 예술가였지만, 동백림사건 이후 그의 삶은 적막했다.


     순진무구했던 시인 천상병은 조사 과정에서 세 번의 전기고문을 당했다. 이후 고문의 후유증 탓에 대소변을 가리는 것이 힘들어졌고, 밤 중에도 깜짝 놀라 깨기를 반복했다. 전기고문을 두 번만 당했다면 아기를 낳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말을 아내에게 남기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관계를 가장 소중히 여겼던 천상병은 동백림사건에 연루되면서 많은 이들로부터 고립됐다. 국가권력이 만든 프레임 탓에 조금이라도 관련이 되었던 이들은 철저히 혼자가 되었다. 물론 전 국민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국가보안법을 어긴 죄로 기소된 이들이 경험해야 했던 쓰디쓴 고통은, 분단국가로서 대한민국이 짊어져야 할 어려움과, 국가보안법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의 필요성을 모두 고민하게 만든다.






<참고문헌>  *브런치에 각주 기능이 생기면 좋겠다는 마음이 한가득..입니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1999.9.19. (방영)

김준현, 「반공주의의 내면화와 1960년대 풍자소설의 한 경향」, 『상허학보』 21호, 2007.

국정원과거사건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이하 국정원 과거사위),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2권, 2007.

루이제 린저, 『윤이상, 상처 입은 용』, 랜덤하우스 중앙, 2005.

임유경, 「냉전의 지형학과 동백림 사건의 문화정치」, 『역사문제연구』 32호, 2014.

임유경, 「불고지죄와 증언 – 동백림 사건을 통해 본 권력의 히스테리와 문학」, 『역사비평』, 2017.

전명혁, 「1960년대 ‘동백림사건’과 정치·사회적 담론의 변화」, 『역사연구』 22호, 2012.

천상병, 「그날은―새」(『월간문학』, 1971. 2), 『천상병 전집―시』, 평민사, 1996.

한승헌변호사변론사건실록간행위원회, 『한승헌변호사 변론사건실록 1』, 범우사, 2006.

후지이 다케시, 「4·19/5·16 시기의 반공체제 재편과 그 논리」, 『역사문제연구』 25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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