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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녜스 Sep 29. 2018

행복하고 싶은 젊은 세대에 부치는 서(書)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를 읽고


    2018년, 대한민국에서는 모두가 ‘힐링’을 외친다. 각종 자기계발서와 유수의 강사들, 그리고 TV 프로그램들은 고통을 초월하여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거나 고통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쳐준다. 아니, 어쩌면 세뇌하고 있다. 나의 슬픔, 고통, 그리고 공포는 무조건 없애야 하는 감정이고, 이를 위해서는 늘 ‘나’에게 집중한 상태로 살아야 한다고 말이다. 물론 행복을 삶의 목표로 삼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것이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 세대는 ‘고립되고, 자기 속에 갇힌’ 주체가 되어, 편협한 시각으로 문제를 바라보거나, 타인의 눈물에 점점 둔감해지고 있다. 페미니즘이 ‘논란’ 혹은 양성 간의 ‘싸움’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많은 사람이 평등과 권리라는 여러 개념을 남성으로서, 여성으로서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약자의 권리를 박탈하고 갑질을 하는 사람들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커리어와 스펙을 위하여 타인의 고통은 나중 문제로 여긴다. 일생을 자기만의 영광을 위해 산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으나, 전국적 ‘힐링 열풍’은 우리나라가 어느 정도 풍요로운 사회가 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가운데, 슬픔의 의미를 재차 강조하며 현재 사회의 모습에 탄식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의 저자 김상봉이다. 1960년 태어난 그는 연세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이후 마인츠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집필한 책으로는 『학벌사회-사회적 주체성에 대한 사회적 탐구』, 『호모 에티쿠스-윤리적 인간의 탄생』, 『철학의 헌정. 5·18을 생각함』 등이 있다. 학생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모 대학교에서 해직당할 만큼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철학과 사회정의에 관심이 많아 ‘거리의 철학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역시, 앞으로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젊은 세대에게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책의 제목은 분명 ‘그리스 비극’으로 시작한다. 그리스 비극에 관심을 일절 가져보지 않은 독자들은 제목만 보고 슬그머니 이 책을 내려놓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절대 섣부른 판단은 하지 않기를. 저자 역시 “그리스 비극은 당신의 슬픔에 다가가기 위한 사다리였을 뿐”이라며 책의 목적이 그리스 비극에 대한 학술지식 전달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이 책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물론 책의 목차를 훑어보면, 책 전반에 걸쳐 그리스 비극이 다뤄지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저자는 그리스 비극의 기원과 비극이 향유된 시대의 주요 정신을 소개하고, 서사시, 서정시, 비극을 비교함으로써 비극만이 갖는 철학적 가치들을 짚어낸다. 다시 책의 제목으로 눈을 돌려보자. 제목 속의 ‘편지’라는 단어가 무색하지 않게, 책은 ‘당신’이라 칭해지는 수신인에게 보내는 53개의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여러분을 위해 한마디 해보자면, 김상봉이 그리스 비극에 대한 소개를 발판 삼아 ‘당신’에게 입증하려 한 것은, ‘그리스 비극 시인 같은 예술가가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위의 주장을 ‘우리 사회에 그리스 비극 같은 예술이 왜 필요한가’라는 물음으로 바꿔볼 수도 있겠다. 답은 그리스 비극이 사람들을 ‘시민적 주체’로 도야하기 때문이다. 개인 이기주의에 매몰되어 어떤 문제를 ‘나’로서만 바라보는 사람들을,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더불어 살 줄 알고, ‘나’를 초월하여 문제를 바라볼 줄 아는 주체로 성장시킨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그리고 지금도 쉬이 접할 수 있는 슬픈 영화들은 그리스 비극과 어떻게 다르길래 그런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걸까? 


    첫째로, 그리스 비극이 “우리에게 보여주려 하는 것은 대책 없는 슬픔이나 비참함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고귀함과 위대함”이기 때문에 그렇다. 여기서 정신은 용기, 의지, 정의로움, 혹은 책임감 등으로 해석하면 된다. 정신의 크기는 그것의 확장을 방해하는 장애물로만 판단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이 유한하기에 모든 정신의 최종적 장애물은 죽음인데, 어떤 가치의 실현을 위해 생명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 가치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함을 뜻함과 동시에, 그의 정신이 어떤 장애물로도 한계 지어지지 않을 만큼 위대함을 드러낸다. 그리스 비극 속의 영웅들은, 어떤 가치가 가장 중요한가에 관한 숙고 이후, 스스로의 자유로운 결단을 통해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이를 통해 그리스 비극은 당시 사람들을 “상상력의 힘을 통해 죽음 앞으로 호출함으로써”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임을 진지하게 고민하도록 했다. 


    둘째로, 그리스 비극은 관중으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했다. 카타르시스는 원래 정화한다는 뜻을 가진 낱말이다. 의학에서는 ‘이열치열’ 심리치료를 뜻하기도 하는데, 저자는 그리스 비극 역시 이런 성질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비극은 어떤 요소를 통해 무엇을 정화한다는 걸까? 현재 사람들의 슬픔은 대부분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이고,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은 보편적 차원의 고통이나 사회 구조적 불합리 탓인 경우보다 그저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여러 욕망에서 비롯될 때가 훨씬 많다. 저자는 “정신의 허약함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다며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들을 비판하고, “우리가 말해야만 할 슬픔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되는 자기 연민이 아닌] 내가 내 손에 움켜쥔 모든 것을 스스로 버렸을 때, 그때도 남는 어둠”임을 강조한다. 그리스 비극은 바로 이런 종류의 슬픔을 다룸으로써 관중의 마음에 엄청난 크기의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이 연민과 공포는 관중이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사사로운 연민과 공포를 정화한다. 정화 과정을 통해 ‘내 앞의 고통’은 가벼워지고, 우리는 ‘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보편적 주체로서 사회의 구조적 문제나 삶의 본질적인 비극성에 대해 고민할 수 있게 된다.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사른 전태일에 관한 연극을 관람하고 누가 ‘내가 우리 반 A보다 인기가 없다니.’ 따위의 사사로운 연민 속에서 계속 허우적댈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비극은 사람 간의 진정한 이해와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스 비극은 크게 ‘대화’와 ‘합창’의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비극 시인들은 이 중에서도 ‘대화’ 요소를 통해 아테네 사람들을 시민적 주체로 도야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스 비극에서의 대화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단순한 대화, 즉 디알로기아(dialogia)가 아닌, 논쟁을 뜻하는 말인 안틸로기아(antilogia)라고 불렸다. 비극의 등장인물들은 대립 상황에서 치열하게 시비를 논하는데, “양쪽 모두 나름의 진실과 나름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대립은 해소되지 않고 극단을 향해 치닫”는다. 비극의 대화는, 모든 입장이 논리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음을 “그들이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겪는 처절한 고통”으로 증명한다. 자신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사사로운 연민이 아닌 위대한 정신이 경험하는 고통과 슬픔 앞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해지며, 이는 관중들이 다른 관점에 대한 개념적 인식을 넘어 그 관점을 취한 사람들과 진정으로 만나고 공감할 수 있게 해준다. 이를 저자는 “시신이 계속 쌓이지만, 우리는 다른 입장도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갖는다는 것을 [쌓이는 시신을 통해] 이해하게” 된다고 표현한다. 다른 관점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특정 문제를 자신의 관점을 초월하여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정리하자면, 그리스 비극을 통해 “다양한 입장들로 건너감으로써 [결국] 우리는 삶을 전체로서 볼 수 있게” 된다. 즉 비극의 대화는 사람들이 공동의 주제에 대해 더불어 사유할 수 있도록 하는 정신의 훈련장이 되어주었다. 남자로서, 여자로서만이 아니라, 특정 지역주민으로서가 아니라, 전체적 관점에서 삶을 조망해볼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잠시 1980년 광주를 떠올려보자. 5월 18일의 광주는 그리스 비극처럼 상상 속 사건이 아닌 현실이었다. 광주 시민들은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전남도청에서 마지막 밤을 맞았다. 우리는 종종 ‘나만 행복하면 됐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던 나랑 무슨 상관이야’라는 태도로 삶에 임한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사회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기에, 진정으로 내 삶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의 평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1980년의 광주는, 개인의 안위 이전에 우리나라가 나라답기 위해서 잊지 말아야 할 가치를 추구했고, 죽음을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유롭고 행복할 기회를 선물했다. 점점 더 고립되고 개별화되는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에게 비극 시인이 필요한 이유는, 또다시 불합리한 폭력이 발생했을 때, 그리고 우리의 이웃이 고통을 겪게 되었을 때, 1980년의 광주 시민들처럼 뭉침으로써만 그것들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진정한 연대를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에서 한 걸음 물러나고,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그 가치에 관한 다양한 관점에 공감하며 더불어 생각하는 능력을 길러두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타인의 슬픔과 눈물에 점점 더 둔감해져 가는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는 건 오직 비극 시인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비극 시인은 엄청난 재능을 지닌 한 명의 예술가가 아닌, 우리 자신을 뜻한다. 우리 모두 행복과 슬픔에 대한 작은 인식 변화만으로 비극 시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거리의 철학자가, 자신의 행복 속에 고립되어 이웃의 고통에 대해 눈과 귀를 막은 젊은 세대에게, 그들 모두가 비극 시인으로 거듭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부치는 편지이다.        



*위 글은 교양 과목 과제로 제출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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